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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에서 언급되는 엽란을 날려라의 인용은 모두 현암사(2023)에서 출판된 역본을 기준으로 한다. 단 성경의 일부를 인용한 부분만은 예외적으로 가톨릭의 번역본을 그대로 옮겼다.
이제 고든은 그들의 문제점을 알았다. 그저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돈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돈이 미덕이며 가난이 범죄인 세계에서 말이다. 그들은 가난이 아니라 고상한 가난에 발목잡혀 있었다.
그들은 돈의 규범을 받아들였고 그에 따르면 그들은 실패자들이었다. 하층계급처럼 돈이 있든 없든 그저 억척스레 살아나갈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하층계급이야말로 옳다! 전재산 4펜스를 가지고 여자를 임신시키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경의를! 적어도 그의 핏줄에는 돈이 없을지언정 피가 흐르고 있지 앉은가!
관상용, 공기정화용 식물로 사용되는 엽란. 좁은 의미에서는 엽란속의 Aspidistra elatior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반역, 거절. 일본에서는 꺾이지 않는 마음, 영국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예전의 신은 이제 돈이 되었다. 실패와 성공만이 있을 뿐, 선과 악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에릭 블레어는 6살 때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면서 울어댈 정도로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변 사람들은 (사립학교든 버마든 런던이든 스페인이든) 언제나 혼자 있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한편으로는 또 그런 주제에 항상 주변 여성들에게 만남을 요구하거나 구혼을 신청하는 등 한가지 단면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모순된 인물이었다. 그랬던 것인지 말년의 조지 오웰은 "작가의 삶을 알아야만 그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라는 언급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 특유의 모순을 발휘해 자신이 죽고 난 뒤에 평전을 절대 쓰지 말라는 이상한 유언도 남겼지만.
이런 그의 모순을 결정적으로 들어내는 작품이 바로 1936년작 「엽란을 날려라」이다. 이 작품은 보통 가난에 시달리리던 당시 오웰의 자화상으로 판단하는 견해가 주류다. 그러나 오웰의 전기 작가인 마이클 샐던(Michael Shelden)에 따르면 1935년 그의 수입은 약 200파운드 정도였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오웰은 작중 경멸하던 카피라이터의 수입과 비슷한 수준의 생계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28년 그가 막 작가의 꿈을 피기 시작할 무렵에 그는 아이의 수술비를 벌려고하는 단편의 희곡을 쓴다. 그러나 주인공은 카피라이터를 하기보다 자신의 아내가 매춘을 하는 것을 원한다. (안타깝게도 이 단편은 동물농장 우크라이나어 서문에 따르면 아무도 출판해주지 않아 홧김에 폐기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고든 콤스톡(= 에릭 블레어)는 왜 그렇게 돈을 거부하고 그에 맞서기를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 투쟁을 어째서 포기하였는가? 이 글은 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글이다.
소설의 첫 부분은 신약 성경의 유명한 부분인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고린도전서)의 13장을 개작함으로서 시작된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와 심지어 천사의 언어를 말한다 할지라도 내게 돈이 없다면, 나는 소리나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내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있으며 또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게 돈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내 모든 재산을 희사하고 내 몸마저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내게 돈이 없다면 내게는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돈은 너그럽습니다. 돈은 친절합니다. (돈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돈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찾지 않습니다. 돈은 분통을 터뜨리지 않고 억울한 일을 따지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제는 믿음, 희망, 돈, 이 세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돈입니다.
여기서 조지 오웰은 '사랑'이라는 원본을 돈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13장 8절을 생략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이라고 해도 없어질 것입니다. 언어라고 해도 그치고 말 것입니다. 지식이라고 해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런던은 사랑을 끝내 스러지게 만들고 말았다. 이제 인간을 종속시키고 그러한 계약의 매개체가 된 돈만이 돈재한다. 돈에 굴종하라, 그러면 그대는 굶어죽지 않으리. 그리고 그런 종속은 인간의 생명력을 마모시킨다.
적어도 어렸을 때의 고든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콤스톡 가문은 조부인 새뮤얼 콤스톡이 죽은 이래로 끊임없이 몰락해가는 집안이었다. 11명이나 되는 자식 중 누구도 괜찮은 직업이나 도전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결혼조차 하지 못한채 유산을 무의미하게 낭비해가며 살아갔다. 유일한 예외가 바로 조부에게 저항한 뒤 회계사 사무실을 차린 고든의 아버지 존이었는데, 그런 그조차도 고든 콤스톡은 원하지 않은 출생으로 태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뒤 30년간 콤스톡 집안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끔찍한 것은 그들의 집안은 무기력하게 몰락해가는 주제에 생활습관만은 여전히 중산층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건강과 돈에 집착하면서 잔병치레와 맞바꾸어 얼마 남지 않은 유산을 야금야금 써먹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돈에 대한 집착을 완수하기 위해 고든을 사립학교로 보내고 만 것이었다. (그 학교는 1년 회비가 120파운드나 되었는데, 참으로 우연찮게도 이튼 칼리지의 당시 1년 학비는 125파운드였다.) 그 학교에서 고든은 가장 가난한 아이였고 주제에 걸맞지 않은 어른들의 몽상을 이루기 위한 대가로 또래 아이들에게 멸시받으면서 그 응분을 다른 아이에게 푸는 버릇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고든은 한 가지 결심을 가지게 된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고든은 결론내렸다. 부자가 되거나, 아니면 부자가 되기를 고의로 거부하거나. 돈을 갖거나 아니면 경멸하거나. 돈을 숭배하면서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고든은 자신이 돈을 벌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돈벌이로 이용해먹을만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건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은 고든에게 너처럼 골치 아픈 선동꾼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귀가 닳도록 이야기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좋아, 그렇다면 '성공'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하리라. '성공하지 않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리라. 천국의 노예가 되느니 지옥의 왕이 되리라. 열 여섯살에 이미 고든은 자신이 어디에 서야할지를 알았다. 그는 돈의 신과 그 야비한 사제들의 적이 되었다. 그는 돈에 선전포고를 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이 돈에 대한 집착을 사랑으로 바꾸게 된다면 아마 우리들은 이 소설의 진짜 주제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리라.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고든은 결론내렸다. 모두에게 사랑받거나, 아니면 모두를 경멸하던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고든은 자신이 아웃사이더로 살리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줄만한 인간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를 이 꼴로 만든 것은 교사들이었다. 교사는 너처럼 근성이 글러먹은 아이와 어울릴 사람이 없으리라고 귀가 닳도록 이야기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좋아, 그렇다면 사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하리라.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리라. 히히덕거리는 사기꾼 행세를 하느니 외로운 성자로서 살아가리라. 열 여섯 살에 고든은 이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았다. 그는 호남자와 중산층의 적이 되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웃사이더는 요즘 말하는 아싸보다는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The Outsider에서 말하는 외부인의 개념에 더 가깝다. 재밌는 사실은 엽란을 날려라와 아웃사이더 모두 빅터 골란츠Victor Gollancz를 통해 해 출판했다는 점이다.)
물론 고든이 기대는 것이 있기는 했다. 우연찮게 교내신문을 편집하거나 잡지에 시가 수록되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 찾기는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의 종착지는 가장 끔찍한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바로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취직한 것이었다. 같잖은 광고슬로건(=헛소리)로 판매량을 증진시키는 일. 즉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속여서) 돈을 내게 만드는 일이다. 고든 콤스톡은 이런 곳에서 지내면 돈(= 그리고 애정)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까지 속이게 되리라.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사람들에게서 경멸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게 만든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그는 잡지 편집자 필립 레블스톤의 도움을 받아서 헌책방 직원으로 옮기게 된다. 비록 급여는 반토막이 났지만 그 대신 위선없는 정직한 직업이다. 그는 점차 몽상에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돈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든이 바람이었다. 돈 한 푼 없는 은둔자의 인생을 그는 막연히 꿈꾸고 있었다. 진심으로 돈을 경멸하면, 하늘의 새들처럼 어떻게든 계속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고생에 대한 보람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기초적인 생계를 꾸리기에도 벅찬 수입으로는 도저히 문학에 전업할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는 문학을 통해 성공을 거두어 돈(그리고 사랑)에 도전하고자 시도하지만 도저히 이루지 못한다. 돈(사랑)의 부족이 마음의 부족까지 초래하고 만 것이다.
사실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사랑을 진실하게 바라고 있다. 성공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가난뱅이라서 문학 클럽에서 버림받은 그는 -그는 자신이 가난뱅이라서 버림받았다고 믿는다.- 술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고든은 라운지 바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창에는 서리가 낀 데다, 퍼브 안의 열기 때문에 김도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그래도 가느다란 틈들이 있었다.고든은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플랙스먼이 그 곳에 있었다.
라운지 바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밖에서 보는 방이 모두 그렇듯, 형언할 수 없이 안락해 보였다. (중략) 고든은 마음이 아렸다. 저기에, 저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맥주와 담배를 즐기며 여자와 시시덕거릴 수 있다면! 그냥 들어가 버릴까? 플랙스먼에게 1실링을 빌릴 수도 있었다. 플랙스먼은 흔쾌히 빌려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플랙스먼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 왔군, 친구! 안녕하신가? 뭐? 1실링? 그쯤이야! 2실링 빌려주지. 자, 받게나, 친구!"
하지만 고든은 자신의 전재산인 3펜스 동전을 끝내 던진 뒤 집에 돌아와버리고 만다. 왜? 자신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은 모든 이에게 경멸받을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다. 설사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방이 돈을 가졌기에 가능했을 뿐,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을 가진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고든은 그래서 부자 편집인 레블스턴을 찾아간다. 막대한 불로소득으로 사회주의를 홍보하는 잡지를 홍보하면서도 속물 근성을 보이지 않고 너그러워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고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레블스턴. 그야말로 인싸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고든은 자신의 속 마음, 그의 내면 속의 두려움을 털어놓는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내 시도 죽은 겁니다. 당신도 죽었어요. 우리 모두 죽었어요. 죽은 세상의 죽은 사람들이죠
고든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자신이 문학으로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른 일족처럼 무기력하게 몰락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진실을. 레블스턴은 자본주의의 병폐에 따른 일시적 문제점은 사회주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설득하지만 가난뱅이 외톨이인 고든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헛소리이다.
가난하면 모두에게 당연한듯이 짓밟힙니다! 모두가 가난뱅이를 짓밟고 싶어해요! 모두가 빈털털이를 증오합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그리고 보복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가난뱅이를 모욕해요.
오웰 본인도 인정하듯이 이것은 삐뚤어진 생각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듯 자학적인 고통은 일종의 쾌감까지 느껴지는 법. 듣다못한 레블스턴이 입 좀 닥치라고 10파운드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고든은 거부한다. 이번에도 굴복까지 반걸음 남긴채로.
이런 고든의 가난에 대한 집착이 가장 이상한 형태로 구현되는 것은 바로 여성(애정)에 대한 집착이다. 그는 여성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을 이해하주는 로즈메리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로즈메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어린 아이같다. 동침을 요구하고 그것을 거부하면 가난뱅이라서 그러는 거냐고 칭얼거리는 것. 이런 칭얼거림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로즈메리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무능하기때문에 믿지 못한다는 두려움.
어떻게보면 지금도 당신은 나를 경멸하고 있어. 아, 물론 당신이 날 좋아하는 것 정도는 알아. 하지만 나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잖아. 좋아하기는 하지만 당신과 동등하지는 않은 인간. 당신에게 난 그런 존재야
그런 고든의 칭얼거림에 대한 답변으로 로즈메리는 고든에게 키스를 해준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내어주는지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빠진 고든을 어루먼져주고싶다는 욕망.
그렇게 다시금 화해를 한 둘은 시골 여행을 계획한다. 부족한 돈을 채우기 위해서 고든은 자신보다 소득이 적은 누나 줄리아에게 돈을 빌린다. 가족이니까 괜찮다. (안 괜찮다!) 하루종일 아무도 없는 숲을 거닐면서고든은 오랜만에 안식을 취한다. 굶주림이 닥치기 전까지는. 점심을 먹지 못한 둘은 호텔에 들어선다. 처음에는 빵과 맥주만 주문할 생각이었지만 들어서자마자 주눅이 들어서 고기 요리와 와인을 시켜 전재산을 탕진해버리고 만다. 축 늘어진 그는 로즈메리에게 다시금 동침을 요구한다. 로즈메리는 언듯 승낙하는듯 하다가.... 거부한다. 임신이라도 하면 어쩔려고? 결국 기분을 잡친 고든은 집에 쓸쓸히 돌아온다.
이제 이 소설은 후반전이다. 소설은 갑작스럽게 반전된다. 고든에게 미국 잡지사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의 시를 수록할 것인데 혹시 몇 수 더 보내줄 수 있냐고 물으면서 50달러(10파운드 이상)에 달하는 거액을 보내온 것이다. 만세! 그는 이제 실패한 가난뱅이-아웃사이더-가 아니다. 대서양 양쪽에서 주목받을 신예 문인 고든 콤스톡이다.그는 드디어 모든 것을 청산할 기회를 잡았다. 유년 시절의 굴욕, 레블스턴과의 당당한 교류, 줄리아에게 진 빛, 로즈메리와의 결혼. 모든게 해결될 것이다! 고든은 줄리아와 레블스턴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하지만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둘은 고든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라면서 자꾸 눈치를 준다. 그러자 고든은 이들이 자신을 모욕한다는 왜곡된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난 본 때를 보여줄꺼야, 이 돈을 다 탕진하더라도! 그렇게 고급 와인과 팁에 3파운드 이상을 쓰면서 호텔에서의 치욕도 청산한 고든은 다시 도전한다. 로즈메리와 이번에야말로 동침하고 말리라!
짝!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고든은 레블스턴과 둘이서 남겨진다. 아니, 둘이 아니다. 레블스턴이 택시에 정신팔린 사이에 고든이 매춘부 두 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춘부를 로즈메리로 대체한채 욕망을 풀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자신의 돈을 그렇게 다 탕진해가면서 고든은 다시금 자신의 미래가 암울해지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잃고 만다.
낯선 천장이다... 고든은 유치장에서 정신을 차린다. 들어보니 길거리에서 주정을 부리다가 경찰을 때려서 수감되었다고 한다. 잠시 후 플랙스먼과 레블스턴이 면회를 와 주었다. 레블스턴이 벌금도 대신 내주었다. 레블스턴의 생각에 따르면 자신이 주의를 기울리지 못해서 생긴 문제니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래블스턴의 집에서 숙식하게 된 고든은 가난뱅이-외톨이-는 돈을 쓰는 법-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조차도 모르는 법이라 생각하면서 점차 삶과 문학적인 성공에 대한 의지를 접어간다.
『엽란을 날려라』는 조지 오웰의 소설 중 가장 가혹한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평론은 대부분 아무런 특징이 없는 작품이라는 부정적인 평론이 다수였고 예외적인 호평들조차도 빈곤을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피상적인 이야기가 전부였다. 심지어 이튼 칼리지 동창생으로서 한평생 조지 오웰을 지지해준 시닐 코널리(Cyril Connolly)와 리처드 리스(Richard Rees)조차도 완성도가 떨어진다면서 소설의 단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적인 감정으로 소설을 옹호해줄 수 있는 수준이 도저히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와 별개로 리처드 리스는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켰을 경우 오웰의 멱살을 잡았으리라.) 이런 문제점은 저자 본인도 수긍했을 정도라 후일 "나는 왜 쓰는가"라는 유명한 에세이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있을수록 나는 어김없이 분홍빛 단락과 의미없는 문장과 화려한 수식에 속았고 그 결과로 생산된 작품들은 대체로 생명없는 태작(駄作)을 면치 못했다."고 이 소설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이 소설이 끝내 극복하지 못한 문제점은 불친절함과 극적이지 못한 결말이다. 오웰 본인이야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투영시켰으니 독자들도 아마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같지만 그건 오웰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오웰은 독자들에게 소설의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힘을 쏟는 대신 의미도 없는 배경 묘사에 힘을 빼버리는 '겉절이' 테크를 타고 말았고 그 결과 콤스톡의 기행들은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독자들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는 참극이 벌어지고 본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독자들은 부가적인 차원인 빈곤에 몰입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외로 이 작품은 오웰 사후 본격적으로 재고된 작품이기도 하다. 1965년에는 2부작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고(안타깝게도 원본은 소실되었다.) 1997년에는 로맨틱 코미디(???????)로 개작한 '결혼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또한 영문학 교수인 피터 박스올(Peter Boxall)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을 쓰면서 조지 오웰의 책으로는 1984와 더불어 『엽란을 날려라」를 선정하기도 했다. 동물농장과 카탈루냐 찬가를 제치고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도 여전히 평가는 갈리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싸움의 목적이 결여된 고든의 싸움이 패배했던 것은 필연적"이라는 혹평이 여전히 있는가하면 "겁쟁이도 기만자도 아닌 콤스톡을 통해 오웰은 도덕적 우아함을 창출했다."라는 새로운 호평도 등장하고 있다. 본인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결말은 어떤 것이냐고? 로즈메리는 고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고든은 돈과의 전쟁을 끝내게 된다. 왜? 이에 대한 답은 소설을 한번 더 읽어야 알 수 있는 미묘한 차원인데 문제는 이 소설이 다시 읽을 정도로 매력적이기는 커녕 빈곤 묘사로 사람들의 진을 빼놓는데 특화되어있다는 점에 있다.
필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다. 아이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돈에 대한 반역이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분신임과 동시에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 위선적 중산층들이 그럴법하게 살아가면서 원치않게 만들어낸 아이가 아닌 자신과 로즈메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것이 살아 숨쉬는 순간 고든은 문학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고든은 더 이상 안식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반역 또한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네? 고든 본인은 돈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고백한다고요? 몇 페이지 더 읽어보시죠.
그들에게는 나름의 기준, 포기할 수 없는 명예가 있었다. 그들은 품위를 지켰다-엽란을 계속 날렸다Keep the Aspidistra flying. 넘치는 활력으로 계속 살았다. 그리고 자식을 계속 낳았다.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과 성자들은 결코 하지 않을 일이었다.
엽란은 생명의 나무구나. 고든은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고든은 이제 사람들을 더 이상 경멸하지도 경멸받지도 않는다. 그들을 이해했고 이제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이로서 그의 싸움은 승리와 패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적대관계의 청산을 통한 화해로 이해되어야함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현실 세계와의 격렬한 투쟁은 30년간 침묵하던 콤스톡 가문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는 나레이션의 설명과 함께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의 최고 특색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984의 구조가 이미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는 점에 있다. 선역이었던 레블스턴이 1984에서 오브라이언으로 치환되는 것을 제외하면 1984의 소소한 묘사와 비슷한 구조, 등장인물들을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일까? 오웰에게 확실히 상상력이 빈곤했다는 비판이 있어왔다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 더 너그럽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불행한 사람의 모습은 비슷비슷하다고.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모순과 그에 대한 인간의 저항은 언제나 비슷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고든 콤스톡의 저항은 그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서 백년이 다 되어가는 지구 반대편의 우리들에게도 충분히 위로와 귀감이 되어준다고 나는 감히 자평할 수 있다.
한줄 요약 : 이 소설은 BL물이 아니야!!!!!!!!
문제의 로맨스 코메디 영화. 영어를 모르는 본인의 소감은 "영상으로는 텍스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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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해도 아무도 안읽듯 하네요.
오우야..
해설에 비엘타령은 벙찌더라 ㅋㅋㅋ 웃기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