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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었지만, 딱히 의표세를 읽고 싶진 않고, 독갤에서 종종 언급되는 우엘백(쓰리백 포백 아님 엌ㅋㅋ)이 쓴 쇼펜하우어 관련 책이 있다 해서 시원하게 구매했다. 알고보니 우엘백이 직접 의표세와 행복론을 번역하고 해설을 다는 책이였다.
이걸 알았으면 안샀을텐데..
1장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서문을 지나 1장의 첫 문장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한다.
보는 순간 내가 이 책을 왜 샀지 이 생각이.. 철학? 몰?루? 이러다.. 마참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닥뜨린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수수께끼를 내고 나는 답변을 해야만 오늘 잠을 잘 수 있다. 독서를 이렇게 하니 완전한 유희다. (답변은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아. 독갤 쇼펜하우어 사랑꾼들이 지적해줄테니깐)
읽다보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주관적 내적 작용을 통하여 외부의 대상을 파악하며, 주관 밖에 객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가 없다. 결국 대상은 내가 인식하고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표상한 것과 대상은 동일한 것이다.
철학이 진짜 개거튼게 용어가 어렵다. 사전지식이 있으면 수월할텐데, 나는 단어를 몰라서 외워야하는 수준인갑네. 듀오 3.0 들고 영단어 외우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난 영어 공부할 때를 떠올려 보기로 했는데, 예를 들어 영어에 on이라는 게 있으면 on이 다른 단어에 붙어 사용될 때 모든 용법을 다 외울 수 없으니 이미지를 입혀서 생각해보면 한결 수월하잖아? 마찬가지로 철학용어도 일종의 이미지로 퉁칠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물론, 전공자 수준에서 세밀하게 이해하려면 부족하겠지만 취미독서 수준에선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라고 정당화 해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에서 표상이 의미하는 것은 거칠지만 대략적인 이미지화를 해보자면 떠올리다 정도로 대응되지 않을까?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 세계는 내가 떠올리는 것이다 = 세계는 오성을 통한 주관적 인식작용이 있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1장 말미에 나는 큰 미궁에 빠졌는데, 대략적으로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 뜻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은 임의의 언어로 나만의 문장을 써갈겨 정리한 내용과 철학자가 정립하여 써내려간 용어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 서로 상이해 오히려 더 헷갈리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시간낭비 오지게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는 미궁에 갇힌다.. 도와줄 여친 없는 테세우스다 라는 생각으로 2장으로 넘어간다.
2장 사물을 세심히 들여다보라
현존하는 대상을 평온하게 관조하여 본인의 의지를 버리고 의식 전체를 가득 채울 때 그 대상에 전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체의 의지는 없어지고 순수한 주관만이 남으며, 그 대상 역시 지각에서 자유롭고 나의 순수한 주관에 의해 밝혀진다.
우엘백은 친절하게도 정리를 해주는데 ‘모든 욕망과 세상에 존재하는 객관의 총체로부터, 모든 고찰로부터 벗어나 평온하게 관조하는 것’을 쇼펜하우어의 미학으로 정의한다.. 나이스 굿.
3장 그렇게 삶의 의지가 객관화된다
정말 짜증나는게, 한글을 아예 모르면 상관이 없는데 해석이 안되는게 화난다.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의지는 세계의 모든 사물에 존재하고, 모든 현상의 유일한 핵심인데, 이 의지의 본질은 영원한 생성이고 끝없는 흐름이기 때문에 절대 실현되거나 충족될 수 없다. (성취된 목표는 또 다른 성취에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네버엔딩임)
의지는 욕망으로 치환하면 적절한 거 아닌가? 삶의 욕망은 객관화된다. 객관화? 객관은 주관의 작용에 따라 언제든지 나의 주관으로 뒤덮일 가능성이 있는 나 외의 외부 대상이다. 이거 완전 니체다.
그렇다면, 삶의 욕망은 도처에 있다. = 세계는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4장 세계라는 연극
사람의 의식을 채우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다. 이 때 무엇인가 갈망하려는 의지와 평온한 관조에서 오는 영혼의 평화가 대조되어 뒤섞이고 기쁨과 슬픔이 반복된다. 세계는 마치 연극과도 같은게 각종 의지들의 충돌해 갈등을 빚는게 연극과 비슷한 플롯이기 때문이 아닐까?
5장 삶의 태도 :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행복론에 관한 부분)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창조하므로, 행복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의식을 통해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는 것은 순수하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개성과 주관, 능력을 지녔는지에 달려있다.
쇼펜하우어 : 행복을 일상에서 찾는 명랑함을 갖추고 있다면 인생이란 즐겁지 않을까요? 제 얘기가 이해가 가시나요?
우엘백 : 과연 그럴까?
나 : ??, (단 다섯 글자만 남긴 우엘백의 코멘트가 심상찮다.. 비수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싸늘하다..)
6장 삶의 태도 :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천명한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이미 부를 석권한 사람은 자유가 있었다. 부를 거머쥐면 결핍된 것이 없고, 노동에서 해방되기에 무엇이든 자유롭다. 하지만 좀 더 나아가 부는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세계를 바꾸려는 의미있는 노력을 하는 자에게 그 가치가 더 빛을 발한다고 본다.
그리고 우엘백은 특이하게도 이 장에선 아무런 코멘트 없이 글을 신속하게 종료한다. 야동보는데 엄마 들어온거마냥..
이거야말로 진짜 숙제인거 같은게 우엘백은 왜 갑자기 글을 마무리 지었을까?
솔직히 스스로 못풀어서 마지막에 달린 평론가의 해설의 도움받음 엌ㅋㅋ 반칙은 아니지. 우엘백은 쇼펜하우어의 의표세스런 세계의 원리와 결론에 크게 동감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써내려갔지만, 쇼펜하우어를 대스타 반열에 올린 행복론을 쓴 게 마뜩잖았던 걸로 보인다.
“아니 씨발 쇼붕이형!!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는 욕망이 발산되고 그 욕망을 충족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거나 권태가 생겨 그야말로 이지선다의 고통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목씻고 죽을 준비나 하라며?? 갑자기 왠 행복타령이야?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생 행복하지도 않은 놈의거 그냥 쓰면 돼지, 굳이 의미있는 일에 쓰는 게 맞아?”
생각해보면 우엘백이 분노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이치다. 내가 믿고 따르던 우상이 변절하는 것은 차마 눈뜨고 지켜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근데, 그럼 왜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최정점인 핵심 결론은 다루지 않고 인식과 미적 관조, 그리고 행복에 관해 떠드는 얘기만 담았을까? 오싹한 얘기지만,, 우엘백의 의도는 뭔가 명확한 것 같다. 우엘백의 일갈은 이런게 아니였을까??
“쇼펜하우어 니 인식론에 따르면 세계는 니 생각에 따라 창조되는 거잖아.. 근데 너는 행복을 관조하고 행복에 의미를 부여했지..? 너 사실은 행복따위나 노닥거리고, 돈을 의미있는데 쓰자고 그러고, 세상은 의미없는 거였다며? 너 사실은 인기 좀 얻는걸 좋아하는 쉬어빠진 속물 아니냐고..”
이상 이 글은 쇼펜하우어(행복론 제외)와 우엘백의 다른 글들을 모두 읽어보지 않은 뇌피셜이였습니다.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답변을 내렸으니 자러 가보겠습니다.
ㅋㅋㅋ 쇼펜하우어 철학을 알면 행복론 쓴게 아이러니하긴 함 자기도 직접 행복론 서문에서 자기 철학에서 벗어난다고 인정했지 근데 나는 이런 아이러니함이 오히려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짐
욕망의 단절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론 행복을 추구하려했다는걸 보면 쇼펜하우어가 측은해지네.. 사실은 행복해지고 싶었던걸까
진솔한 리뷰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