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의 정치형태> 中
신분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8세기 프랑스의 부르주아지인 제3계급은 자신을 「국민(Nation)」이라고 선언하였다. 「제3계급, 그것은 국민이다.(le tiers Etat C'est la Nation)」라는 유명한 말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계급이라는 관념은 사회질서 중에서 복수의 계급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하나의 계급이 자기를 국민과 동일시한 경우에 이것은 계급이라는 관념 자체의 지양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이미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하며, 오늘날 도처에서 반복되는 보편적인 이원주의에 운명을 맡기게 된다. 즉 시민사회는 자기의 양극성을 노출하고 한편에서는 부르주아지에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것도 대표할 수 없으며, 고작해야 자기 자신을 대표할 뿐인 보헤미안으로 분열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관념은 이것에 대한 시종일관된 응답이며, 그것은 사회를 생산과정의 위치에 따라서 즉물적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경제적 사고에 일치된 관념이다. 이것의 의미는 모든 대표의 부정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관념의 정신양식에 속한다는 것이다.
학자와 상인은 어용조달인이나 지도적인 노동자가 되어 버렸다. 상인은 자신의 사무소에, 학자는 자신의 연구실이나 실험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으로 현대적인 한, 양자는 모두 하나의 영업을 영위하는 것이다. 양자는 모두 무명이다. 그들에게 누구를 대표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들은 단순한 사인(私人)이거나 대리인일 것이며 결코 대표자는 아니다.
경제적 사고는 기술적 정확성이라는 유일한 형식만을 알 뿐이며, 이것은 대표의 관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관념이다. 경제는 기술과 결합하며, 물질의 현실재를 요구한다. 경제적 사고에 대응하는 것은「반사」,「방사」, 또는「반영」과 같은 관념이며, 이러한 표현들의 각각은 물질적 관계와 동일물질이 취하는 형상의 변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유에 의해서 관념적인 것은 경제적 사고양식에 고유한 물질세계에로 편입된다. 예컨대 주지하는「경제」사관에 의하면, 정치적 입장이나 종교적 입장은 생산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인「반영」이며, 이 이론을 그 자신의 척도에 따라서 바로 경제사관에 적용시키게 된다. 그 의미는 사회적인 위계제 중에서 경제적 생산자가「지식인」보다 상위에 선다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심리학상의 설명에서 자주「투사」라는 말을 듣는다. 투사, 반영, 반사, 방사, 전달과 같은 비유는 거기에「내재하는 고유한」즉물적 기초를 구한다.
이에 반하여 대표의 이념은 인격적 권위의 관념에 강하게 지배되기 때문에 대표하는 것도 대표되는 것도 일정한 인격적 존엄을 주장하여야 한다. 대표의 관념은 결코 물질적 관념이 아니며, 우수한 의미에서 대표 가능한 것은 인격만을 의미할 뿐이다. 더구나 단순한「대리」와는 다르며, 이 대표자는 권위있는 인격이거나, 대표됨으로써 곧 자신도 인격화되는 이념의 어느 것이다. 신이라든가 민주주의 사상에 있어서의 인민이나, 자유와 평등과 같은 추상적인 이념은 대표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생산과 소비의 내용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대표는 대표자의 인격에 독특한 위엄을 부여한다. 높은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 가치 없는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표자와 대표되는 것뿐만 아니라 대표가 그것에로 향해진 제3자, 대표의 수범자 자신도 가치를 표방한다. 위대한 대표로부터는 저절로 조형이나 형상이나 가시적 상징이 생긴다.
이에 대하여 현대 기업의 대표 없는 비형상성은 자기의 상징을 다른 시대로부터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기계는 전통을 가져오지 못하며, 구상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마저도 자기를 상징하는 문장으로서 낫과 망치 이외의 것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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