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부터 독서 시작한 독린이임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디진다더니 슬슬 부작용이 오기 시작했음

평생을 책이랑 담쌓고 살아서 그런지 책을 접하고 나니까 멋진 신세계가 열린 느낌?

세상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전부 지식의 마라톤을 뛰고 있었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허송세월한 그만큼 내공의 격차가 체감되기 시작함


일단 자존감이 떨어졌음

저 사람은 내가 노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아왔을까
이 감정은 독갤에서 추천하는 책들을 하나씩 찾아보면서 점점 심화되고

감상평을 비교하면서부터 절정으로 치달음


상호텍스트적 맥락과 인문학적 소양으로 무장한 독갤러들의 감상평을 보고나면

분명 같은 책을 읽었는데 내가 한 독서는 단순히 활자를 읽는 노동이었고

저 새끼가 읽은 책은 가히 예술임, 마치 다른 판본을 읽은듯


그러다보니 '역시 독서량이 부족한 내 감상이 병신이었구나, 재독해야겠노' << 결론이 이렇게 되어버림

'누'한 영화, '독'한 책을 보고나면 스스로의 감상보다 이동진 평점이랑 독갤 여론에 기대서 평가하게 됨


스스로의 가치 판단과 평가를 유보하고 책 한권이라도 더 읽은

지식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한 마리의 앵무새가 되어버림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대문호들의 주옥같은 명언들이나 평론가의 한줄평을 그대로 읊는 것 뿐


아무래도 더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의 작품 분석이 더 정확할 확률이 높고

감상은 작품의 해석을 통해서 나오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듯


문학은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치고 비문학은 더 문제임


세상 모든 현상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점으로 학문의 분야로 정리되고 무수한 논문과 담론들이 오갔을텐데

교양서 몇 권 읽은 알량한 지식으로 과연 내가 세상에 대해 발언할 깜냥이 되는가 자문하게 됨


그러다보니 전문가가 아니면서 함부로 어떤 현상을 판단하거나 결론짓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 시작함

존나 똑똑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존나 멍청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져버렸음


예민한 부분이긴 한데 가령 여성운동의 계보를 모르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결론을 낸다던지

현상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냥 '나쁜게 나쁘고 좋은게 좋다'는 전형적 사고만 하는 인형같이 느껴짐


사태가 이렇다 보니 질문 그 자체에서도 말문이 막혀버림

무수한 철학사를 익히고 철학적 문제들을 사유해온 철스퍼거 형님들의 촌철살인 한마디에 반박당할

하나 마나 한 개소리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이내 말하는 것을 포기해버리는 벙어리가 되어버렸음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자각하라고 했지만 치매에 실어증이 오듯 점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말도 못하게 되는게 아닐까

단테처럼 누가 뭐라해도 의연하고 떳떳하게 내 갈 길을 가야할까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비로소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