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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참회록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살 수가 없었고,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나 자신의 생명을 빼앗아버리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 갖은 술책을 다 써야 했다.”

 


톨스토이는 죽음의 공포에 맞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를 겪었다. 단순한 육체의 소멸뿐만 아니라 수십년간 갈고 닦은 이성이 사라지는 것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환장파티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영혼의 영원성을 내세우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톨스토이에게 만족을 줄 순 없었다. 톨스토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기독교에서는 현세에서의 삶을 근거로 사후세계의 축복을 약속한다. 톨스토이는 천상으로 올라가는 영혼을 붙잡아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세계에 두고 싶어했다. 톨스토이의 시각에 따르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에 저 세상에서의 즐거움보단 우리가 현재 딛고 서 있는 대지에서의 삶을 우선시 해야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세계에서 자행되는 악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게 된다. 기존의 시각대로라면 저 세계에서의 복락을 위해 현실에서의 악을 참고 견뎌내야 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현재의 악을 감내해야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저 세상을 위한 질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고 정의는 지금 바로 내가 서있는 땅에서 실현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 것도 곤란했다.

 


나는 처음으로 신을 분명히 느꼈다. 그분이 존재했고 내가 그분 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존재했던 유일한 일은 그분 안의 나였다는 것을. 다시 말해 마치 무한한 것 속의 유한한 것처럼 그분 안에서, 또한 그분이 존재했던 유한한 존재처럼 그분 안에서.”

 


인간이 신을 어찌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톨스토이의 경험처럼 톨스토이의 사상에서 신은 초월적 지위를 벗어나 점차 인간이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전락한다.

 


다시 말해 신의 왕국은 지금 대지에 건설되어야만 한다. 현실에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 그런 세계를 건립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이단자이자 현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의 세계관인 것이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은 톨스토이의 입장과 상이하다. 그의 작품에는 톨스토이의 작품과 달리 그리스도에게 감히 반기를 드는 선봉장들이 등장한다. 악령의 스타브로긴과 인신 사상을 주장한 키릴로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신의 존재를 대놓고 의심하던 이반 카라마조프. 하지만, 이런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아주 그럴 듯하며,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박을 들고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적으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따르기보단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구세주는 구태여 외형적인 기적을 보여주기보다는 자유로운 믿음을 통해 인간을 개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둘은 겉으론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콩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톨스토이는 인간의 종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도주의의 신조를 불신해 마지않았고 고뇌에 빠지고 병이 들고 때로는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신의 종들과 더불어 남기를 택했다. 이 두 노역 사이에는 커다란 증오가 지배할지도 모른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고독에 따라 더 깊은 곳을 헤매고 있던 그즈음 가출 후 머리맡에 두 권의 책을 두고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 권은 몽테뉴의 수상록이고, 다른 한 권은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지만, 서로 어울릴 수 없었던 물과 기름같던 존재였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였다. 그는 무엇인가 직감했던 것일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하이라이트이자, 독붕이 페이버릿 파트로 손꼽힐 대심문관 파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장광설을 쏟아붓는 변절자 대심문관이 등장한다. 이때 지상에 낙원을 세우고자 하는 대심문관은 톨스토이,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를 대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상 최대의 선을 구현하고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톨스토이의 사상은 일응 공감이 된다. 왜 지복을 천상에서 누려야 하는가? 왜 지상에서의 악이 활개치는 것을 용인하여야만 하는가? 그것은 신의 무능력이 아닌가? 신으로서도 설명하기 어려우니 그저 참고 견디라. 그렇다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무책임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톨스토이식 지상낙원의 도래가 기다려진다. 그곳에는 온 세상에 사랑이 가득하고, 내 이웃과 내 원수에게도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을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제시된 대심문관이 세운 세계와는 상이하지만 톨스토이가 세운 세계라면 사랑이 가득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톨스토이식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 한 가지 전제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지상왕국이 건설되어야 하며, 사랑을 해하는 악이 생겨나선 안되고, 설령 생겨났다해도 이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는 것을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할 것이며, 사랑을 위반한 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과학을 위시로 하여 사랑의 매를 위반자에게 선사해야만 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의 왕국을 위태로운 듯이 내려다 볼 것이다. 과학을 밑바탕으로 한 실증주의의 도래, 실증주의의 대두로 인한 인간 개인의 의지를 무시한 실증주의 범죄학의 등장, 실증주의 범죄학은 인간을 더 이상 지상에 서 있을 수 없게 한다. 인간은 더 이상 범죄를 스스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여타 다른 요소에 의해 범죄를 저질러 버리게 된상황에 처하게 되고야 만다.

 


합리성의 신화는 인간 최대의 행복과 선의 실현을 기반에 둔다. 그리고 인간은 합리성에 따라 최선의 결과를, 최대의 행복을 누리길 원한다. 하지만, 합리성의 신화는 인간에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진 못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합리성의 신화 앞에서 산화되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합리적 선택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난다. 인간은 그렇게 점점 주체성을 상실한 채 합리성이라는 절대기준에 의해 선택하고, 행동하며, 결과를 얻어낼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합리성의 맹목적인 추구와 합리성을 추구하게 된 실증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추기는 과학을 맹렬히 노려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합리성에 어긋나고 반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역설한다. 지구 최대의 반항작, 합리성에 대한 반동으로 내뱉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갈에서 자유의지를 수호하려는 일념이 애초로우면서도 통렬하다. 그의 통찰력과 직관은 지상최대 낙원을 만들고자 시작된 사회주의의 건설과 붕괴 너머 현재에까지 이른다. 그의 날카로운 통찰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직 유효하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악령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려는 것을 철저히 감시해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을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게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적 시각에 따라 어차피 안될건데 왜 해?’ 이상적인 체계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반대하거나 또는 낮잡아보거나, 경멸의 눈초리를 흘기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려는 노력은 일순간에 큰 성공을 거두진 못한다고 할지라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세계는 더 발전하게 될 것이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드려는 이상없이 지상낙원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풍요와 편리를 최대한 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전제사실이 필요하다.

 


다른 가치들에게 인간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다른 가치를 고려하기 앞서 최우선의 가치로 대우받아야만 한다. 이 사실이 모두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을 때라야 비로소 인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비로소 지상낙원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