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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람, 「이가경의 척사 활동과 공서파 형성에 끼친 영향」, 『교회사연구』, 30, 2008
해당 논문은 공서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기경과 그의 척사 활동이 공서파 형성에 끼친 영향을 다룬다. 2장에서는 이기경의 생애와 척사 활동에 대해 다룬다. 이기경은 1756년에 태어나 1777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89년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하다가 진산사건 당시에 경원부로 유배되었다. 1794년 해배된 이기경은 여러 관직을 거치다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여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해배되었으나, 다시 유배되었고, 1809년 해배된 후, 1819년 사망하였다. (51쪽)
이기경은 공서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원래 정약용, 이승훈과 친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정미년(1787) ‘반회사건’으로 친서파 근기남인과 사이가 멀어진다.
반회사건을 강이원으로부터 듣게 된 홍낙안은 이기경에게 같이 이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자고 제안했으나, 이기경은 이에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이기경은 정약용 등과 함께 서학서를 읽은 적이 있으나, 반회사건을 계기로 이들과 관계가 멀어졌다. (52~57쪽)
진산사건 이후 사건 이후 한때, 정약용, 이승훈과 친분이 있었던 홍낙안과 이기경은 홍낙안이 이기경 · 이승훈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은 이기경의 심문 과정에서 드러난다.
진산사건 이후에, 사실상 그들과 단절하고, 강준흠 · 목만중 부자 ·홍인호와 힘께공서파를 형성하였다. 형성하였다. 후에는 이기경-목만중, 이기경-강준흠의 자손들이 혼인 관계로 발전할 만큼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57쪽)
이기경은 계부인 이제임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이제임은 남인의 족보인 『남보』에는 이제임이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정복과도 연결 관계가 있었느데, 안정복의 제자이자 1779년 당시 정통 유학을 따르는 일련의 신진 사류를 이끄는 심유(沈浟)가 이기경의 외사촌이었다. 또한 안정복이 이기경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57~59쪽)
이기경을 비롯한 공서파들은 상소를 올리며 천주교 사건을 정치화시켰고, 척사 활동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안정복 등은 사학에 관련된 인물 중 남인들이 많았기에 정치적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기경 등의 공서파는 이론적 척사 활동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척사 활동으로 발전시켰다. (59쪽)
이기경은 반회사건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온건한 척사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산사건에서, 이승훈 등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며 채제공계 남인과 대립하였고, 진산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경원부로 유배되었다.
1793년 이후 이기경은 홍인호와 강준흠 등과 가까워졌다. 이는 척사 활동을 펼쳤던 이기경의 약력과 홍인호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디. 이후, 홍인호는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64~69쪽) 저자는 이기경이 공서파의 주도적 인물은 아니었지만 친서파와 가까운 관계였고, 반회사건을 목격하는 등의 친서파에 대한 정보가 많았기 때문에 공서파가 활동이 가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69쪽)
김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