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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사기'부터 케리 그랜트까지 -현대 일본 소설을 읽다-

<와세다 문학> 2003년 7월호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평론가, 문학평론가, 전 도쿄대 총장)


고유명사의 지각변동


오늘은 일본 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최근의 일본 문학, 특히 소설을 착실하게 따라잡는 분이 어느 정도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무시하고 말하겠습니다.


실은 작년 11월입니다만, <문학 르네상스를 향하여>(<스바루>, 2003년 3월호, <'저속함'과 '진정성' 사이에서> 라는 주제로,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오기나 안나 씨를 비롯해 마츠우라 히사키 씨, 코모리 요이치 씨가 심포지움을 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저는 개별 작품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이, 이념적인 것만 말했습니다. 여기(아오야마 북센터)에서도 <픽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 그 대략적인 내용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잡지에 실렸습니다만 (02년 겨울호, <'빨강'의 유혹>) 그 시기에는 그다지 현대 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평가의 임무에는 '읽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기 때문에 거기서도 몇가지 대담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중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결혼사기 소설이다' 라는 것입니다. 최신작을 읽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이 사람에게 전력을 다해야 한다'라는 기분을 불러 일으키고, 저쪽도 저쪽대로 그런 분위기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어버리게 되는, 그런 것이 '결혼사기' 소설입니다만, 그런 '무라카미 하루키 결혼사기설'이 다소간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기 때문에, 그 책임도 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이후, 그의 신작을 비롯해 최근 소설을 꽤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에 대해 오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만, 소재로 삼을 것을 여기서 말씀드리면, 우선, 방금 말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 (이건 최근엔 <해변카프>라고 불린다고 합니다만), 우선 이 <해변카프>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 씨의 두 작품, 첫 번째는 <체인지링> 이라는 작품이고, 그 다음으로 <우울한 얼굴의 아이>라는게 있어, 이것이 최신작입니다. 그리고 거의 이유는 없지만, 그 부근의 몇 작품을 작년 연말부터 올해 설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열거하자면,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문호들을 다룬 <관능소설가官能小説家>, 미즈무라 미나에 씨의 <본격소설>, 카나이 미에코 씨의 <소문의 딸噂の娘>, 오쿠이즈미 히카루 씨의 <낭만적인 행군의 기록浪漫的な行軍の記録>, 아베 가즈시게 씨의 <닛포니아 닛폰ニッポニアニッポン>, 그리고 다와다 요코 씨의 <구형시간球形時間>, 시마다 마사히코 씨의 <행성의 주인彗星の住人>, 히라노 게이치로 씨의 <장송>... 그 밖에도 몇 권을 읽었습니다만, 중간에 포기한 책도 있습니다. 사실 이 안에도 중간에 던져버리고 싶었던 작품들이 몇 개 들어있는데, 이것들을 일단 주제로 삼아, 현재 일본 소설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절반 정도 읽고 계신 분은 계실까요? 오에 겐자부로의 <우울한 얼굴의 아이>는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적네요. <해변의 카프카>는 어떤가요... 이건 꽤 읽으신 것 같고... 뭐 '꽤'도 아니네요 (웃음) 그럼 <관능소설가>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것을 읽은 분은 계신가요? 살짝살짝 손을 들고 계시는 느낌이 드네요 (웃음) 딱히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미즈무라 씨의 <본격소설>은... 대체로 똑같은 분들만 손을 드는 느낌이 드는데요 (웃음)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읽지 않았더라도, 제가 여기서 어떤 시선으로 이런 것들을 읽었고, 거기서 무엇을 끌어냈느냐 하는 것을 오늘 이야기하면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소설들, <해변카프>부터 시작해 <장송>까지 읽으며 저는 어떤 기묘한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그 '기묘한 상황'이란, 이 소설들에서 고유명사라는 것이 이른바 인간 사회에서의 고유명사의 배치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어째선지 문학의 고유명사에 기묘한 지각변동과 같은 것이 일어나고 있고, 그 지각변동이 각자의 작품을, 나름대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관능소설가>라는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 '나'는 작가이자 화자이며, 그것이 그대로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는 아닌데요... 등장인물인 편집자 중 한 명을 붙잡고 "자, 질문. 소세키의 <그 후>의 주인공은" 이라고 말하자, 그 편집자는 "나가이 다이스케"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나'는 "...이죠. 바보야? 아직 질문 중인데.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잖아. 그렇다면 그 나가이 다이스케가 평소에 읽는 신문은?" 이라고 말을 돌려 버립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퀴즈에서, 말하자면 함정을 파놓고 먼저 풀어버리는 사람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뭐 바보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게임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는 굳이 이런 게임을 작품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다이스케는 어떤 신문을 읽는가 (당시에는 마이니치 신문이 없었기 때문에, 아사히거나 요미우리입니다만) 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메이지 문단을 지탱해 온 것이, 연재 소설을 아사히 신문에 싣느냐, 아니면 요미우리 신문에 싣느냐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백만장자 퀴즈쇼>였다면 "나가이 다이스케"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왜 그런 부분에 주목했냐 하면, 여기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근대소설의 한 형식'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 뒤에 펼쳐져 있는 다양한 인물 관계와 가정환경이라든가, 사회적인 확장이라든가, 혹은 또 다른 연애관계 같은 것이 일단은 나옵니다. 즉 가상의 존재이면서도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독자들이 고유명사를 통해 그 사람의 인물 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형태로 오랫동안 근대소설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왔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했을까' '그는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을까' '사회적으로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을까', 이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들으면, 큰 부자도 아니고, 연애에 매우 뛰어난 사람도 아니다, 같은 것을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이 소설의 위치 같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어느 시기까지는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관능소설가> 주인공 이름을 묻는다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대답할 수 없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는 대명사 (때로는 '타카하시겐이치로씨')가 나오지만, 그것이 주인공이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다이스케'와 같이 사회적인 확장이나 개인적 심리를 지닌 주인공과는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사람에게는 거의 이름이 없습니다. 가령 있다고 해도 가타카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다카하시 겐이치로까지의 약 1세기라는 시간을 떠올려 보면, 거기에는 '다이스케'에 해당하는 고유명사가 근대 소설에서 점차 사라지고, 주인공의 이름이 일종의 의성어 같은 부호로밖에 나오지 않게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처럼 K로 기호화되어 있더라도 그에게는 심리적 사회적 확장성도 있기 때문에, 그 인물상은 독자들에게 폭넓게 공유될 수 있습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을 물으면 대답은 일단 '카프카'로 하면 되지만, 그것은 소년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통칭 '카프카'로 통하고 있더라도, 예컨대 '다이스케'와 같은 형태의 자기 정체성을, 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주인공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읽어주기를 작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이스케'와 같은 사회적 자기 정체성, 심리적 기반을 가진 인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이미 지적한 '고유명사의 지각변동'의 한 예인 셈인데, 앞서 언급한 11편의 소설 대부분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여기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제목과 인용


이 '고유명사의 지각변동'은 다양한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인공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단순히 주인공뿐만 아니라 제목 자체가 고유명사로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지, 이것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예컨대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이 '카프카'는 당연히 그 프란츠 카프카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며,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한 어떤 고유명사가 21세기 초에 쓰여진 일본 소설에 그대로 인용된 것입니다. 연구서에선,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프카론' 이나 '카프카에 관한 에세이'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현실에 존재했던 작가의 이름이 그대로 어느 일본어 픽션 속에 나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입니다.


'인용'이라는 점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소설의 제목에는 몇 가지 인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나이 미에코의 <소문의 딸>은 나루세 미키오의 1935년 영화 제목을 인용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이 소설을 잘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지금 이 시기에 카나이 미에코라는 일본 작가가 <소문의 딸>이라는 소설을 썼다면, 그보다 몇 년 전에 이 작가가 <소문의 딸>이라는 훌륭한 영화를 보고 어떤 형태로든 감명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소문의 딸>이라는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 중에서도 오랫동안 상영본이 존재하지 않았고, 저 자신도 어느 정도 관여하는 형태로 토호에서 상영본을 만들어 60년 만에 상영한 것이 1997년이었기 때문에, 카나이 미에코라는 작가는 그 이전에 <소문의 딸>이라는 영화의 제목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화 제목만 알고 있었을 뿐 본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소문의 ~'이라는 것은 <소문의 진실>이라는 잡지도 있고, <소문의 여자>라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1954년)도 있기 때문에, 제목으로서는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가네이 미에코 씨의 경우는 분명히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제목을 의식하고 있어요)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나루세 미키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죠.


이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용관계에 있는 작품을 읽을 때, 인용된 본문을 알아야 하는지 여부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알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잘못 알고 있다거나, 혹은 당연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소문의 딸>이라는 소설을 읽는 데에 아무런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왠지, 충실한 본인 입장에선, 그걸 모르는 사람은 바보 아닌가 말하고 싶어하는 있는 듯한 표정을 줄곧 짓고 계십니다만,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제목을 붙이게 된다면, 그것은 인용이긴 하지만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에 겐자부로의 <우울한 얼굴의 아이>의 경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면 작품을 읽는 방법 자체가 불충분하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은 제목입니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라는 제목은 원본 작품은 원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여기서 처음 나온 제목이긴 합니다만, 그 제목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 중 한 가지를 바꾸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유명사가 됩니다. 즉, '아이'라는 단어를 '기사'로 바꾸면 '우울한 얼굴의 기사'가 되고, 아시다시피 그것은 돈키호테를 부르는 문화적 기호가 되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도 그렇고, 저는 스페인어를 모르지만, 아마도 스페인어 등에서도 '슬픈 얼굴의 기사'라고 틀림없이 부르고 있을 겁니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 에서도 '슬픈 얼굴의 기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인용은 아니지만, 단어의 일부만 바꿈으로써 배경에 어떤 작품을 상정하고 있는지를 제목 단계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울한 얼굴의 기사'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작품을 잘못 읽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소설의 정통적인 역사와 연결되는 것이며, <소문의 딸>에 비해 훨씬 더 문화적인 깊이를 지닌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목을 붙임으로써 오에 씨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 혹은 오에 씨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울한 얼굴의 기사'라는 말을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겠죠. 동시에 '우울한 얼굴의 기사'가 돈키호테니까 <돈키호테> 정도는 읽어 주셨으면 한다는 상당히 강한 의지가 이 제목에 담겨 있죠. 그런 의미에서 영화 제목을 인용한 <소문의 딸>보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가 더 문학작품으로서 읽으려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힘이 더 강하다. 물론 그것은 작품의 가치와는 무관한 문제이지만, 오에 씨의 소설 제목은,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함께 <돈키호테>를 읽으세요' 라고 사전에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즈무라 미나에 씨의 <본격소설>은 어떨까요? 말할 필요도 없이 '본격 소설'이라는 고유명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소설을 평가할 때 '바로 이것이 본격 소설이다'라고 사용하기에 적합한 일반적인 어휘입니다. 동시에 '사소설' 등과 같은 문학적인 집단 구분을 나타내는 '본격 소설'이라는 말도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심리소설', '전기소설'이라는 주제어가, 소설의 제목, 즉 고유명사가 되는 소설이 있었는가 하면 이것도 없었습니다. '본격소설'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함으로써 다양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도, 매우 강한 무언가를 내포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제목, 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격 소설>은 제목이 아니야, 이건 일종의 질적 판단이고, 그룹을 나누는 데 필요한 단어인데, 그것을 제목으로 다니, 당신도 꽤나 대담하네"라고 남들이 말을 꺼내게끔 하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19세기의 소설에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도 새로운,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쿠이즈미 히카루 씨의 <낭만적인 행군의 기록>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이건 매우 산문적인 것으로, 그 자체로는 딱히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의 전전작 정도였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살인사건「吾輩は猫である」殺人事件>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어서, 당연하다는 듯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재미가 반감된다' 라든가 '이 소설을 읽을 정도인 사람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읽었을 것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겁니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 만큼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문화적 전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기묘한 것은 다와다 요코 씨의 책으로, 다와다 씨의 소설 제목을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알겠지만, 이런 종류의 행위를 그녀는 항상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말장난, 혹은 '동음이의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여기서 '구형시간'이라고 입에 담았을 때,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은 (*일본어로 같은 발음인) '휴식시간' 이겠지만, 실제로는 '둥근 구와 같은 형태의 시간'을 의미하는 '구형시간'이고, 일종의 이형화(Transmogrify)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와다 씨의 소설 <용의자의 야간열차>도 있습니다. 이것도 '밤열차'라고 읽으면 안되고 (*같은 발음인) '용의자'로 읽어야 하니까, 그런 엉뚱한 제목을 왜 붙이는거냐 물어도 그녀가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예컨대 자크 데리다처럼, 그런 '동음이의어'로부터, 에크리튀르와 파롤의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픽션적 허용도


그래서, 각각 전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제목에서도 이미 고유명사가 지금까지 우리들이 '문학'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꽤나 동떨어져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에도, 기묘한 고유명사의 배치가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읽어보면, 그 테크닉도 전형적인 예라고 할까요, <관능소설가>에는 모리 오가이와 나쓰메 소세키와 히구치 이치요라는 고유명사가 자주 등장하고, 후타바테이 시메이도 언급되어 있고, 그 외에도 모리타 소헤이 (이건 그의 전작인 <일본문학 성쇠사日本文学盛衰史>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도 있고, 뿐만 아니라 현대라고도 메이지시대라고도 할 수 없는 소설적인 시간 속에서 이런 등장인물의 고유명사가 튀어 나옵니다. "그렇게까지 해도 되나요?"라고 작가에게 묻고 싶어지는, 그런 등장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그 부분을 낭독해 드리고자 합니다. 장소는 신주쿠 부근의 문인들이 찾는 바인데, 거기서, 이 '나'라는 남자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당신 몇년 생이야?"라고 '나'가 물어봅니다.


"왜 그런걸 묻나" / "습관이야.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태어난 해를 묻지. 맞으면 나한테 한 잔 사는 거고. 틀리면 내가 사줄게" / "오케이. 맞춰봐" / "1917년?" / "틀렸어. 술 사" / "사기는 할 건데, 몇년생이야 당신?" / "1867년" / 현기증이 났다. 메스꺼워졌다. 구역질이 났다. 기분이 안좋아졌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뭐야, 소세키잖아! / 가게 문이 힘차게 열렸다. 오가이가 들어왔다. / 오가이는 씩씩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와, 내 오른쪽 의자에 앉았다. 내 왼쪽에는 소세키가 앉아 있다. 진퇴양난에 빠진 건가? / "저기..."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뭔가 결정적인 말을 해야겠다. 놈들을 단숨에 제압할만한 말을. 현대 작가들의 체면을 걸고 말야. 나는 말했다. / "주문 하시겠어요?" / "이모, 물 탄 위스키" 오가이는 말했다. / "이모, 버번 소다" 소세키는 말했다. / "이모...... 물" 내가 말했다.


이것이 '문학적으로' 우수한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매우 흔들립니다. 신주쿠 근처의 문인 바에 '나'가 앉아 있는데, 어째선지 그 옆에 소세키가 앉아 있고, 오가이도 찾아옵니다. 허구의 소설에는 무엇이 일어나도 괜찮기 때문에, 이 또한 원칙적으로는 상관이 없습니다. 허나 반면에, 역사적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게다가, 대부분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져 있는 실제 인물을, 그렇지 않은 허구의 인물들과 동거하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간 왜곡을 도입하는 것이 되고, '픽션적인 허용도'가 흔들리게 됩니다. 게다가 '문호'라고는 해도 써 있는 대로 '다카하시시 따위'라고 그대로 말하면 좀 그렇고, '겐쨩'이, 여기에 소세키가 있어, 여기에 오가이가 있어, 게다가 뭘 주문할거냐는 말을 듣고, "이모, 물 탄 위스키"라고 돌연 말해버립니다. 그런 광경을 쓰는 건, 과연 허용될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들은 "문학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죠.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무엇이든"에도, 어딘가 금기시되는 한계라는게 있지 않을까 하고 누구든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는 그 우려를 과감히 떨쳐버립니다. 저는 그 점에서, 일종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솔선수범해 하고 있습니다. 꿈과 허구의 작품은 다르기 때문에, 단순한 꿈이면 괜찮은 것도, 제 3자인 불특정다수 독자에게 읽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신문 연재 소설, 게다가, 나츠메 소세키가 문예부를 주재하며 여러 편의 소설을 연재했던 아사히 신문의 지면에서 이걸 한다는 건, 잘도 아사히 신문의 상층부가 용인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만 둬'라고 하면 또다시 겐쨩이 '표현의 자유'인지 뭔지를 말할테니까 어쩔 수 없다, 일단 하게 내버려 두자, 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아사히 신문의 사장이라면, 즉시 잘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다만, 현실적으로 저는 아사히 신문의 사장이 아니니까, 그를 자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렇게 투덜거리는게 결코 싫지 않은 인간이기도 하니까, '뭐, 해보세요, 단지 당신 ('당신'이라고 말하는 대상은 어디가 되는 걸까요 (웃음). 과연 다카하시 씨에게 말하고 있는 걸지)이 이 정도의 일을 하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해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제게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살펴 본 것은 제가 '픽션적 허용도'라고 부르는 문제인데, 픽션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자유조차도 그 의미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는 자유도 부자유도 아닌 시공간에서 그 모호함을 견뎌내야 합니다. '문호' 겐이치로 씨가 그 모호함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오가이와 이치요가 사랑에 빠지는데, 명백한 시간적 편차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일단 메이지 44년 정도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마저도 픽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치요는 이미 죽었습니다. 오가이가 "이치요는 메이지 29년에 결핵으로 죽었어. 그래서 메이지 42년에 나와 연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하고 다카하시 씨에게 말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위를 하도록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히구치 이치요는 현대의 성 풍속을 지닌 형태로 등장하고, 오가이도 AV 배우가 되어, 그 오가이를 향해 소세키가 "네가 쓰는건 전혀 재미가 없어, 움직임이 없거든" 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뭐라 했냐 새끼야?" 라며 욕을 먹습니다. 이건 상당히 위험한, 그러나 누군가가 시도해 보았어야 할 일을 (누가 먼저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우느냐와 같은 것이지만) 상당히 당당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문호' 다카하시의 그 시도를 어느정도 지지하려 합니다. 가끔 읽기 힘들어지는 소설이긴 하지만요(웃음)


그러나, 고유명사의 배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가이가 "물 탄 위스키", 소세키가 "버번 소다", '나'가 "물만"이라고 말하는 것을, '픽션적인 허용도'라는 관점에서 과연 용납할 수 있는지는 여러분이 읽어보고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소설 속에선 거짓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들의 반응도 나와 있어서, "저런 저속한 이야기는 당장 연재를 중지시켜 주세요" 같은 이메일도 오고 가는데, 그 부분도 저는 '일단 읽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옹호할 만한 재미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읽는 고통에 상응하는 쓰는 고통이 거의 물질화되어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메이지 문학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소세키' '오가이' 처럼, 실존 인물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있을 법 한 것이지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오가이가 잠시 문단에서 멀어지고, 그걸 복귀시키려 소세키가 모리타 소헤이를 이용해 오가이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게끔 시키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허구입니다만) 것까지 해버립니다. 여기서 고유명사가 빠져있는 기묘한 지각변동을 작가는 견뎌내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틀림없이 존재했던 인간이 허구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더욱 본격적으로 해버린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의 <장송> 주인공은, 외젠 들라크루아와 프레데리크 쇼팽입니다. 이 두 사람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고, 19세기 초반부터 중반에 걸친 파리라든지, 물론 쇼팽이니까 폴란드 문제도 나오는데, 1850년을 막 지난 프랑스 수도의 문제가 차례차례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모델소설이 아니라서, 본인의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고유명사의 배치로서는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존했던 쇼팽이, 여기서는 허구의 존재가 되어 있으니까, 픽션은 이중화됩니다.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도 그런 것이 있기에, 딱히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여기에는 메이지 10년대의 정치소설이 무의식적으로 해오던 것을 의식화한 것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 개가自由の凱歌> (*알렉상드르 뒤마의 <바스티유 습격>을 번안한 메이지 시대의 소설)의 포스트모던 버전과 같은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여기서도 다카하시 씨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픽션적인 허용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당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장송>에 대해서 그것이 성공적이었나는 일단 재쳐두기로 하고 (실은, 읽고 있다가 후반부에서 읽기를 멈췄지만요) 현실에 존재했던 인간의 고유명사로 어떻게 허구를 성립시킬 수 있는가, 또는 그것을 허구로 성립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장송>의 경우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작품과는 반대로 주변에 배치된 다양한 디테일을 '사실'처럼 그리는 방향을 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 등에 시대적 착오가 없도록 정확하게 써라, 라는 거죠. 또한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역사적 인물인데, 그 관계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즉, 인물의 수준에서든, 역사적 흐름의 수준에서든, '올바르게'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건데. 예컨대 장소 하나를 가지고도 "~광장에서 그들은" 이라고 할 경우, 그 "~광장"은 확실하게 그 시대의 파리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즉 허구와 가장 먼, 현실에 가까운 것을 하나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허구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큰 모순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움'만으로는 안되기에, 검증을 받았을 때 정확해야만 합니다. 19세기를 그린 소설의 경우, 그런 문제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마차의 이름'입니다. 일본어로 '그들은 마차를 탔다'고 써버리는 부분도 19세기 소설에서는 절대 그런 문장을 쓰지 않습니다. '마차'라는 총칭은 프랑스어에서도 영어에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족의 탈것에서 일반 시민의 탈것으로 성격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 명칭에도 큰 변화가 생기고, 게다가 외국산들이 무서운 기세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19세기의 마차는 각각 '지붕 있는 이륜마차' '지붕 있는 사륜마차' '지붕 없는 이륜마차' '승합마차' 등 각기 다른 용어가 쓰이게 됩니다.


이 <장송>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그 점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탈것에 탔는지 따라가고 있는 것이죠. 예컨대 '카브리올레cabriolet' 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이륜마차'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포스토malle-poste'라고 하면 이것은 '우편마차'입니다. '랜도'는 '지붕 있는 이륜마차'이고 '칼레슈calèche'는 '지붕 있는 사륜마차', 이토록 그 구분이 면밀하게 고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씨는 그런 세세한 부분을 조사해보고, 여기서 실수하면 '허구의 진실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큰 두려움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서 들라크루아와 쇼팽이라는 실존 인물을 허구의 인물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그 배경에 흐르고 있는 시간이 틀려서는 안되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도 잘못 없이 써야 한다. 그들이 마차를 탄다면 그 마차가 어떤 마차인지 정확하게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쇼팽이나 들라크루아를 가상의 인물로 등장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1869년에 나온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1840~50년에 걸친 이야기라고 쓰여 있어, 즉 <장송>과 거의 같은 시대를 그린 소설입니다. 한 세기 이전의 과거를 재현하는 <장송>과 다른 점은, 이 소설은 사건 발생 후 20여 년이 지난 후에 쓰여졌다는 점입니다. <감정 교육>은 19세기 소설의 걸작 중 하나인데, 거기 나오는 마차 이름의 절반 이상이 틀립니다. 프레데릭 모로라는 주인공이 연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샹젤리제를 산책하는 장면인데, 그 때 나무가 늘어선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마차에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낍니다. 다양한 마차들이 한꺼번에 지나가는데, 그 중 절반은 그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마차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마차의 이름은 19세기에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외국산 마차도 점점 등장하며, 신조어가 잔뜩 들어왔습니다. 외국어가 그대로 쓰이는 '마차'도 잔뜩 있고, 저는 예전에 <환상의 마차>라는 논문을 썼는데,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읽고 있는, 프레데릭 모로가 샹젤리제를 산책하는 장면에 나오는 마차 이름의 절반은 거짓말이라는 거죠.


그런 플로베르에 비해 히라노 게이치로는 거짓말을 쓰고 있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짓말을 쓰는 것이 더 대단한지, 거짓말을 쓰지 않으려는 배려로 차례차례 마차 이름을 따라가는 것이 더 좋은지. 매우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연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을 허구의 인물로 만들기 위해 취한 히라노 씨의 여러가지 배려가, 그 배려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 플로베르와 비교했을 때, 창작자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하지 않는 마차', 배경인 샹젤리제엔 아직 달리지 않아야 할 종류의 마차까지 달리게 했던 것입니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은 불과 이삼십 년 정도의 시대적 간극이 있다고 해도 일종의 역사소설이지만, 이 이삼십 년이 소설의 어떠한 역사성을 추구해 나간 경우, 상당히 거대한 편차를 낳습니다.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파괴된 건물이 배경에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플로베르는 그런 세부의 대부분을 무시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너, 이건 1849년 사건이잖아. 그러면 여기에 그 건물은 안 보였을 테니까 이 에피소드를 지워버려" 라고 말해도 플로베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정 교육>에는 역사적으로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아직 존재할 수 없는 노선을 기차가 당당하게 달리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프랑스인들조차,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읽습니다. 그것이 바로 '픽션적 허용도'인데, 이에 대해 히라노 게이치로 씨는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어떤 '움직임'이 작품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마차가 무수히 달리고 있다'는 운동감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여기엔 틀린 데 없이 마차의 이름을 적었습니다'라는, 말하자면 수험생이 빈 칸에 무언가를 채워넣는 것처럼 써버립니다. 읽어나가면서, 저는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로서의 대담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동시대적 감성의 착각


소설이란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방금 예로 들었던 소설 몇 작품은, 대부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때 '이건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끔 세부를 지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본과는 무관한 배경을 선택한 히라노 게이치로 씨의 경우, '실수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쓰는 행위의 운동감을 지워버렸다'고 언급했습니다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몇가지 있었기에, 여기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시간적으로 이상한 것이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해 자세히 건드려보자 합니다만, 제 2차 세계대전 도중, 1944년으로 상정되는 어떤 사건에 있어 두드러집니다. 쇼와 19년, 앞으로 1년이면 제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에 의해 끝나는데, 야마나시현이었나요, 시골 학교 선생님의 16명의 학생을 데리고 산으로 향하는 겁니다. 체험학습을 간 곳에서, 거의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나중에 이유가 어느정도 밝혀지지만) 학생들이 하나 둘 쓰러집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학생들을 깨우려고 하는데, 어느 시간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마침내 잠들어 버렸다는 삽화가 있습니다. 전쟁 이후, 미군이 와서 그 사건을 수사합니다. 거기서 증인이 몇명 나와, 미국 장교에 맞서,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 중 한 명, 의사의 증언입니다만, "당신은 그 장소에 갔습니까" 라는 장교의 질문에, "네, 저는 거기에 갔습니다. 거기서 16명의 남녀 학생이 연이어서 쓰러졌습니다"고 의사는 증언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인데, "그것은 마치 전위적인 연극芝居의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태가 일어난 것은 쇼와 19년, 1944년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1946년 정도에 그것을 회상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전위적인 연극'이라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의사는 츠키지 소극장이라도 다니고 있던 걸까요? 그러나 '전위적인 연극'이라는 어휘는 카라 쥬로唐十郎 이후의 세계랄까, 또는 히지가타 타츠미土方巽의 무용 이후의 감성입니다. 종전 직후에는 '전위적인 연극'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게다가 시골 마을에 산다는 의사가 어째서 '전위적인 연극' 같은 표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무라카미 씨, 이건 이상하지 않나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꽤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씨의 문장이라는 것은, 마치 역사적인 배경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시대 배경을 향한 고착도가 매우 희박하기에, 다들 별 생각 없이 읽어버립니다. '아, 전위적이구나' 하고 생각해버리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 카라거나, 히지카타구나' 해버립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마치 전위적인 연극의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것을 1946년, 쇼와 21년의 등장인물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 소설가로서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 그것이 '픽션적인 허용도'에 저촉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몇년도 몇월에 무슨무슨 승합마차가 달렸습니다'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조사해 쓰는 것에 비해, '전위적인 연극'이라고 툭 흘려버리는 사람은, 자신의 작품을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만날리가 없는 시기에 굳이 히구치 이치요와 모리 오가이를 만나게 하고 있습니다만, 이 '전위적인 연극'이라는 한마디에는, 그런 '굳이'의 각오가 없다. 과연 어떨까요, 이런 게 허용되는 걸까요? 아니면 '당신은 68세대니까, '전위적'이라는 말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려 하는데, 그런 것은 픽션이라도 허용될 수 없어' 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비평가인 저는 그런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그거대로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렇게 동시대적인 감성이라는 것에 대한 동조의 기대가 있습니다. '다들 전위적인 연극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알 것이다', 숲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새하얀 얼굴을 하고 늘어져 있다... 라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문화적인 동시대성으로 지니고 있는 '전위적인 연극'이라는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을 것을 기대하며, '바로 그거야'하고 지시한다. 그것이, 제가 '결혼사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마치 전위적인 연극을 보고 있는 듯"같은 말을 그 시대의 의사가 말할 리가 없는데,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 '사기'군요, 그는. 그런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아무쪼록 사기에 당하지 않도록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사기에 당하는 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꿈을, 굳이 깨트릴 생각은 없습니다.


<낭만적인 행군의 기록>도, 1945년에 일어난 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중국 대륙을 여러 출신의 일본군 병사들이 행군하면서, 선 채로 잠을 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본군이 패배한 것을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항복해야 할까 하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서 천황은 죽었겠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연히 죽었겠지, 목이 잘려나갔을 거야'라거나, 한편으로 "아니 천황 정도의 사람은 지하에 큰 피난처가 있을 거야..." 라든가, 중국 대륙에서 행군에 참가한 일본군들은 이런저런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사람이 "애초에, 지금의 천황은 북한계니까"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남한이라는 것은, 물론 한반도에 남과 북이 있는 것은 맞지만, 물론 동과 서도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말은 한국전쟁 이후에 의미를 갖기 시작한 단어인데, 과연 1945년 중국대륙에 있던 일본군에게 어울리는 말일지.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렇게 말하게 하는 것이 작가가 원했던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체인지링>은, 고기토라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첫 줄부터 고기토라는 글자를 고기토古儀人라고 쓰는데, 오에 겐자부로의 고유명사 배치가 꽤나 기묘해서, 그가 읽는 법을 알려주어도 나중에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 잔뜩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유래되었다고 쓰인 '고기토'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단순히 제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어쩐지 저는 '우가진' 같은 느낌으로 '고키진, 고키진' 하고 머릿 속에서 되새겨 버립니다 (웃음) 이 주인공은 '쵸우코長江'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딘가 오에大江 겐자부로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대大'를 빼고 '장長'으로 바꾸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고, 에토 준江藤淳과 같은 사람이 우토宇藤가 되어 있다거나, 읽은 분이라면 '후훗' 하고 생각할 만한 이야기가 잔뜩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와 고로'는, 어느정도 오에 겐자부로의 삶의 흐름을 알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작가가 된 잔재주 많은 사람 (여기서는 굳이 고유명사를 쓰지 않겠습니다만)이었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


이 소설은, 그 '고기토' 씨와 '고로'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시고쿠의 한 마을에서, 미군 살해에 가담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소재삼고 있는데, 영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며 젊은 시절부터 영화작가가 되려고 했던 '고로'는 피터라는 미군 문화 담당 장교에게 자신이 태어난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 유학하여 그 영화학과에 입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고 아주 기분이 좋았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종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은 물론 존재하고 있었고, 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피터라는 미국인 장교가 캘리포니아 대학을 다녔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중에 그가 그곳을 졸업했다고 가정할 때, 제가 조사한 바로는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 영화학과가 존재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화학과가 생긴 것은 1950년대가 되어서의 이야기이며,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막 끝냈을 때,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 입학해서 그 영화학과에 들어가라고 하는, 그런 문화적 배경은 없었다. 따라서 이것도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이상한 것이 되는 거죠.


예컨대 아까 말씀드린 "애초에, 지금의 천황은 북한계니까" 라는 말은 분명히 현대의 지식인이 좋아할 법한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위적인 연극의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는 것도 현대의 지식인이라면 금방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엔젤레스 캠퍼스 영화학과에 다니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은, 영화를 좋아하는 현대의 지식인이 하면 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1950년 전후의 대화에 끼어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할지, 그런 세부는 생략해도 되는 건지가 저는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선 단순한 시대착오와는 다르게, 동시대 문화 환경에 안일하게 기대는 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도, 그 '영화학과'도 물론 고유명사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런 몇 가지 고유명사의 이상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작가 측의 동시대 독자들의 공감에 대한 경솔한 기대가 내포된 것 같습니다. 그 공감은 작품의 이해와는 전혀 상관없는 작가의 아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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