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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설국 영어랑 한국어로 읽고 두개가 다른게 확실하게 느껴져서 감상문 한번 써봤어

내용의 전개는 당연히 둘다 같고, 표현 방식도 내용이 확연히 다른게 없어서 그런지 조금씩만 다르더라. 그래서 개인적으로 느낀 사소한 차이들에 대해서 써봄.




한국어


<설국>은 특유의 불필요한 언어를 잘라내어 적어낸 극히 생략적인 표현 방법이 유명하지만 그만큼 번역하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은 원문과의 유사성이 비교적으로 돋보였던 것 같다.

한국어의 존댓말과 공손한 표현들이 소설 안에서 나왔을 때 조금 더 형식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오히려 텍스트에 우아함과 세련됨을 주었고,

특히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탐구하는데 필요한 오묘한 문맥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원문과 비슷하게 소설의 철저히 주인공 중심으로 풀어져나갔고, 설국 특유의 툭툭 던지는 듯한 문체가 살려졌다.


일본과 비슷한 어법을 가져서 그런지 문장의 전개 방식도 비슷했다.

일본어를 그대로 한자로 변환하고 한국어로 적어내도 말이 되는 부분들이 꽤나 많아서 애둘러 표현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원문을 막연히 지키려는 느낌도 별로 들지 않았다. 원문에서 조금 과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일부 문장에서는 옮긴이의 재량으로 많이 강도를 줄이거나 과장한 표현들도 꽤나 보였고

특히 풍경 묘사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마음에 들었다.



영어

영어 번역에서 가장 크게 느낀것은 주인공이 책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영어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느낀 익숙한 감각인데
주인공이 소설을 리드하는 것이 아닌, 주인공 주변에서 모든 것이 자동으로 전개되는 느낌이였다.
한국어 번역과 원문은 조금 더 현실에 가깝고, 마치 시마무라의 기억을 문장화하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날것의 기록같은 느낌이 든다면,
영어 번역에서는 조금 달랐다.

일본어 원문의 시점은 줄곧 한 인물, 시마무라와 주변 인물에 고정되어 주변을 그려내었지만, 이와 달리 영어 번역에서는
지금 상황의 주관적 판단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는 것, 마치 내가 시마무라가 아닌 시마무라를 쳐다보는 동행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내레이터의 존재가 더 뚜렷해졌고, 결국 등장 인물에 대한 몰입도가 조금 떨어지게 되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러운 문장의 형태와 문법이 다름으로 인하여 시제가 조금씩 바뀌는 것도 느껴졌고, 시점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로써 영어 번역은 특히 <설국> 이라는 작품에 더욱 태생적인 한계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영어 번역본은 정말 정말 마음에 들었다.
주변의 아름다움들을 포장하여 선물하는 설국의 방향성은 영어 번역을 포함한 모든 번역본들에서 모두 잘 캐치해낸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던 특유의 문체는 볼 수 없었다. 영어 문학 특유의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정제되어 기록되는 듯한,
마치 모든 세세한 디테일들이 톱니바퀴처럼 짜맞추어 굴러가서 단 하나의 걸작을 만드는 방향성이 다분한 영문학 문체의 축적
설국의 번역을 방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건, 설국 영문 번역가 사이덴스티커는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정말 미친듯이 잘 옮겨내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특유의 문체가 없으니까 소설의 섬세함과 전개가 더더욱 강조되었고, 오히려 한국어 번역본보다 더 완성된 느낌조차 있었다.


유명한 첫문장 비교

<한국어 버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아랫쪽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일어서 다가오더니,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여자는 한껏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는 듯이,


"역장니임, 역장니임ー"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남자는 목도리를 콧등까지 두르고, 귀에 모자의 모피를 드리우고 있었다.

벌써 그런 추윈가 해서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 관사인지 바라 크들이 산 밑에 을씨년스레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은 거기까지 가기 전 에 어둠에 묻혀 버렸다.




<영어 버전>


기차는 긴 터널에서 벗어나 설국으로 나왔다.

대지는 밤 하늘 아래에서 하얗게 누워 있었다. 기차는 신호소에 멈추어 섰다.

차량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아가씨가 다가와서 시마무라의 앞 차창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흘러 들었다.

아가씨는 차창에 잔뜩 기대고 멀리 있는 역장을 불렀다.

역장은 랜턴을 손에 든 채 눈 위를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코 위까지 두른 목도리에 파묻혀 있었고, 모자에 달린 털가죽은 그의 귀를 내리덮고 있었다.

추워졌군,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철도 관사로 보이는 낮은 바라크 같은 건물들이 얼어붙은 산기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눈의 흰 빛은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최애 문장중 하나 비교

<한국어 버전>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 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 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영어 버전>

거울 속 깊은 곳에서는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거기에 단편영화처럼 반사된 인물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투명하고 허무한 특징의,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테마에 녹아들었다. 이 세상에 없는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 세계였고, 특히 소녀의 얼굴을 산속의 등불이 비쳤을 때, 시마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먼 산 위의 하늘은 아직도 붉은 저녁물이 빠지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각각의 형체는 저 멀리까지 뚜렷했지만, 1마일 씩만 가도
분간할 수 없을 단조로운 산의 풍경을 보며 결국 마지막 색깔의 흔적조차 잃어버리나 싶었다. 산 속에는 시선을 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에는 그것도 그저 넓고 형태가 없는 감정으로 흘러가버리나 싶었다. 이는 물론 유리창 위에 소녀의 얼굴이 떠 있기 때문이였다.
얼굴에 의해 밀려난 저녁 풍경은 얼굴의 윤곽선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소녀의 얼굴도 투명해 보였다... 투명해 보였나?
시마무라는 저녁 풍경이 실제로 그녀의 얼굴을 스쳐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잠시 후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핑계로
지금 이 상태, 이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열차 내부의 빛은 특별히 강하지 않았고, 유리에 비친 상은 거울에 비친 것처럼
선명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조명탄이 없었기 때문에 시마무라는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되었다.
그 소녀는 저녁 산의 흐름 속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녀의 얼굴에 빛이 비친 것은 그때였다. 거울에서의 반사광은 바깥의 풍경을 가릴 만큼 강하지도 않았고, 소녀를 흐리게 할 만큼도
강하지도 않았다. 빛은 그 조그만 얼굴을 가로질러 움직였지만, 막상 밝히지는 못했던 것이다. 멀고 차가운 빛이었다.
마침내 소녀의 동공에 조그만 빛이 도달해 눈동자와 그 차가운 것이 서로 겹치자, 그녀의 눈은 저녁 산의 바다에 있는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인광 조각이 되었다.







영어 조금만 더 잘했어도 위에보다 더 잘 번역할 수 있었을텐데... 원래 저것보다 더 고급진 느낌임 ㄹㅇ

영어 버전은 뭔가 완성된 걸작 같은 느낌으로 탄탄한 표현들이 너무 예쁘니까 궁금한 사람들은 꼭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