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a14110ad250bb45b9634115d9a2cc8b15fdf91f780e19dff01e21c6d781894b7146c23b3dcb68351683bf3cb53377a457c

약간 주의) 본 소설집은 독붕이들 입맛에 안 맞을 수 있는 단편들이 몇몇 존재함

기본적으로 '환상 소설'을 기반으로 하며,

배경 서술에 따라 공감할 수도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는 소재들이 있음

모든 대명사는 '그'로 통일되어 있음. 중간에 성별이 헷갈릴 부분이 존재했음. 한 단편은 남남커플이 주인공임. 그게 중심은 아님.

주제의식과 표현까지 그런 방향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김



1. 아지랑이

어느 날 갑자기 툭하고 별안간 뜬금없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상함을 맞이해야할까. 맞이해야할까?

이를테면 그냥 갑자기 유령이 나온다면, 아니면 해파리가 된다면, 아니면 나무가 되도 좋을 거고, 또 아니면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면 어떨까? 거대 십자가를 등에 짊어진.

어쩌면 그건 나쁘거나,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상하든 평범하든, 그걸 떠안은 채로 일상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따금 현실이 비틀어지기를 바란다. 그건 우리가 비틀어졌기 때문이거나, 세상이 나로부터 비틀어져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비틀어버리는 게 좋아보이거나. 이 바람에는 악의가 없다. 그냥 좋아지길, 더 나아지길. 하는, 이상한 마음뿐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비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눈에 맞게, 우리 감각에 맞게, 우리 언어에 맞게, 우리 생각에 맞게

비틀어버리는 것.

우리는 그걸 상상이라 부르거나, 입맛에 맞는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상상이 눈앞에서 튀어나오면 우린 어떻게 할까.

그러니까, 우리 눈이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던 걸 비틀어 버린다면

눈을 감을까. 감지 않을까.


감든 감지 않든 아마 모든 게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가겠고, 살아가야겠고, 어느새 그건 현실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아지랑이가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듯이. 실제로 일렁이듯이.



2. 마음의 복사(輻射)

아지랑이가 정말로 손에 만져진다면 그건 마음의 투사(投射)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아지랑이와 마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린다.

유령으로 나뉘어진 자신을 만나는 사람, 해파리가 되고 싶었지만 아직 그러지 못한 미련을 도와주는 사람,

연인과 헤어지지 못한 채로 나무가 되어버린 사람, 퇴적된 죄책감을 지닌 옛 동창과 만난 사람.


이들이 마주하는 기묘한 현상들은, 사실 일종의 투영된 마음이다.

유령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슬퍼하고, 해파리가 되지 못한 이유는 이루어지지 못한 늦사랑 때문이다.

나무가 된 건 우유부단함과 미련함 때문이고, 죄책감은 거대 십자가를 등에 짊어진 친구가 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임선우 작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투영하여 아지랑이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향방이 어떻게 되는지, 결국 어디에 닿게 되는 건지, 그것들이 어떤 빛깔을 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마음의 복사에 대하여, 마음이 닿는 곳에 대하여.

광원이 우리를 굴절시키듯

마음이 굴절시킨,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과 앞으로 볼 것들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소설은 마음에서 출발하여 아지랑이를 거친 다음, 생활로 뻗어나간다.

기묘한 비틀림으로 시작한 소설에서 인물들을 어찌 보면 너무 쉽게 그걸 받아들인다. 또는 받아들임 당한다.

그러면 생활이 도래한다. 같거나 다르거나 똑같거나 다르지 않거나. 그런 생활들.


마음이 투사된 환상이 삶에 스며드는 부분.

소설은 대부분 그런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은 뭐가 올까. 그 다음은 대부분 나오지 않는다.

꿈에서 깨면 다음 대사나 장면이 없듯이, 대부분의 소설은 조금 시시하게 끝난다.


그 다음엔 뭐가 올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끝났다는 것.


아지랑이가 더는 도로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름이 끝난 것이다.



3. 다음에 또 봐요

사실 소설 전체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주 흥미롭다기 보단

구성하는 장면들이 매력적이었다. 취향하고 잘 맞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 파편적이고 지리멸렬한 이야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다.

무엇보다 독갤에서 불호로 꼽는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어서 섣불리 추천하기엔 어렵다.


만약 겉절이에 불호가 없고, 그럭저럭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즐기고,

적당한 분위기의 글을 좋아한다면 읽을만 하지 않을까 싶다.


다소 즉흥적으로 읽은 소설이었는데 내게는 대체로 좋은 느낌을 주었다.


더 할 말이 있을까? 없을 것 같다.


시시한 마무리.

.

.

「오후에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여니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보낸 사은품이었다. 안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긱 지압 슬리퍼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이별한 사람한테 지압 슬리퍼를 왜 주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는 순간 깨닫게 되었다.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나는 창문을 열었다. 여기 있던 아저씨 어디 갔어요? 아저씨가 여기서 피워도 된다고 했는데. 그 아저씨 이제 움직여요? 자기가 나무가 됐다고 하던데

......

이제는 나무가 아닌가 봐. 그 아저씨 재밌었는데 아쉽다. 맞아, 재밌었어. 또 온대요? 응. 거짓말이 아니었다. 산(나무가 된 남자)이 남긴 쪽지에는 장판을 고치러 돌아오겠다고 쓰여 있었다.

......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은 먹었다. 아주 잠깐, 시간이 물빛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은 또 어디 갔어요? 담배를 다 피운 여자애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내가 훔쳤어. 언니도 정상은 아니네. 여자애는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 정돈이 끝난 다음 여자애는 내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