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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게으름뱅이로 산다는 게

이 개새끼와 정반대로 사는 거라면,

앞으로 꼭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야망 없이 살자는 야망, p23.



미제(美製) 꿈이 있다. 드림 메이드 인 아메리카. 아메리카 드림이라고 불러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이 제품의 내용물을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성공(흔히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에 대한 염원, 끊임없는 진보에 대한 믿음 등등

도시화된 문명과 자본주의를 선구적으로 이룩한 미국은 곧 자신들의 꿈을 세계 곳곳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도 이 미제 꿈을 열렬하게 수입하는 나라 중 하나다. 미제 꿈의 성능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비 맞아도 뛰지 않는 양반의 나라를 반세기도 안 돼서 노동 중독의 나라로 바꿔놓았으니 말이 필요 없다

과거 바티칸이 가톨릭의 심장으로 유럽을 지배했듯이, 미국은 이제 미제 꿈의 성지가 되어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메카에 이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도 아닌, 미제 꿈의 생산지이자 본거지인 미국에서 말이다

아서 밀러, 찰스 부코스키 같은 이단은 미국이 설파하는 꿈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진짜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어요? 근데 물질적 성공이 다 좋은 건 아니지 않아요? 서로 성공하려고 저렇게 다투는 것 좀 봐요

근데 꼭 진보해야만 하는 거예요? 진보하지 않아도 그냥 편하고 인간답게 살면 안 돼요?” 

위대한 미국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이단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옛날 세일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녀로 몰려 통구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신성한 미국에서 이런 불경한 발언을 하다니…….


근데 웬 걸? 금방 단죄될 것 같았던 이단들은 멀쩡히 잘만 살아남았다심지어 많은 추종자들이 이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몇몇 추종자들은 아예 이단을 신화적 존재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단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찰스 부코스키다

신기하지 않은가? 노력과 성공의 정비례 관계를 강하게 신봉하는 미국인들이 찰스 부코스키를 가장 좋아하는 현대 시인으로 꼽는다니

나사렛에서 유다가 환영 받는다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이야기다. 어떻게 미제 꿈의 본거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믿음이 강하면, 믿음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분노도 큰 법이다. 미국인들이 찰스 부코스키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믿음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 눈에 들어왔을 때 느끼는 불편함과 분노는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미제 꿈의 신봉자들에게 이제 다른 미국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지는 게 없는데, 어떤 이는 복권이나 투기를 통해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린다

사람들은 서로 성공하기 위해 상대방을 짓밟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유대감은 사라지고, 성공에 대한 개인들의 집착만이 들끓는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지만, 정작 과도한 노동이 인생을 갉아먹는다. 이러한 현실 앞에 미국의 꿈은 초라하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부코스키는 경험을 통해 이러한 미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그의 인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느라 병을 얻었다는 카프카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글을 썼지만, 출판사는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지 14년이 지난, 마흔 아홉 살 때에야 비로소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었다

이 기나긴 세월을 버텨오며 부코스키는 미제 꿈의 속살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작가가 된 그는 그간 단단히 벼렸던지 미국의 꿈에 대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이란 시에서 그는 노력의 자도 꺼내지 않는다. 단지 방탕한 생활과 맥주만을 권할 뿐이다.

태도 역시 안일하기 그지없다. “시간은 있다. / 없다고 해도 / / 괜찮다.”라고 여유롭게 말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야망 없이 살자는 야망에서 다시금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노력과 성공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아버지에 대해 부코스키는 게으름뱅이로 산다는 게 / 이 개새끼와 정반대로 사는 거라면, / 앞으로 꼭 그렇게 / 살아야겠구나.”라고 품평한다.

기회를 잡아요라는 시에서는 단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이유로 떵떵거리며 사는 거렁뱅이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지옥을 달리다모두들 말이 너무 많다는 공격적이고 호승심(好勝心)에 사로잡힌 현대인을 비판한다

그는 경쟁에 매몰된 사회에 대해 사람이 / 사람에게 갖는 / 호감도 / 모두 멀리멀리 / 쓸려 갔구나”(부패)라고 한탄한다

부코스키의 절친이었던 작가 존 윌리엄 코링톤의 말처럼 부코스키의 세계는 비정함으로 얼룩진 산업사회일 뿐”(p148)이며,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이 가진 병폐에 대한 잔인한 고발이다.


그러나 부코스키의 비판에서 우리가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미제 꿈의 주요 수입국인 만큼, 한국 역시 부코스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표방하지만 대통령 측근의 꿈만 이루어지는 불공평한 나라행복한 미래를 위해 어느 나라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지만 정작 행복감은 바닥인 나라

직장에 모든 걸 바친 노인들이 명예퇴직 후 쓸쓸히 공원을 배회하는 나라고등학교 때부터 치열한 순위 경쟁에 목을 매는 나라

미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은 나라, 미국보다 더 미국의 꿈을 신봉하는 나라. 그게 지금 한국의 모습이 아닐까

평이하게 쓰인 부코스키의 시지만 쉽게 읽을 수만은 없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 그래도 너무 우울해하진 말자. 만약 나태한 복지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평생 가도 부코스키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헬조선과 노오력이란 단어에 쓴웃음을 짓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 거만하고 마초적인 태도를 혐오하는, 섬세한 독자라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쉬운 글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너무 쉬운 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라면 좀 심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