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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써둔 거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 미안해, 너의 손을 잡고 걸을 때에도 떠올렸었어, 그 사람을."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고백'의 가사이다.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질 만한 내용의 가사는 아니지만, 나는 이 가사의 부끄러운 면에 혹은 그런 내용을 담담하게 부르는 솔직함에 반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이 가사의 토대가 되었다는 만화 <H2>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보고 있던 야구 만화 (아마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크로스 게임>이었을 것 같다. 투수의 구속이 시속 150km대를 넘어 160을 찍고 있던 장면을 아버지랑 같이 보았던 기억이 난다.)와 비슷한 그림체라 정감이 갔다. 그렇게 경험한 적 없는 추억을 만나러 가듯 이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H2>는 청춘야구만화이다. '청춘'이랑 '야구'라는 키워드가 이토록 잘 맞아떨어질 수 있음을 이 만화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H2>는 주인공 쿠니미 히로가 부상으로 더 이상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뭘 태우고 있는 거니?" 라는 어머니의 질문에 그는 "내 청춘이에요." 라며 대답한다. 겨우 고등학생인 그는 자신의 청춘이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기회는 이미 끝나버렸다고 생각한다. <H2>의 배경에는 전반적으로 '늦어버렸다'라는 후회의 감정선이 흐른다. "중 2때까진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 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이었던 히로가 소꿉친구 히카리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도 '이미 우리는 늦어버리고 말았다' 라는 후회가 중심이며, 히로와 그의 라이벌 히데오 그리고 포수 노다 세 명의 친구가 늘 함께했던 중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듯 <H2>의 등장인물들은 고등학생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못하게도 벌써부터 과거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야구는 어떤 스포츠인가. 흔히 9회 말 2사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끝날 때까지 정말로 끝난 게 아닌 스포츠이다. 고등학생들은 그 어린 날에 자신들의 청춘이 이미 끝나버렸다고 자평했지만, 사실 그들의 청춘은 결코 끝난 적 없었다. 히로의 팔 부상, 노다의 허리 부상이 돌팔이의 진단이었고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걸 깨달으며, 그들은 새로운 학교의 새로운 야구부에서 다시금 야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H2>는 청춘의 복구에 대한 만화이고, 결코 청춘이 늦어버리지 않았음을, 과거만 바라보느라 흘려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청춘임을 역설하는 만화이다. 물론 남들이 어리다고 생각할 그 시기에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예를 들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못하다.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서도 잠시만 뒤돌아보면 과거가 너무나 끈끈한 탓에 자꾸 연연하게 된다. 하지만 실수하면서도 성장하는 감동을 원치 않는다면 누가 고교야구를 보겠는가. '청춘 고교야구 만화'인 <H2>는 그런 어리숙함을, 아마추어리즘을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H2>는 매우 정적이어서 때로는 시간이 아예 멈춰버린 듯한 연출이 더욱 인상적이다. 야구가 볼 플레이 상황이 가장 적은 스포츠 중에 하나이듯이, 강렬한 순간 순간 사이에 하늘로 솟아오르는 적란운을 비춘다거나 쏟아져내리는 분수의 물방울들을 그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작가는 만화의 사이사이에 일부러 있어도 크게 의미 없을 컷들을, 비는 시간을 끼워넣는다. 하지만 그 의미 없는 컷들이 만화의 페이지를 펼쳤을 때 정말 그 순간의 햇빛이 얼마나 강할지, 날씨가 얼마나 무더울지 상상하게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또 굳이 묘기를 사용하지 않는 컷 분배는 너무 자연스러워 만화의 페이지 하나하나가 마치 일러스트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컷으로서가 아닌 페이지로써, 더 나아가 만화 전체로 <H2>의 연출은 나무가 아닌 숲으로 청춘의 이미지를 그린다.
<H2>의 주요한 갈등은 히로와 소꿉친구 히카리, 그리고 그녀의 연인이자 라이벌인 히데오 세 명의 삼각관계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구판 <상실의 시대> 해설에서 숲(森)이라는 글자의 이미지가 삼각관계를 묘사한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가장 균형잡힌 이미지의 관계가 바로 삼각관계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세 명의 관계가 가장 균형이 적절하다는 이야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런 얘기가 생각날 정도로 <H2>의 삼각관계는 잘 짜여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세 명이 서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낮추고 부정하는 방향으로 갈등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히로는 자신에게 이제와서 집착하는 히카리가 밉다거나, 히카리의 연인이 된 히데오를 원망하지 않는다. 줄곧 히카리를 걱정하게 만드는 자신을 자책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히카리는 히로나 히데오 둘 중 하나가 싫어하는 게 아닌, 이제와서 히로에 대한 감정을 고민하는 자신을 더욱 싫어한다. 히데오는 히로와 히카리가 같은 곳에서 잤다고 해서 두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그런 데에 질투하는 자신을 더 못마땅해 한다.
그렇기에 결국 마지막 센카와고와 메이와고의 대결도, 센카와의 에이스 투수 히로와 메이와의 천재 타자 히데오의 대결도 자신과의 싸움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세 사람은 전부 자신한테 진다. 히로는 더 이상 히카리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기필코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던졌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약해진 마음에 한복판 직구를 던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한편 히데오는 히로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음에도 마지막엔 히로가 정말로 자신에게 어떻게든 이기려 할 거라고 착각한 탓에 한복판 직구를 놓치고 만다. 히카리는 히데오가 패배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누구보다 자신에게 기대고 싶어했음을 알지 못했다. 세 사람은 스스로에게 패배함으로써 성장했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눈앞에 놓인 나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시간은 무더운 여름이다. 시작하며 청춘이 끝났다고 선언한 만화는 결코 끝나지 않는 청춘 속에 독자들을 내려주고 마침표를 흐린 채 떠나간다. 그리고 추운 겨울 스물 셋의 한 군인도 이 만화를 보며 아직 나의 청춘이 끝나지 않았기를 기대한다.
그냥 지금 고닉 하나 파고 글 쓰죠 - dc App
고닉 파는거 어려운 일 아닌데 말이지
H2 진짜 재밌게 봤어요. H 4인방은 당연하고, 노다랑 키네가 너무 좋았음
재밌게 잘 봤어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