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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로 치자면 아주 옛날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총칼로 싸우고 결투로 죽던 시대에
아직 자기 운명은 커녕 카드패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서사시 주인공에 걸맞은 시인이 태어났다
귀공집에서 태어났다니 운도 좋아라
하지만 이를 어쩌나 이 시인의 운명
이 땅은 시와 낭만과 사랑과 동시에
참혹한 결투와 냉혹한 실존이 공존하는 나라
허나 낙천성을 잃지 못한 가엾은 시인은
오롯이 펜대를 휘적이며 이야기를 썼더랬다
펜을 다섯 번 휘두르자 다섯가지 이야기 생기니
거짓으로 빚어낸 털실로 이를 하나로 묶었다
그 이름은 이반 페트로 뭐시기
어려우니까 그냥 벨킨이라 하자구
시인은 도처에 널린 너저분한 이야기들일랑
몽땅 냉소와 말솜씨로 짓뭉개고 싶어하니
이야기는 낭만의 반목에서 시작되어
어쩜 가장 낭만적인 재담으로 향하고
마침내 벨킨이라는 거짓된 이름 아래
가면 쓴 시인의 재미난 풍자극 시작된다
- 표도르 보고몰로브, 『찔려죽어도 시원찮은 이야기』
『벨킨 이야기』는 이 소설들은 이반 페트로비치의 원고를 편집한 것이라는 서문으로 시작된다.
즉 어떤 제3자가 써낸 가짜 이야기라는 걸 읽는 사람들에게 먼저 확인시켜준다.
그리곤 거릴껏 없이 이야기를 시작해버린다.
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소설에는 다섯가지 이야기가 있다.
타고난 재담꾼인 우리 벨킨답게 무엇 하나 재미없지 않은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독자는 읽다보면 어? 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고 굉장히 정석적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 뚝 하고 끝나버린다
물론 결말 자체가 허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도 독자는 자연스레 어? 하고 반응하게 된다.
벨킨이 꺾어버리는 건 바로 독자의 기대감이다.
지금껏 클리셰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갑자기 휙 방향을 틀어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부극에서 결투가 시작되려는데 갑자기 해가 떨어져서 결투를 안하고 즐겁게 술자리를 나누며 Fin. 이런 식이다.
벨킨이 일찍이 소드마스터 야마토를 예언한 걸까?
이 소설은 당시 유행하던 낭만적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은 벨킨이
그러한 소설 사조를 조롱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멜로드라마가 마음에 안 드니까 똑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들을 쓴 거다.
물론 키스씬은 빼놓고.
이러한 낭만 사조에 반목하는 창작 기조와 메타 소설로 만들어버리는 앞의 서문까지 합쳐지며 소설은 일종의 게임(열린책들 석영중 교수님의 표현)이 된다.
그런데 독자와 풍자의 대상인 작가들을 할 말 없게 만드는 점은 소설들이 하나같이 재밌다는 것이다.
뭐 그런데 이런거 집어치우고 그냥 재밌다. 운운. 재밌다.
푸슈킨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재밌으니까,
'러시아 소설들은 왤케 다 어두움?'이라는 생각이 들 때 한 줄기 빛으로 읽어보면 좋다.
스페이드의 여왕
보통 벨킨과 함께 푸시킨의 얼마 없는 중편으로 함께 묶인다.
내용은, 아마도 으레 그렇듯 탐욕에 관한 짧고 신랄한 단상이겠지만,
이하의 내용을 묘사하지 않을 권리를 선사할 수 있도록 독갤러들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재밌으니까 읽어라.
감상평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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