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많이 읽진 못했지만 그나마 읽었던 거라도 다시 곱씹어 볼겸 1월 동안 읽었던 책들 결산해 보도록 하겠다. 이번년도부터 해외에 있는 나로서는 구하기 쉬운 영어 책에도 손을 대봤는데 새해 맞아서 작년보다 더 열심히 읽겠노라 결심했지만 내 저열한 영어 실력 덕에 생소한 영단어들이 제법 많았고 문장 독해에도 애를 먹었다. 거기에다 게임이랑 유튜브 시청에도 신경이 쏠려 진도를 많이 빼지는 못했다. 이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1.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노는 게 좋을뿐더러 사는 데도 풍족함이 넘쳐 희망을 가질 필요도 못느꼈기에 이를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에 ... 그들은 아침이 주는 즐거움을 받아들였다. (They accepted the pleasures of morning, ... as a time when play was good and life so full that hope was not necessary and therefore forgotten.)"
파리대왕 中
새해 첫 독서를 영국의 명작가 윌리엄 골딩 (William Golding) 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명작 파리대왕의 원서로시작했다. 사실 어렸을 때 민음사 번역본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 번역이 너무 구닥다리인데다가 가독성도 형편없어서 몇 페이지만 읽고 덮어버려서 책장에다 처박아두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했는데 지난 날 겪었던 발번역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영어 공부도 해볼 겸 호기롭게 원서를 구해서 도전해봤다. 다만 내 영어 실력이 워낙 처참한 덕에 읽는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내가 이렇게 모르는 단어가 많았나 싶을 정도로 어휘력의 부재를 실감했고 각 단어들 중에서는 분명 아는 단어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모여있는 문장을 어떻게읽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경우도 있어서 제 독해력 부족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자존심을 꺾고죽어라 깠던 민음사 번역본도 독해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한 번씩 참고하는 용도로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 책은 핵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중, 5세에서 12세 정도의 영국 아이들을 실은 비행기가 공격을 받는 바람에 무인도에 조난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금발 미남에 체격도 탄탄하여 믿음직한 인상을 주고 침착한 면도 있어서 리더로 추대된 소년 랄프, 성급하고 호전적인 성향이 있는 사냥꾼 잭, 매우 똑똑하지만 뚱뚱하고 생김새가 볼품없어'꿀돼지 (Piggy)' 라는 별명을 가진 참모를 비롯한 소년들이 무인도 생활을 이어나가는 게 이야기의 주 내용인데처음에는 구조신호용으로 봉화도 피우고 조별과제 마냥 리더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들긴 했지만 어지저찌 거처도 만들면서 그럭저럭 무인도 생활을 이어나가는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조받는 것을 중시하는 랄프와 지금당장 생존을 위해 사냥을 중시한 잭의 노선갈등이 커지고 검은 형상을 띈 미지의 짐승이 밤마다 소년들을 공포에떨게 하면서 난항을 겪게 된다.
위 줄거리에서 기시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겠지만, 무인도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는 영국 문학에서 흔히쓰이는 소잿거리였다. 대표적으로는 대니얼 디포가 집필한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와 작중에서도직접적으로 언급되는 R. M. 발렌타인의 '산호섬 (The Coral Island)' 가 있다. 언급한 작품들은 보통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면서 사회를 이뤄나가는 인간의 끈기를 찬미하고 더 나아가 서구문명의 위대함을 예찬했던 작품들이다. 근데 교사로 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해군 장교로 전쟁터에 끌려가서 생고생을 하고 이후에도냉전체제 하에서 전면전의 공포가 도사리던 시대를 살던 골딩의 관점은 확실히 달랐다. 작중에서 비행기 불시착후 흩어졌던 아이들을 한데 모이게 하는 도구이자 규칙을 상징하는 물건인 소라와 시력이 안좋은 꿀돼지의 눈이자불을 붙이는데 큰 역할은 하는 도구이며, 이성과 지식을 상징하는 물건인 안경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물건임을 작중 내내 암시하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문명의 산물이자 상식으로 여기는 사회법규와 이성적 사고방식이 유사 시에는 얼마나 취약한 존재라는 점을 역설한다.
파리대왕의 탁월함을 칭찬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게 바로 이성의 랄프와 야성의 잭이 서로 대립하면서 자아내는 긴박감 넘치는 서사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문장력과 간결하면서도 건조한 문체에도 많이 감탄했던 것 같다. 비록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가 많아 사전을 뒤져 보는 시간이 많았지만, 작중 배경과 상황을 묘사하면서 단순히평범한 설명만 늘어놓지 않고 직유법과 은유법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유려하게 문장을 뽑아냈다. 가령 예를 들면파도가 밀려들어오면서 하얀 기포가 일고 해변에 있었던 좌초물들을 쓸어가는 장면을 바다 속에 있는 투명한 미생물들이 셀수없이 많은 톱니 같은 모습을 드러내며 해변에 있는 찌거기를 먹어치우는 것처럼 빗댄 표현에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또한 이런 아름다운 비유와 문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빌드업도 굉장히 치밀한편이다. 초반만 해도 굳이 이렇게 까지 자세히 쓸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주변 환경을 묘사하는데 많은 활자를할애하는데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벌어지는 여러 참극과 그에 대비되게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하는 매혹적인 자연경관이 대구를 이루며 아이러니를 자아내고, 점점 더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는 후반부에는 문장 한 마디 한마디가 광기의 도가니를 여실히 담아내서 독자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여러모로 이 작품은 서사에서뿐만 아니라 내러티브에서도 탁월함을 보여주는 걸작이니만큼 영어에 자신있는 사람에겐 원서를 기꺼이 추천하며, 영어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라면 번역본이라도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2.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
"예술가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내는 자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 모든 예술은 죄다 쓸모없다. (The artist is the creator of beautiful things. To reveal art and conceal the artist is art's aim. ... All art is quite useless.)"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1년 판본에 실린 서문 中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의 극작가 및 소설가이자 그 어떤 것 보다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미주의 (唯美主義, Aestheticism) 의 대가인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의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서로 읽어봤다. 해당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던 때는 1890년이었는데 출간 당시에는 문란하다며 평론가들과 대중들로부터 온갖 십자포화를 당하자 와일드가 분량을 늘리고 수위를 좀 낮추는 수정을 단행해서 1891년에 다시출간한 바가 있다. 보통 이 판본이 널리 읽히는데 나의 경우에도 1891년 판본을 구매해서 읽어봤다.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도리언 그레이라는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청년이 배질 홀워드라는 화가의 눈에 띄어초상화의 모델로 발탁되어 초상화까지 선물 받게 된다. 하지만 도리언은 앞으로 자신은 늙겠지만 그림에 그려진자신은 항상 젊은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는데 절규하며 자기 대신 초상화가 늙게 해달라는 질투 섞인 소원을 빌게되는데 그게 실제로 이뤄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부도덕한 짓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가 흉측하게 변하는 것도 목격하게 되는데 처음엔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었다가 이후 자신에게주어진 젊음을 방탕스럽게 즐기면서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일그러져 가는 초상화를 유흥거리 삼아 감상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용 한 문장 한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고 정갈하게 쓰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등장인물들이하는 대사도 맛깔났고 대사 한 마디에도 화자의 성격이 잘 녹아들어 있어서 읽는 내내 생동감이 넘쳤다.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내 모국어인 한국어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어에서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러모로 나에겐 딱딱하기만 하고 숙제같이 어떻게든 읽어내기만 해야되는 대상으로 보았던 영어에 대한 인상을 180도 바꿔준 작품이었다. 사실 이 작품의 시대배경이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인만큼 지금 널리 쓰이고 있는 영어하고는 거리가 조금있기도 하고 사교계를 묘사하고 있기도 해서 부유층의 공용어 중 하나였던 프랑스어도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편이다. 읽는데 어느정도 난이도가 있긴 했었지만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던 매력 덕에 제법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진 가치는 단순히 문장이 아름답게 적혀있는데만 있진 않았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주요 소재는 티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항상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작 하는 짓은 방탕함에 찌들어 추하기 짝이 없다는 데서 오는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주제는 작품의 거시적인 서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아니라 작중 배경묘사나 등장인물들의 대사 같은 미시적인 요소에도 녹아들어 있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게화가 배질 홀워드의 대학 동창이자 청춘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드니 젊을 때 마음가는 대로 살라며 도리언에게젊음에 대한 집착과 쾌락주의를 부추기는 유미주의자 헨리 워튼 경의 대사다. 이 양반의 대사는 아름다우면서도시니컬하고 아이러니가 듬뿍 담겨있다. 가령 예를 들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 때는 언제나 좋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산다고 언제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네." 같은 대사를 줄줄 뽑아낸다. 꼭 헨리경의 대사가 아니더라도 배경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도 시니컬함과 아이러니 담긴 언어유희로 이야기를 쫄깃하게이어 나간다. 또 배경묘사도 굉장히 감각적으로 담아내는데 어떨 땐 황홀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지만 극이 절정에 왔을 때는 숨막히는 긴장감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작품이 19세기 말엽에 나온 작품이니만큼 등장인물들이 하는 대사는 지금 봐서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잖아 있어서 감안하고 들을 필요가 있겠지만 작품 자체의완성도는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높은 작품이라서 일독을 적극 추천한다.
3. 네 사람의 서명 (The Sign of Four)
“내가 자네한테 몇 번이나 말했나? 불가능한 것을 빼고 남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하지 않아도 진실이라고 말일세!”
네 사람의 서명 中
영어 원서책을 2연속으로 접하면서 피폐해진 두뇌를 달랠 겸 꺼내는 한국어로된 영문학 책을 꺼내들었는데 바로모르는 사람이 드문 추리소설 시리즈 셜록 홈즈 시리즈의 두번째 장편인 네 사람의 서명이었다. 작년에 봤던 주홍색 연구하고 바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셜록 홈즈랑 존 왓슨이 룸메이트로 만난지 거의 초면이었을 적에 기이한 살인사건을 하나 접한 뒤 시간이 지난 상황이라 소위 말하는 두 사람 간의 티키타카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법 유명한 작품이지만 간단히 줄거리 얘기를 하자면 사건이 안 들어와서 심심하다며 허구한 날 코카인을 빨던홈즈를 보고서는 왓슨이 참다참다 못해 이를 갈구다가 메리 모스턴이라는 젊은 아가씨가 의뢰 차 베이커가 하숙집에 찾아오며 얘기가 시작된다. 이 아가씨에게는 인도에 장교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있었는데 10년 전 오랜만에 영국으로 돌아왔던 아버지가 갑자기 용무가 있다며 외출을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며 행불자가 되버린 가슴아픈 과거사가 있었다. 실종 사건으로부터 4년 후 뜬금없이 본인을 찾는 신문 광고를 확인해서 주소를 같은 신문광고란에 실어서 알려주더니 그후 1년마다 영롱한 진주를 하나씩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최근에는 난데없이 어느극장에 정해진 시간까지 나와달라고 요청을 받는데 특이한 조건으로 약속장소에 혼자 나오는 게 불안하다면 장정2명을 더 데리고 와도 되지만 이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경관을 대동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전달 받는다. 이게 불안했던 모스턴 양은 지인의 추천을 받아 셜록 홈즈를 찾아와 약속장소까지 동반을 요청하는데 여기에 홈즈는 물론왓슨까지 흔쾌히 수락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전작이었던 주홍색 연구랑 간단히 비교하자면 사건의 진범을 찾아 수사에 나서는 1부랑 진범 검거 후 진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둘이 서로 동일하지만 이번 네 사람의 서명은 수사 파트의 비중이 훨씬 더 큰 편이다. 단순히 딱들어 맞는 추리 이론을 세우는 데만 그치지 않고 홈즈와 왓슨이 열심히 굴러다니면서 탐문 수사하는 것도 충실히 묘사하는 편이라서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이자 모험 소설로서의 재미는 주홍색 연구보다 나았던 것 같다. 또한 상술했듯이 어느 정도 친해진 두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케미를 보이면서 뽑아내는 만담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본격 수사물이 된만큼 홈즈의 탐정으로서의 신념과 관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자신의 철학을 피력하는 대사도 여럿 있는데 지금도 제법 곱씹을 만한 대사들이었다. 이 덕에 제가 홈즈에 대해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괴짜 천재 탐정 정도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이걸 읽으면서 누구보다 부던히 뛰면서 단서 수집과 관찰에 매진하고 아주 냉정하게 사고하면서 추리하는 부지런한 수사관으로 수정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아서 코난 도일이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사람인만큼 영국 백인 엘리트로서 다소 제국주의에 우호적인 면도 있고 이 작품에도 영향이 남아있다는 점은 유념해 두실 필요가 있다. 백인 이외의 유색인종이 열등하다는 싸구려 우생학을 운운하는 수준은 아니고 오히려 이를 까는 대사도 보이지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영국의 제국주의에 우호적인 묘사도 있고 편견에 기반한 인종 묘사도 엿보이기도 한다. 이 점만 뺀다면 픽션으로서의 재미랑서사가 주는 교훈, 극이 경직되지 않도록 넣어 주는 잔잔한 코미디가 어우러지는 수작이다. 고전 문학은 딱딱하다는 편견을 보기좋게 깨주는 작품이니만큼 고전 문학 입문을 생각하고 있다면 입문작으로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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