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베버적(Weberian)"이라는 용어가 (그대로 혹은 약간 변경되어) 사용되는 방대한 조류의 사상과 현상을 나열함으로써 베버의 의의를 측정하려고 할 수 있다. "베버적"이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널리 사용된다. 먼저 사회적 삶과 역사 연구에 있어서 제도,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에 인과적 중요성과 자율성을 부여하는 접근 방식을 나타내기도 하고, 실증주의 사회과학과 상반되는 이해 또는 해석학적 탐구의 동의어로서 사용된다. 또한 근대의 합리화된 서구 사회 질서의 유형 및 이와 결합된 근대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주된 문제에 대한 이해가능성과 설명가능성의 차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분리해 사고하는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들의 일상 특히 경제생활에서 종교가 실천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국제 정치를 경쟁하는 이해관심들 또는 화해할 수 없는 "이상적인 이해관심들" 사이의 투쟁으로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게다가 책임과 양심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정치 윤리와 정치의 도덕을 판단하는 방식으로도 사용되고, 국가 자체가 합법적인 믿음에 ─ 때로는 위태롭게 ─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p.2-3
관료제적 메커니즘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거역할 수 없다.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빈틈 없는 행정,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해결책이 최상의 목적이자 유일한 목적이다. 그때 이러한 기반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직무상의 위계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어떤 기계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그리고 "영혼 없이" 이런 일들을 행한다.
관료제적 메커니즘의 기술적 우월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총체적인 관료제화와 합리화의 결과를 생각해보라. 이미 지금 전체 제조업 내에서 보면 사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다양한 경제적 기업에서 근대적 경영이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계산성(Rechenhaftigkeit), 즉 합리적 계산은 모든 단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합리적 계산에 의해 각 개인 노동자의 수행은 수치상으로 측정되고, 각 개인은 기계에서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가 된다. 그리고 노동자는 이를 알면서도 자신이 더 큰 톱니바퀴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만 집착한다. … 어넨가 세계가 그러한 작은 톱니바퀴, 즉 작은 일에 매달리면서 더 큰 일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작은 인간들로 채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면 훨씬 끔찍하다.
관료제에 대한 열망은 절망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하다. 이를 보면 정치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오직 두려움의 망령(the specter of timidity) - 어쨌든 이것은 늘 독일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대용물이었다 - 뿐인 듯하다. 마치 우리는 "질서"를, 오직 질서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런 사람은 마약 한 순간 동안이라도 이 질서가 흔들리면 초조해하고 겁먹게 될 것이며, 또한 만약 질서정연한 전체 조직에서 이탈하게 되면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의 분열로부터, 그리고 관료제적 삶의 방식의 이 궁극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이 관료제라는 기계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나는 단지 관료제를 절대적으로 우상화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p.79, 1909년 베버의 사회정책학회에서의 발언 中
'베버적'의 경제학적이 아닌 관료제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덕의 상실 읽어볼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