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이든 그 서사의 바탕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관찰이 있고
그를 통해 독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할 체인소맨 또한 인간의 삶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이 담긴 작품이고 이는 작품 내내 주인공이 싸우는 목적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자 가슴을 만지고 싶다든가 하는 단순한 이유에서 싸움을 시작했던 주인공이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점점 고차원적인 목표를 인지하고 성숙해지는 부분이 체인소맨을 감상하는 포인트 중 하나가 되겠다.

이러한 주인공의 성장은 최종장에서 적과의 대립으로 완전한 결실을 맺는데,
작품의 끝에서 밝혀지는 최후의 적의 목표는 여타 만화의 빌런들과는 다르다.
얼핏 보기엔 인간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을 모든 고통에서 해방하는 것.
죽음이나 기근, 전쟁 등으로 대표되는 인간 세상의 모든 해악을 없애는 것이 주인공과 대립하는 숙적의 목표다.

어느 누구도 배고픔이나 폭력 같은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적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끊어냄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당신이 만들 세상에 망한 영화는 있어?'하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주인공이 생각하는 망한 영화란 무엇일까?
인간의 모든 슬픔의 싹을 없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적에게 마지막으로 물어야 했던 망한 영화는 어떤 존재일까?
이를 알기 위해 우선 주인공의 삶을 살펴보자.



주인공은 작품 내내 타인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첫 화부터 가족하나 없이 가난하고 기구한 삶을 살다 배신당해 죽는 걸로 시작해
함께 싸웠던 동료들도 죽어나가고, 첫사랑에게는 배신당하고, 급기야 가족 같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수없이 반복되는 수난의 끝에서, 주인공은 좋아하던 여자에게 '당신의 개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안식을 느끼지만 그 또한 잠시,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을 알게 된 주인공은 최악의 파국을 겪는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상황은 급반전되어,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찬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

다시 삶의 의욕을 찾은 주인공은 최후의 적과의 전투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래된 연인과의 영화관 데이트를 떠올린다.

그리고 망한 영화의 존재를 묻는다.
자신이 겪은 모든 후회와 슬픔을 떠올리면서.


다시 내용을 돌아보면
부조리한 운명에 휩쓸려 몸도 정신도 죽어가는 와중에
자신을 찬양하는 tv프로그램을 본 주인공은 노골적으로 흥분을 드러내는데, 동시에 이상한 기분도 느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황홀할 수가 있다고?

가족 같은 동료를 죽인 자신이 역겨워 구토했던 내가
지금은 아침밥으로 스테이크를 먹으며 여자친구를 10명 정도 만들고 싶어한다고...?


이런 슬픔과 기쁨의 혼재를 느끼면서 주인공은 깨달았을 것이다.

아! 세상이란 원래 이런 거구나.
살아가는 동안 울고 웃으며, 나는 수많은 희망과 좌절을 반복할 수밖에 없구나.

tv를 보기 전에 또 다른 동료와 나눈 대화가 이 결론의 힌트가 됐다.

주인공은 '개처럼 남의 말을 따르며 사는 불행한 삶'을 자기만의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동료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응수한 것이다.

남이 핀 담배를 삼키고 장기를 팔아도 굶주리며 개처럼 살던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평범한 사람들조차 현실을 개같이 인식한다는 데서 주인공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때부터 자신의 삶에 대한 주인공의 개인적인 호소는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이해로 바뀐다.

부조리한 운명에 휩쓸린 기구한 삶이지만, 이것은 자신에게만 내려진 저주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슬픔의 한 모습이라고 말이다.

곧이어 tv로 본 자신에 대한 찬양은 주인공에게 미래를 꿈꾸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노골적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주인공은 동시에 생각했을 것이다.

동료도 가족도 죽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고 싶다고.
즉,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며 나는 다시 미래로 나아갈 거라고.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는 타인 경시나 이기주의의 끝에 나타난 게 아니다.
오히려 좌절과 실패의 반복 속에서도 다시 한번 타인과 공존하는 미래를 그린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적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미래가 있기 때문에 슬픔은 더욱 빛난다.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움과 이해로 바뀌고, 그것을 아는 나는 더욱 풍부한 감정으로 또 다른 타인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망한 영화를 보는 것이 곧 '슬픈 일'은 아니지만
이 둘의 공통점은 한층 높은 인식을 얻기 위한 과정이 되어 준다는 데 있다.

오래 전, 주인공이 애인과 영화관 데이트를 하루종일 했던 날.
주인공은 하루 내내 본 영화들이 하나같이 따분해 마지막 영화도 봐야 되나 망설이다
'내 취향의 영화는 열 작품 중 한 작품 꼴이지만 그 한 작품 때문에 인생이 바뀐 적 있다'는 애인의 말을 듣고 마지막 영화를 감상해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하루 내내 했던 '망한 영화를 보는 행위'또한 감동적인 영화를 즐기는 과정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좌석에 앉기까지 품어왔던 기대,
크레딧이 올라가며 선명해진 실망,
다시 새로운 영화의 포스터를 발견하며 반복하는 기대

이런 지루한 과정 또한 훌륭한 영화 감상을 빛나게 만들어 준 동등한 공로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망한 영화는 슬픔과 같은 미래를 향하게 되고,
이 과정을 거치고 맞이하는 감동은 그것이 없는 것에 비해 좀 더 풍부하고 진실한 울림을 갖는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긍정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인공은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신이 만들,
어떠한 고통도 슬픔도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미래를 그리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후회 혹은 만족으로 양분해 판단한다.
나 또한 많지 않은 나이지만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내 삶에 영향을 준 여러 일들이 있었고, 그 중 부정적인 일들에는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내 마음과 별개로 어찌하든 시곗바늘은 돌고,
모든 즐거운 일과 슬픈 일, 잘한 일과 못한 일의 결과로서 지금의 내가 남았다.

그 모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기 위한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도 만족스러운 일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라는 인격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슬픔 또한 내 내면의 성장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실패나 아픔을 인정하고 지나왔기에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으며, 다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
햇살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지 않은가.














반고닉 ㅇㅇ라 참가 대상은 아닌데..
올리기만 하는 건 상관 없지? 최근에 너무 빠진 만화라 여기서 소개하고 싶었다 ㅋㅋ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은 없앤다고 없앴는데..
사실 독갤 씹덕놈들 이미 다 읽었을 것 같긴 해
혹시 못 본 씹덕 친구들 있으면 체인소맨 꼭 봐라

내 표현력 부족으로 이 글은 너무 산만하고 장황하게 보였을 수 있으나.. 만화는 내 인생 원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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