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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쓴거 다 때려박은 전집인지라 분량이 엄청나서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는데,
첫 작품부터 좋았지만 커리어 중~후반부 가면서 폼 ㅎㄷㄷ하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 중에 인상깊었던 것들 (근데 과반수 이상인듯) 짤막한 후기 남김.
특히 좋았던 띵작들은 빨간 글씨로 표시함.
1. 제라늄
첫 작품부터 재밌음. 데뷔작이라는 편견 하에서 봐서 그런지 몰라도 뒤에 쓰게 될 작품들보다 상징적으로든 구조적으로든 전통적이라는 느낌이 강한 작품. '제라늄'이라는 상징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나가면서 시대에 뒤처져가는 노인의 초상을 그리는데, 냉소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묘사가 일품이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에 묘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솜씨가 벌써 완숙함을 느끼게 함. 인종적인 테마를 겁먹지 않고 담대하게 다루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고 너머의 복잡한 인간을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최근 소설들에서 볼 수 없는 미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임.
2. 이발사
디씨 인사이드 키보드 배틀을 실사판으로 보는 것 같은 꿀잼 작품. 가벼운 소품 같은 스토리를 가지면서도 선민의식을 지닌 지식인과 반지성주의자들을 동시에 날카롭게 후벼파 내는데, 개꿀잼으로 읽으면서도 그 예리한 시선에 사람들 참 시대가 지나도 변하는 게 없구나 하는 감상을 느끼게 함.
3. 감자 깎는 칼
오코너의 초반부 걸작이라고 생각함. 일단 아주아주 재미있는 소설인데, 단편 치고 많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면서도 하나하나 확실한 개성들을 부여하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해프닝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문득 머리가 띵한 결말에 닿게 하는 작품임. 오코너의 많은 소설에서 재기넘치는 것을 넘어 신랄해 보이는 문장들이 다소 냉소적인 스타일을 형성해내는데, 이런 스타일이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순진한 (종교적인) 인물들과 충돌하면서 만들어지는 이상한 화학작용이 작가의 고유한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함. 이 소설이 그러한 면을 아주 잘 보여주는데, 아주 작은 소품에서 시작해서 구원 앞에 선 인간이라는 주제까지 대담하게 나아가는 작품임. 근데 이 작품과 연작처럼 보여지는 '공원의 중심' 은 뭔가 미묘했음. 굳이 후속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싶음. 이 자체로 완결성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
4. 행운
임신을 재난처럼 다루는 것은 이제 일종의 유행인가 싶을 정도지만, 그런 시선을 이 소설만큼 예리하게 다루는 작품도 흔치 않다고 생각함. 계단을 한층한층 올라가면서 의심이 확신이 되고 불안이 공포가 되는 것을 완벽한 솜씨로 묘사해내는데, 내 몸이 덜덜 떨릴 정도.
5. 이녹과 고릴라
초기작이 생각나게 하는 깔끔하면서도 명확한 작품. 간명한 상징과 묘사로 외로움과 공허함을 다룸.
6. 좋은 사람은 드물다
읽은 부분까지 최고작 중 하나. 간단한 세팅과 캐릭터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세계 하나를 만들어 냄. 코맥 맥카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연상케 하는데, 거기서 보이는 작가의 강한 자의식마저 덜어내고 더욱더 황량하고 간단하게 지옥을 그려내는 듯한 작품. 무심한 듯 끝나버리는 단편이라는 형식 또한 이 스타일과 너무나도 잘 부합한다고 생각.
7. 불 속의 원
이 작품을 읽을 시점에 오코너의 작품 세계에 익숙해져 있다면 어찌보면 뻔할 귀결을 보여주는 소설이지만, 오코너의 예리하고 신랄하게 캐릭터를 빚어내는 솜씨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함. 프리처드 부인과 코프 부인이라는 상반된 두 흥미로운 캐릭터로부터 세계관과 이야기가 탄탄하게 빌드업되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
8. 추방자
비교적 긴 분량의 중편에 가까운 작품인데, 흡인력 있으면서도 날카롭게 편견과 혐오의 매커니즘을 지적해 내는 소설임. 지금 보기에도 아주 시의적절해 보일 만큼 예리한 부분이 있는 소설.
9. 인조 검둥이
할아버지와 손자가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하면서 벌어지는 서울쥐 시골쥐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인간의 불완전성과 신의 자비의 존재를 기이한 방식으로 이끌어내는 걸작임. 인종차별적인 코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흑인'이라는 존재를 인종주의의 대상에서 알 수 없는 카오스의 영역로 끌어오고, 이윽고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신성의 주체로까지 끌어올리는데, 신의 존재를 가장 폭력적이고 저급한 부분에서 기어이 찾아내는 오코너의 공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소설임.
10. 좋은 시골 사람들
아주 정의내리기 힘든 이야기이면서도 그 불가해한 에너지에 혀를 내두르게 하는 작품임. 소설은 세상 모든 것을 좋게좋게 해석하려는 종교적인 어머니와 모든 것에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철학적인 딸으로부터 대비적으로 시작함. 그들이 소위 '좋은 시골 사람들'로 정의되는 인물들과 부딪히면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좋은 시골 남자'를 만나면서 딸이 겪게 되는 감정적이고 종교적인 변화를 숨막히게 묘사하더니만 어느 순간 독자의 뒤통수를 풀스윙으로 때려갈기면서 그때까지 소설이 보여주는 듯 하던 구원의 전제 자체를 자기 스스로 뒤흔들어버림. 결국 캐릭터든 구원이든 모두 모호한 영역에 던져진 채로 소설이 끝나버리는데, "어떤 사람은 순진하게 사는 게 불가능해요. 나는 일단 불가능해요." 라는 마지막 문장이 오코너의 불안정하면서도 복합적인 작품 세계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 함.
이제 절반 조금 넘게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심지어 더 재밌어져서 남은 분량이 더욱 기대되는 부분임. 완독하고 다시 돌아오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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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ㄱㅅ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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