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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인생>은 밭갈던 농민 푸구이로부터 자신이 도박에 몰두하던 지난 삶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박의 재미는 돈을 잃느냐 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불확실성에 따른 재미를 극한으로 추구하기 위해 돈을 매개로 할 뿐이다. 도박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몰락하지만, 공산정권이 드러선 후 오히려 가산을 전부 잃은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처럼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가 어디 있겠으며, 돈보다 큰 생명을 건 진정한 도박에서 이긴 것 같은 쾌감을 선사한다. 운명의 몹쓸 장난이다.
이런 운명은 한 개체로서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앞에 놓인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모습으로도 제시된다.
국민당 집권시 재수없게도 군에 강제로 징집되고 전쟁터에서 가장 밑바닥의 상황에서 작동하는 기본적 욕망 속에서도 전우들과의 공감과 단결을 통해 인간성을 되찾고, 역사가 다음 단계로 진행되면 될수록 푸구이의 인간성 역시 한 단계 발전한다. 인간을 단지 자신의 거동이나 성욕의 만족 목적의 수단으로 대하던 무뢰한에서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으로, 가족 외의 사람들과도 인간적인 정을 나누고, 용서하고 격려하는 모습으로 점점 발전한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인생이 제 아무리 일개 개인이 마주하기엔 거대한 힘일지라도 인간으로서 인생을 맞아 반항하거나 적극적 의지로 헤쳐나가는 모습이 부재되어 있고 수동적으로 운명을 그저 수용하는 모습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 과연 가능할 것이냐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운명을 마주하여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이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순수하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제시되는 서사와 인물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감히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 칭하는 거대한 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탈함에서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발견하여, 깊이 공감하고 푸구이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으로 푸구이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전이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살장에서 죽음을 앞둔 늙은 소가 꺼이꺼이 우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고 죽음만을 앞둔 푸구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아무런 상품적 가치가 없는 늙은 소를 구입하여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짓는 것은 현재 자신의 운명을 욕심없이 초월하는 태연함과 망나니 시절과 대비하여 인간성 회복의 화룡점정을 이루며,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인간적 면모의 발전을 드러낸다. 작품 전체가 그야말로 하나의 인생인 것이다.
살아간다는 건..
허삼관도 읽어보시지요
허삼관매혈기도 재밌을거 같던데 인생이랑 같이 빌려와서 담주부터 읽을 예정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