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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워서 퍼와봄.
『비잔티움의 역사』를 번역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고민 가운데 하나는 Huns·Goths 등을 어떻게 한국어로 옮길까 하는 문제였다. 종래의 방식을 따라서, Huns>훈족·Goths>고트족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면 편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표현은 지나치게 ‘인종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정재훈 교수님이셨다. 정재훈 교수님께서는 『史記 外國傳 譯註』 「흉노열전(匈奴列傳)」의 첫번째 각주에 이렇게 적으셨다. “[상략] 하지만 이들[=흉노]은 4세기 유럽 게르만의 대이동을 유발한 훈(Hun)의 등장과 함께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匈奴와 훈의 유사성이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종족적인 기원과 함께 匈奴와 훈의 관련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연구사적인 측면에서 중시되었다. [중략] 또한 匈奴나 훈에 ‘族’을 결합시켜 ‘匈奴族’·‘훈족’ 등과 같이 사료에도 없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종족적 내지는 인종적 접근을 하려고 했던 기존의 설명 방식 역시 문제가 있다. 그보다는 원래의 기록에 충실하게 匈奴라는 말이 사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기초로 그것을 인종적 측면보다 하나의 정치집단을 부르는 통칭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 복합적인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올바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재훈 2009: 28-30 각주1. 강조는 인용자)
고트 등 서양사에서 등장하는 집단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한국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피터 히더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19세기에 인류학자들은 [중략] 민족 정체성(ethnic identity)의 분류가 직관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방식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어떤 종족 집단이든 그들만의 독특한 인종적(racial)·언어적·문화적 윤곽을 식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20세기 중반 현장 연구는 민족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다지 규정하기 쉽지 않은 존재였지만, 이는 여전히 객관적인 분류로 생각되었다. [중략] 정체성이 이렇게 이해될 때, 고트 집단(Goths)와 같은 과거의 집단들(groups) 역시 자연히 매우 분명하고 논리적인 종류의 존재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정체성 이해는 크게 두 가지 별개의 연구 경향으로 변화했다. [중략] 고트 집단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경향에서 크게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불변하는 정체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둘째, [중략] 일부 현대적(modern) 맥락에서 보이는 강력한 민족 정체성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의 경향은 초기 중세의 사회·정치적 복합체들(socio-political entities)은 극도로 ‘쉽게 소멸하는 상황에 따른 구조물(evanescent situational constructs)’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이는 고트와 같은 복합체들(entities)을 변하지 않고 어떤 문제도 없는 역사적 현상(unchanging, unproblematic historical phenomena)으로 본 과거의 서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현대 서구 민족주의가 대표하는, 이전에 없던 특정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현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이고, 나 역시 이 책을 그렇게 서술했다.”(Heather 1996: 3-7. 강조는 인용자)
한편, 나는 책에서 등장하는 tribe 등의 표현도 부족(部族)보다는 부(部) 내지 부락(部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은 김호동 교수님이었다. 김호동 교수님께서는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스니스(David Sneath)의 주장을 소개하셨다. “이제까지 학자들은 국가 형성 이전 단계의 사회조직의 발전과정을 이해할 때 부족tribe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해 왔다. 즉 국가 성립 이전 단계에서는 친족 조직인 씨족·부족들이 하나의 사회 단위로서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고, 이들 집단의 ‘분절적 대항’segmentary opposition에 의해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 사이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안정이 유지되었다고 보았다. [중략] 그러나 최근 이러한 전통적 이론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씨족·부족이라는 것은 국가에 선행하는 단계에 존재했던 사회조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국가에 의해서 규정되고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씨족·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집단은 사실상 어느 특정한 가족family 혹은 종족lineage이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단위였지, 결코 친족 조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어느 씨족의 지배 가문은 그 씨족 내의 다른 사람들과 혈연적으로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지배 가문에 속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성姓조차 갖지 못했다. 따라서 씨족·부족은 동일한 조상에서 나온 친족으로서 구성원 상호 간에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평등이 존중되는 조직이 아니라, 귀족제aristocracy의 원리가 관철되는 조직이었고 중앙집권적 국가의 부재 상황에서도 국가와 유사한 정치적 관계에 의해서 작동되는 조직이었다. 스니스David Sneath는 이러한 상황을 “머리 없는 국가”the headless state라고 부르고, 역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씨족이니 부족이니 하는 용어를 ‘폐기’하고 대신 레비 스트로스의 용어에서 힌트를 얻은 ‘가문’家門(house)라는 개념의 도입을 주장했다. ‘가문’은 가족 이외에 다른 객식구들도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김호동 2010: 84-85. 강조는 인용자)
그렇다면 게르만계 집단들은 어땠을까? 한스베르너 괴츠(Hans-Werner Goetz)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로마] 제국과 민족 대이동(Völkerwanderung)의 사람들(peoples) 및 정치체들(realms)의 관계 그리고 소위 게르만계 왕국들이 [로마] 제국을 정치적으로 대체한 일은 ‘로마 세계의 변화’ 논의에 중심이 된다. 족류 정체성 형성(ethnogenesis, 혹은 사람들이 정치적 단위로 발전한 그 과정)과 게르만계 족류의 발전과 연계되어 사용되는 ‘트라이브(tribe, stamm)’, ‘피플(people)’내지 ‘네이션(nation)’ 등 용어는 이제 불과 몇 십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라인하르트 벤스쿠스(Reinhard Wenskus)가 1961년 『부족의 형성과 체제(Stammesbildung und Verfassung)』라는 탁월한 성과를 발표한 이후, 게르만계 집단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변화했다. 이들은 동질적인 족류 단위(homogeneous ethnic units)가 아니라, ‘전통의 씨앗(Traditionskern)’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정치적 지도자와 공통의 기원 및 전통이라는 인식을 통해 유지되었다. 즉, 이들의 이름은 별개의 기원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의 ‘집합적 용어(collective terms)’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Goetz 2002: 39)
부족을 부(部) 내지 부락(部落)으로 바꾸게 된 이유는 중국의 정사(中國正史)였다. 중국 정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외부의 집단들에 대한 기록을 쓸 경우 그 집단의 단위를 크기와 성격에 부합시켜 유(類), 종(種), 부(部), 씨(氏), 성(姓), 읍(邑), 낙(落), 호(戶), 장(帳), 가(家)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 부(部)의 경우 배송지가 인용한 『위서(魏書)』의 오환 관련 기록에서 어떤 단위였는지 알 수 있다. “용감하고 건실하며 능히 다툼과 소송을 조정하고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을 늘 추대하여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읍락(邑落)에 각각 소수(小帥)가 있었으며 대대로 세습하지는 않았다. 수백에서 수천 락(落)이 하나의 부(部)를 이루었다. 대인이 불러 들여 말하는 것은 나무에 새겨 증표로 삼았고, 읍락에 전하여 행하게 하였으니, 문자는 없었지만 부중(部衆)이 감히 법령을 어기거나 죄를 범하지 못하였다. 씨(氏)와 성(姓)은 일정하지 않았으며 굳세고 용감한 대인의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대인 이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각자 목축하며 생업을 영위하였으며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며 부려먹지 않았다.” (최진열 등 역주 2009: 33 [원문], 35-36 [번역])
부락(部落)은 부(部)에 속한 집단을 이르는 단위였던 것 같다. 앞서 인용한 『위서(魏書)』의 구절 다음에는 이런 서술이 있다. “그 약속한 법에서는, 대인의 말을 어기면 죽였고, 도둑질을 그치지 않아도 죽였다. 만약 서로 잔혹하게 죽이는 것이 그치지 않으면, 령을 내려 부락에서 알아서 서로 갚게 하였으나, 서로의 보복이 그치지 않으면, 대인에게 나아가 진정시켜 달라 하여, 죄가 있는 자가 그 소와 양을 내어 줌으로써 죽음을 속죄하게 하여, 이로써 그치게 했다.(其約法, 違大人言死, 盜不止死. 其相殘殺, 令部落自相報, 相報不止, 詣大人平之, 有罪者出其牛羊以贖死命, 乃止)”(陳壽 1971: 833) 『수서(隋書)』 「북적전(北狄傳)」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돌궐] 부락의 아래에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로] 묶인 백성들이 있는데, 천 가지 종(種)와 만 가지 류(類)라, 원수와 같이 화목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가슴을 치며, 슬픔을 머금고 원한을 쌓는다.(部落之下, 盡異純民, 千種萬類, 仇敵怨偶, 泣血拊心, 銜悲積恨)” (魏徴・長孫無忌 等 1973: 1867) 즉, 중국 사서에서 부(部)라는 단위는 대인(大人), 즉 지배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족과 비친족을 아우르는 집단을 가리켰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때, Huns 따위를 ++족(族)과 같은 종래의 방식으로 옮기기 보다는 문맥에 따라 훈 집단/훈 제국/훈계 집단들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tribe의 번역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전후의 서술에 따라 ++부(部) 내지 ++ 부락(部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출판사에서는 종래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기도 하고, (그래서) 어색하게 받아들여져서 걱정이 많았다. 독자들도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생각해, 미리 해명의 글을 적어보았다.
참고문헌
陳壽. 1971. 『三國志』, 北京: 中華書局.
魏徴・長孫無忌 等. 1973. 『隋書』, 北京: 中華書局.
정재훈 역주. 2009. 「흉노열전(匈奴列傳)」, 『史記 外國傳 譯註』,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3-182.
최진열·이재성·이근우·김호동 역주. 하원수 교열. 2009.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김유철·하원수 편, 『三國志ᆞ晉書 外國傳 譯註』,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18-142.
김호동. 2010.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서울: 돌베개.
Heather, Peter. 1996. The Goths, Oxford: Blackwell.
Goetz, Hans-Werner. 2003. “Gens: Termimology and Perception of the Germanic Peoples from Late Antiquity to the Early Middle Ages”, in R. Corradini, M. Diesenberger, and H. Reimitz, eds., The Construction of Communities in the Early Middle Ages, Leiden: Brill: 39–64.
[출처] 『비잔티움의 역사』 ++족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작성자 Gokyu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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