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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카나의 함정


'고기토'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자유민주적이며 국수주의적인 기묘한 인물로, 나카에 조민中江兆民한테 받은 것이라며 아들의 이름을 '고기토'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름을 지닌 일본인은 거의 없지 않냐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문학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이름입니다. 방금 전 이름을 말했던 아베 가즈시게의 소설 <닛포니아 닛폰>은, 새(鳥)라는 한자에 히(ヒ)와 십(十)이라는 글자를 합쳐 토키(鴇) (토키라고 읽는 글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라는 이름의 소년이 따오기, 즉 토키(トキ)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지어낸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만, 인터넷을 보면 그다지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 그런 이름의 마을이 일본에 많이 있다고 쓰여져 있는데,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거기에도 고유명사의 불균형이 있는 셈인데,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작품에는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와 같은 부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고유명사가, 그것도 가타카나로 잔뜩 나옵니다.


앞서 말했듯 <장송>의 경우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들라크루아로 했기 때문에 (*외국어는 가타카나로 표기) '들라크루아ドラクロワ'라고 가타카나로 쓰고 있고 '쇼팽ジョパン'도 다른 방법이 없지만, <해변의 카프카>를 보면, 필연성이 없지만 가타카나 이름이 대부분입니다. '카프카カフカ'라는 주인공 소년이 "애초에 나는 카프카가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모두가 그를 '카프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작품의 구조에 관련된 것인데, '카프카' 군의 곁에는 '까마귀カラス'라 불리는 소년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 소년은 말하자면 카프카 군의 얼터에고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까마귀는 독일어로 카프카라고 한다고 작품 내에 착실히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까마귀' 역시 여기서 한자로 쓰여 있지 않고, '까마귀라 불리는 소년'과 같은 식으로 가타카나입니다.


앞서서, 허구 속에 실존 인물을 등장시키는 작품이 많다고 말씀드렸는데, 허구의 인물을 또다시 허구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시마다 마사히코의 <행성의 주인>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비부인>의 핑커튼과 초초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손자에 해당한다는 설정이네요. 그 아이 역시 이름은 '카오루カオル'로 가타카나로 쓰여 있습니다. 애초에, 핑커튼과 초초부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성장하면 핑커튼 주니어가 되지요. 그 핑커튼 주니어가 어째서인지 다시 일본인과 결혼을 하게 되고, 혼혈인 '카오루'가 태어납니다. 그 후 '카오루'는 전부 가타카나이고,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혜성의 주인>의 경우 대부분의 퍼스트네임이 가타카나로 되어 있는데, 이는 외국인인 경우도 있지만 일본인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째선지 최근, 이라는 표현은 다소 무책임하겠지만, 일본에서 현대문학으로 불리는 작품에는 가타카나로 된 이름이 매우 많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경우에도 가타카나로 만들어집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해변의 카프카>인데, 환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조니 워커, 다른 한 명은 커널 샌더스라는 인물로, 그 KFC 할아버지와, 실크 햇을 쓰고 위스키를 마시는 이상한 복장의 아저씨가 나옵니다. 이것은 우에노 코우시 씨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조니 워커라는 이름에서 구르 두트의 작품의 유명한 인도 조연 배우를 상상하게 되어, 하루키 선생님도 꽤 하는구나 싶어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살해당하거나, 또는, 주인공이 찾고 있는 장소를 수염이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왠지 모르게 가르쳐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나카타 씨가,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는 좋았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60세가 되어 고민하던 도중, 도쿄도지사 ('지사님'이라고 부르는데)에게 돈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있을 때, 자기 자신 속에서 '서쪽으로 가라'는 계시 같은 것을 받고, 나카노구 외에는 가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 고생해가며 버스와 장거리 트럭을 타고 시코쿠까지 가버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이상한 습성이 있어서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고양이에겐 자신만의 고유명사 같은 것이 없지만, 대화가 성립하는 고양이에겐 전부 인간의 이름을 붙여 버리는 겁니다. '카와무라 씨'라든가. 그 가타카나 이름을 읽다 보면, 아까 언급한 <관능소설가>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능소설가>의 경우, '소세키는 ~라고 말했다, 오가이도 그렇게 말했다' 같은 식이지만, 나카타 씨는 자신을 '나카타' 라고 부르고, "나카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카와무라 씨"라고 말을 건냅니다. 그러자 카와무라 씨라고 불린 고양이는 "어쩔 수 없구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이 '나카타ナカタ'와 '카와무라カワムラ'의 배후에, '다이스케'와 같은 심리적 깊이, 사회적인 확장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식별을 위한 부호에 가까운 그 가타카나 이름에는 유래는 있어도 역사는 없습니다. 개인으로서, 시간을 관통하는 중핵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픽션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이스케'의 경우에도 그 심리적 깊이나 사회적 확장성은 허구에 불과하고, 본문에서는 시간을 궤뚫는 중핵도 갖추지 못했고, 소세키가 마치 그가 실존 인물과 다르지 않은 자기동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도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의도적으로 그런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문제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픽션적 허용도'를 작가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때, 실존 작가 소세키의 이름을 픽션에 도입함으로써 다카하시 씨는 자유와 부자유의 모호한 중간 지대에 몸을 두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나카타'를 창조하는 자신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자질을 그에게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 '픽션적 허용도'를 향한 경외심이 희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부자유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나카타 씨도 결국은, 한 때 하나였던 인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분신이고, 아무래도 그림자가 절반 정도 희미하다고 묘사되고 있어, "이 둘은 어딘가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애초에 이 소설의 이야기는, 한 쪽에 나카타라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쪽엔 카프카 씨가 있습니다. 양쪽 다 가타카나 이름인 둘의 관계는, 장을 거듭할수록 가까워지고, 마지막에는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등과도 비슷하지만, 그리피스적인 영화의 평행 몽타주를 떠올리면 알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무성영화적인 방식이며, 그 틀에 갇혀 있는 부자유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카프카' 군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 지는, 그의 마음 속에, 기계의 일부같은 형태로, 일종의 예언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은 (그 부분이 이 소설을 호평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 됩니다만) "너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 누나와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고 말하는 오이디푸스적인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도 어느정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문제는, 말하자면 예언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기묘하게도, 예언을 하는 것은 '나쁜 사람'입니다. 반면 예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좋은 사람'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느낌적인 소설을 쓰고 있는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한데, '나카타 씨'의 주변에는 모두 '좋은 사람'만 모여들고, 곤경에 처했을 때는 누군가가 '도와줍'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분 덕분입니다"라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데 카프카 군이 걷다 보면 (그는 어느쪽인가 하면 매우 특이한 인물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항상 책만 읽는 소년입니다) 다가오는 사람들도 매우 친절하고, 누구도 그를 악으로 유혹하려 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어떤 형태로든 갖고 있는, '사회적인 선악'의 피안까지 가버리는 것이 없이, '선악'의 차안을 쾌적하게 활주하듯이, 저는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악'이나 '두려움'이 그다지 없습니다. 모두가 친절한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디선가 누군가 장난치는게 아니냐'라고 물어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 같은 부분이, 저는 조금 신경이 쓰이는데요,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나카타 씨를 카프카 군에게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차례차례 이끌어 가는 것'이, 이 작품의 방향성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가타카나만 나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을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저는, 그 부근에 현대 소설의 병리현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해변의 카프카>라는 제목에, 이미 '카프카'가, 가타카나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제목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제목과 운동


제목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적 측면'과 '문학적 측면'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서점에 가서 "<해변의 카프카> 있나요?"라고 물을 경우, 문학적인 의미는 거기엔 없습니다. 사회적인 상품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상품명을 말하면, "네,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훔치는게 아니라면, 거기서 여러분은 돈을 지불하게 됩니다. 또는 "너, <해변의 카프카> 읽었어?" "응, 읽었어" 라고 말할 때, 사회적인 교류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제목은 그것 뿐만이 아니라, 파라텍스트(paratext)로서 '그로 인해 이어지는 텍스트의 총칭'이 되며, 제목을 부르는 방식 그 자체가, 작품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간신히 응축함으로써 도출되는 것, 혹은 작품의 일부를 확대하여 도출되는 것 등등이 있어, 텍스트 그 자체와의 관계는, 매우 모호한 것입니다.


예컨대 <해변의 카프카>라는 제목은, 그렇게 쓰여진 작품에 붙는 제목일 뿐만 아니라, <해변의 카프카>라는 음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카프카 군은, 그것을 우선 레코드로 (CD 등이 없던 시대에 유행했던 것이기에) 듣습니다. 그 후, 악보를 받아 코드의 재미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학이기 때문에, 그 멜로디를 우리는 들을 수 없고, 악보에 재미있는 코드가 있다고 해도 코드 자체를 듣거나 볼 수 없죠......


<해변의 카프카>란, 카프카 군이 해변에 서있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작품과 동시에 존재하게 되어버린 가상의 곡의 제목인 것이니, <해변의 카프카>를 듣고싶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레코드가 있나요 등, <해변의 카프카>라는 제목에 의해 지시되는 소설 속의 <해변의 카프카>라는 말이 잔뜩 등장합니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가곡이 만들어지게 된 근원에 존재하는, 그것 자체는 제목을 갖지 않은 어느 회화 (해변에 사람이 있다, 라는 회화 작품으로, 항상 벽에 걸려있지만) 또한 <해변의 카프카>라는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단순히 이 작품의 제목으로만 쓰인게 아니라, 텍스트 속에, 그 말이 연달아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해변의 카프카>라는 서적의 '메타 제목' 같은 것이 되고 있습니다. <관능소설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능소설가>라는 소설을 '나'가 쓰고있다, 라는 것이 소설 속에 나오기 때문에, <관능소설가>라는 제목도 문장 속에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안나 카레리나>에는, 안나 카레리나라는 여주인공의 이름은 적혀 있지만, <안나 카레리나>라는 작품의 제목 자체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픽션으로서의 일반적인 자세입니다. 하지만 제목이 문장 속에서 고유명사로 등장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며, 근대소설의 역사엔, 제목 자체가 이미 텍스트 속에 편입되어 있는 작품이 있고, 그것이 실은 근대소설의 정도이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실은 일깨우지 않아도 다들 지식으로서 알고 있습니다만, 오에 겐자부로의 <우울한 얼굴의 아이>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우울한 얼굴의 기사騎士'라는 말을 약간 비틀면 '아이童子'가 됩니다. 영어의 경우라면 '기사'라는 단어와 '아이'라는 단어를 바꿔야 하지만, 일본어에선 음석적으로 그 관계가 긴밀하고, 기사의 '士'라는 글자 발음이 아이의 '子'와 비슷하기 때문에, '근대 소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돈키호테>를 연상하지 않고 읽을 수 없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 <돈키호테>라는 작품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냐 하면, 이미 <돈키호테>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이후에, 그것을 읽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돈키호테> 제 2부입니다. 그 2부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메타 제목'의 관계가 되고, <돈키호테>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런 이름의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이 또다시 <돈키호테>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실은 근대 소설에서도 있었으면서 왠지 모르게 잊혀져 있던 그 메타구조의 이중성이, 현대에서 고유명사의 기묘한 지각변동 속에서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관능소설가>에는 "연재 중인 <관능소설가>는 재미없어"라는 '독자의 반응'이 적혀져 있습니다만, 이미 중간까지 읽은 독자로부터 편지가 온다는 점에서, <돈키호테>적이기도 하며, 어딘가 오에 겐자부로 씨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에 겐자부로 씨의 (왜 '씨'를 붙이는 걸까요(웃음)), '오에 겐자부로'죠. 이 소설의 재미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경우 때때로 부족할지도 모르는, 어떤 운동감에 있습니다. <관능소설가>의 경우, 소세키가 나와도 '소세키다'라고 생각할 뿐이며, '소세키다운 몸짓'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추상적인 인물입니다. 오가이가 나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스스로 돈키호테에 동화되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고기토'는 돈키호테가 거대한 풍차에 맞선 것처럼, 다양한 운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물론 카프카 군도 신체적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땀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오에 씨의 경우는 (그냥 '오에 씨'라고 부를게요 (웃음)) 그렇지 않아요. '고기토'는 진정한 의미의 신체적 운동으로 돈키호테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체인지링>과 <우울한 얼굴의 아이>는 거의 2부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쩌면 3부작이 이후에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작품의 구성은 상당히 다릅니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화자'의 위치라는 부분에서도 꽤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체인지링>에서는 '치카시'라는 고기토의 아내로 시점이 완전히 이동해, '고기토'는 묘사되고, 이야기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말하자면 여성 소설같은 끝맺음을 보입니다. 아내의 오빠이자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영화감독이 자살했다. 그 시신이 집으로 돌아온다 해서 입회하러 가는 거죠. 실제로는 얼굴도 보지 않은 채로, 그가 집에 가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는 수많은 언론이 몰려와 다들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고, 그 중 한명이 고기토의 눈에 렌즈를 들이대고 맙니다. 그런 부분에서 웃으면 안될 지도 모르지만, 아무 말 없이 인파를 헤치고 눈에서 피를 흘리며 열차에 올라타 돌아오는 모습이 너무 재밌습니다. 거기서 둑이 터진 것처럼, 이 소설에는 신체적인 결손이 차례차례 더해집니다. 먼저 눈이 망가지죠. 중간에는 잘린 귀를 반쯤 고치기도 하고,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마지막엔 가상의 경찰대와 충돌해 빈사 상태로 병원에 입원합니다. 정신적인 문제를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육체에 연달아 상처를 입는 것이, 고기토의 특징인 겁니다. 그것도 엄청나게요. 불경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오랜만에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고 한밤 중에 폭소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아, 가족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왜 웃냐'고 묻길래 '오에를 읽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의미를 모르겠어'라고 들어서, 저는 크게 상처받았습니다...(웃음)


여기서 그 부분을 낭독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만, 전부 읽을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줄거리만 요약하면, 고기토는 어떤 물건을 찾으러 절에 갑니다. 그 물건은 본당 안쪽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발판 위에 그가 올라가, 멀리 있는 물건에 손을 뻗습니다. (...) 일단 손가락이 닿았지만 상자는 휙 돌아서 합판에, 먼 구석으로 미끄러졌습니다. 그것이 역시 근처의 칸막이 뿌리 쪽, 항아리나 화병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에 파동 효과를 줘 버렸습니다.


─이 부근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네요 (웃음)


고기토의 가슴 속에, 로즈 씨의 권유로 개정판 이와나미 문고로 읽고 있는 <돈키호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도망치지 마라"


─여기, 매우 웃겨요.


"비겁하고 비열한 악마들아, 너희들에게 맞서는 것은 단 한명의 기사뿐임을 알라."


─문득 떠올렸을 뿐인데,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을 하고 있네요.


그 때, 고기토는, 자신이 밟고 있는 평면이 앞으로 경사져 앞쪽 칸막이 자락으로 틈이 벌어지자 그곳을 향해 스스로 머리부터 강하하기로 판단했다.


─'판단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웃음) 다음은 고딕체로 쓰여 있네요.


우왓! 하고 고기토는 외쳤다. 쵸우코 선생이, 함성 소리를 냈다고, 주지스님의 부인이 지역신문 기자에게 증언해서, 그들의 기사가 방향성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나 외쳤는데 "될 것이다"라니.


내면은 공황상태였지만, 고기토의 신체는 착실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합판 칸막이를 밀어내자, 붙어 있던 판자와 함께, 밝은 공간으로 튀어나왔다.


─밝은 공간이라, 이것도 왠지 잘 모르겠네요.


순간 고기토는, 바로 눈 앞에, 회청색을 띤 하얀 자기 항아리가 나란히, 겹층으로 쌓여 있는 선반을 보았다.


─이건 항아리가 줄지어 있는 거군요.


다음 순간, 몸을 지탱하던 판자는 사라져 있었다.


─이것도 객관적인 묘사라는 점이 이상하네요. '사라져 있었다'라고 하는데, 자기가 떨어트린 거잖아요 (웃음)


고기토는 공간으로 밀려나 반회전하여 맞은편 선반의 항아리를 걷어차고, 머리부터 떨어졌다. 휘두른 양팔이 닿은 선반마다 항아리가 떨어져 부숴지며 소음 한복판으로... / 어깨와 옆머리를 바닥에 부딪혀 상부는 안정되었지만, 왼쪽 발목이 선반 기둥에 걸려 몸 전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깨진 항아리에서 뼈조각이 섞인 하얀 모래가 툭툭 떨어져,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다.


...등등 마지막에는 검은 물과 칠흑같은 괴물 선조가 나오는 등, 거의 슬랩스틱입니다. 이런 불균형한 신체 움직임의 묘사가 있기에 마음의 움직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신체적인 것'이 대단합니다. 이후, 숲 속에서는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귀가 잘린다든지, 마지막에는 신체적인 모험을 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저는 (불경스럽지만) '오에 겐자부로가 케리 그랜트다'라고 문득 생각해 버린 겁니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는 매우 재밌는 작품이라 꼭 읽어 보셨으면 좋겠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었느냐 하면 하드커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웃음). 저는 하드커버를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오늘 소개한 것은 대부분 하드커버인데, 보세요, 책은 이래야 한다고 해야 할 정도로 부드럽고, 그게 다른 작품에는 없는 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 부드러움 속에 고기토의 슬랩스틱 코디미라고밖에 할 수 없는 부조리한 분투가 그려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오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건 다른 기회로 넘기겠습니다.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오에 겐자부로를 연상시키는 고기토의 이 대투쟁은 할리우드의 2차대전 시기 대스타였던 케리 그랜트와 얼마나 닮았는지 (이것은 실증할 수 없고, 실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결론도 제 안에 있습니다만)를 지적하며,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케리 그랜트가 고군분투하는 작품 발췌를, 비디오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비디오를 볼 때, 케리 그랜트를 '고기토, 고기토, 고기토' 하고 생각하며 봅니다. 그 너머의 오에 씨를 떠올리며, 오에 씨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려 했는지, 그리고 거기서 고유명사의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등을 잊게 해주는 상쾌한 활극을 즐겨 주세요... 그렇다면 레오 맥캐리의 <이혼 소동>(1937),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1938), <몽키 비지니스>(1952), <나는 전쟁 신부>(1949) 네 편의 영화 발췌본을 연속으로 보시겠습니다만, 케리 그랜트가 혼자서 공중을 날고,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고, 절벽에서 미끄러지고, 물에 가라앉고, 건널목에서 넘어지고, 모텔 쓰레기통에 빠지는 장면이 연달아 나옵니다만, 각자를, 그 안경이 고기토의 안경이다, 혹은 오에 겐자부로의 안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분 정도면 끝날 것 같네요. 이쯤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오늘의 이야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