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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제출할꺼 고려해서 만들어서 약간 딱딱한건 이해해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방금 막 완독을 끝낸 것은 아니고, 읽은지 약 한 달은 지난 것 같다. 그 한 달의 시간동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음과 동시에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에 대한 생각을 곱씹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여전히 읽는 중이고, 데미안은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보다 먼저 읽었지만 아직 이렇다할 떠오르는 생각이 없기에 수레바퀴 아래서에 대한 독후감을 먼저 써내려간다. 완독 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마치 우릴 수 록 더 진한 맛이 나오는 사골처럼 더 곱씹을 수 록 더 깊은 생각이 나오기에 지금 시점에서 독후감을 쓰는 건은 어쩌면 전화위복이 아닐까라는 생각한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한스 기벤라트의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성공을 강요받은 기벤라트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헤르만 하일너라는 친구를 만나 점점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 모범생에서 불량아로 찍히고, 사실상 신학교에 퇴학당하다시피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기계공으로 취직하여, 기계공으로써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고된 노동 속에서 결국 물에 빠져 죽게-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서술상 밝혀지지는 않았다.-되는 한스의 길고도 짧은 삶을 보여준다.


 제목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수레바퀴’는 일종의 쳇바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신학교, 즉 공교육은 '교육받은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가치관을 주입받고, 같은 관점을 배워 사회에서 부품처럼 움직이도록 잘 훈련된 노동자를 찍어내는 것이다. 같은 공산품은 사용용도가 같듯, 같은 교육과 가치관, 관점을 공유하는 노동자들은 삶 또한 비슷하다. 태어나서, 교육을 주입받는 공장에 들어가 좋은 노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노동자가 되어 사회에서 부품처럼 돌아간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더 미시적으로 들어가 한사람 한사람 노동자의 삶을 보더라도, 그들의 삶자체도 수레바퀴를 쳇바퀴 돌듯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같은 교육을 매일 매일 주입받으며, 교육이 끝난 후에는 노동자로서 같은 노동을 기계처럼 반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을 결정한 권리조차도 없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은 그들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이 결정한다. 그리고 이조차도 수레바퀴와 일맥상통한다. 수레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수레에 연결된 말이나 수레를 끄는 사람이다. 수레바퀴는 오직 구르는 것만 할 수 있다.


 교육된 노동자는 수레바퀴 안에서 햄스터가 쳇바퀴를 뛰어다니며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는 것처럼, 열심히 수레바퀴 위를 뛰어다니며 수레바퀴가 앞으로 나가아갈 수 있도록 굴리는 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레바퀴 위를 뛰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공교육에서 시키는 대로, 선생님들이 시키는대로, 국가의 지도자들이 시키는데로, 열심히 수레바퀴 위-그들은 그것이 수레바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지만-를 열심히 뛰어다면 언제가 수레바퀴 위의, 수레바퀴의 방향을 결정하는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레 위에 앉아서 여유를 가지며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레바퀴에선 아무리 빨리, 열심히 뛰어도 제자리다. 그럼에도 그들은 뛰어야 한다. 아까 말했듯이 더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그것도 있지만 동시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수레의 거대한 수레바퀴 위에는 한 사람만 있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교육을 받고 쏟아져 나온 수많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속도를 늦춘다면 다른 노동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수레바퀴의 빠른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수레바퀴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수레바퀴는 하나가 아니다. '노동자 스스로가 살아가는 삶’이라는 수레바퀴 하나,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사회’라는 수레바퀴 하나, 이렇게 두 가지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다. 이 두 개의 수레바퀴 중, '몸을 담고 있는 사회’라는 수레바퀴는, 어렸을때는 '학교’라는 수레바퀴였으며, 나이가 들면, 학교라는 수레바퀴는 '사회’라는 수레바퀴로 커진다. 이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두가지 뿐이다. 죽거나, 수레바퀴 아래로 떨어지거나.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 속 신학교는 수레바퀴를 의미하며, 주인공인 한스는, 적어도 하일너와 급격히 가까워지기 전까지의 한스는, '수레바퀴 위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한스를 수레바퀴 아래로 떨어지게한 하일너는 '수레바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레바퀴 아래는 속도를 늦춰버린, 다시 말해 수레바퀴의 회전에 적응하지 못한 자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하일너는 그 예시이다. 그는 교육된 노동자를 찍어내는, 신학교라는 수레바퀴에 맞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선생을 비롯한 신학교의 인물 대부분과 갈등을 겪었다. 그가 너무나도 뛰어났든, 너무나도 모자랐든 간에 그는 신학교에 맞지 않는 존재였고, 그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수레바퀴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에 한스는 영향 받았다. 노동자가 수레바퀴 위를 뛰는데 있어서, 빨리 그리고 열심히 뛰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동시에 결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주변의 다른 노동자들을 보며,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을 무덤덤한 마음 또한 중요하다. 떨어져 나가는 그들에게서 죄악감을 느끼는 이는 더 이상 수레바퀴 위를 달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던함을 가지지 못한 한스는 힌딩거의 죽음을 통해서, 수레바퀴 아래서 떨어져 나가는 하일너에게 죄악감을 느꼈고-그것이 비록 하일너 스스로의 선택이라 한들, 그와 깊게 교감함과 동시에 그가 수레바퀴에 적응하지 못해 따돌림받았을때 그를 도와주지 못한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신학교의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일너와 어울리며 서서히 수레바퀴 아래로 떨어진다. 수레바퀴에 적응하여 노동자가 될 의지를 잃은 한스는 결국 하일너처럼 수레바퀴 아래로 떨어지게 되고, 수레바퀴의 아래서 기계공이 된다. 기계공이 된 한스는 기계공에게서 소속감을 느끼는데 이 또한 하나의 수레바퀴다. 수레바퀴 아래의 작고 초라한 수레바퀴. 마지막에, 한스는 기계공들의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서 아버지의 꾸중, 내일의 출근 등 닥쳐올 일에 머리 아파한다. 그리고 한스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에 빠져 죽는다. 서술상 그것이 타살이었는지 자살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자살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한스는 내일 다가올 일들에 대해 머리아파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추잡해졌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이 수레바퀴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여전히 기계공이라는, 작고 초라한 수레바퀴 위를 계속 뛰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 사실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수레바퀴에 대해서 깨닫는다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 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과도 같은 것이기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고작해야 순응하여 그 위를 뛰거나, 불응하여 그 아래로 떨어지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스의 끝을 통해 수레바퀴 아래에서조차 수레바퀴를 벗은 것이 아닌 더 작고 초라한 수레바퀴로 바뀔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한 우리는 영원히 수레바퀴 위를 뛸 수 밖에 없다. 그런 비관적인 사실에도, 우리는 이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교훈을 얻어갈 수 있는데, 바로 수레바퀴 위를 뛰면서도 나 자신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등등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며 내가 수레바퀴 위에 있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단지 그 위를 돌기만 하는' 존재가 되지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해석이 작가가 의도하는, 혹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주류 해석과는 동떨어져 있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는가이고 어떤 것을 얻어가는가이다. 아무리 주류해석이 나의 해석과 다르더라도 내가 주류 해석을 읽고도 책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주류해석에서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주류 해석과 비슷하게 해석했거나, 주류 해석을 읽고 그것에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나의 해석과 주류 해석,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관점이 담긴 다양한 것들을 얻어갈 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