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제가 이번에 편지를 보내게된 이유는 사실 저의 실존적 관심사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부터 이 문제에 관해서 열정적인 관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것은 "죽음" 제가 당신을 처음 알게된 그 책에 관해서입니다.
제가 여기서 논하고 싶은것은 당신의 저서 죽음에서 다룬 잡다한 것들이 아닙니다. 분명 그런 것들은 직업 철학자들에게 아주 중요한것이며 분명 논의할 가치가 있겠지만 저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인간들의 가장 큰 공포인 죽음의 공포 그러니까 에피쿠로스의 주장의 실용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의 지성적인 확실성이나 철학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타당한지가 아닙니다.
저는 논리성이나 지적인 확실성의 부분에서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가장 합리적인 철학적 주장들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고민은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우리에게 감성적인 위로를 주는지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거나 아주 약화시키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과거부터 이 문제에 관해서 고민하고 걱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저에게 그 어떤 위로도 주지 않고 있음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그의 주장은 마치 이렇습니다. 과체중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너의 식욕에 대한 열망은 비합리적이야 너가 음식을 먹는 이유는 행복 때문인데 과식으로 인해서 너는 장기적으로 어마어마한 행복을 잃고 있어 그리고 그러니까 먹는다는 행위는 우리에게 행복을 줄 때에만 해야해 근데 너는 너무나 비합리적인 식욕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어 그러니까 너의 열망은 비합리적이야 내 주장을 들으니까 먹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지?"
그 말을 듣고 감정적인 위로를 얻고 그 욕망을 파괴해서 더이상 음식을 욕망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분명히 정상은 아닐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4가지로 구성되있습니다
1. 우리는 살고 싶다는 비합리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2.에피쿠로스는 이런 비합리적인 욕망을 합리적인 논증으로 제거할수 있다고 믿고 있다.
3.그러나 수많은 욕망들 성욕,식욕,수면욕 같은 것들이 합리적인 논증만으로 "제거"할수 있는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4. 만약 합리적인 논증이 비합리적인 욕망을 제거할수 없다면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죽음의 공포를 제거할수 없다
식욕의 제일큰 목적은 우리 몸의 존속과 건강입니다. 그러니 그 조언을 듣고 다이어트를 하는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근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설계됐습니다. 어떤 멍청이가 살인마가 자신을 죽일려고 뛰어오는것을 보고 도망가는데 자신이 살고 나서 얼마만큼의 행복을 얻을지 계산합니까? 우리는 흑인 노예들의 삶이 끔직하고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 흑인 노예가 자신을 죽이려는 살인마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와우 이제 해방이다! 날 죽여줘요! 라고 외칠까요? 아니면 꺄악! 살려줘! 라고 외칠까요? 정답은 살려줘! 이죠. 이런듯 우리의 몸은 생존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몸의 근원적인 목적이 살아남기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에피쿠로스가 이런식으로 생각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들한테 침대 아래에 괴물이 없다고 알려주면 무서움이 사라지듯 죽음도 마찬가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착각하는게 있는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아주 강력한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망의 목적은 존재하기 입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듯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난 당했을때 동료를 식인했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것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 공감까지 합니다.
사실 제 주장의 첫번째 가정인 생존할려는 열망이 존재한다는것이 논쟁의 여지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생존 본능은 존재할뿐만 아니라 너무나 강력하다는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죽음 심리학의 권위자인들인 sheldon Solomon, Jeff Greenberg, Tom Pyszczynski
교수들 또한 우리의 생존 본능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We may think we are afraid to die because our bodies will rot, stink, and turn to dust, because we will leave our loved ones behind, because we’ve left important things unaccomplished, or because we have the sneaking suspicion that no loving God awaits us, ready to enfold us in his arms. But underlying all these concerns is that fundamental biological imperative. As Juliane Koepcke and other survivors have discovered, we will do just about anything to stay alive."( on the pages 16 of the The Worm at the Core)
(우리는 생각할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체들이 썩고 문들어지다, 먼지로 변해서라고 아니면 우리가 아직 끝내지 못한 중요한것들을 남기고 가야 해서일것이다. 아니면 우리를 사랑하는 신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불안감 때문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려의 근저에는 근본적인 생물학적 의무가 있다. Juliane Koepcke와 다른 생존자들이 발견했듯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존재 해야 한다는 생명체들에게 의무에 가까운 생존 본능" 때문이며 죽음의 공포는 아주 강력하며
인간들의 비합리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본능이라고 생존 본능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심리학의 권위자인 권석만 서울대 교수 또한 그의 학술서 삶을 위한 죽음의 심리학에서 인간한테는 살고 싶다는 끝없는 열망이 있으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존재할려는 생명체의 본능적인 열망 자기 보존의 욕망 때문이라고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자살 심리학자의 권위자인 joiner 교수 또한 인간들의 살고 싶다는 욕망의 엄청난 강함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볼때 우리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보편적이며 확고부동하다는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금몬교에서 그리고 나이지리아 폭포에서 뛰어내릴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것에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다 자살자들의 마음속에는 동시에 삶을 욕망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on the pages 107 of myths about suicide Korean version)
이런 심리학자들의 증언들을 고려해볼때 우리에게 생존을 하겠다는 끝없는 존재하겠다는 비합리적인 열망이 있다는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이번엔 저의 두번째 가정에 대한 근거들에 대해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은 담배를 피면 자신의 인생이 끔직해지고 어마어마한 고통에 시달릴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담배를 피는것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것이 특이 사례 같다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러기에 자식에게 공부를 하라고 요구하죠. 그런데 우리가 잘알다시피 그들의 자식들은 대부분 공부를 하는것을 어마어마하게 싫어하고 쓸모도 없는 놀이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합니다. 그러기에 간혹 우리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소위 공부 의욕 촉진 비디오를 틀어주고는 합니다.
그 비디오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너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가 제일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될것이며 너의 꿈은 좌절될것이다. 너의 꿈은 일단 공부를 어느 정도 해야 가능성이 있을까 말까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남들을 압도할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너의 머리가 좋다고 자신하지 마라 그리고 생각해라 너가 낭비한 시간들을 말이다. 그 시간에 공부를 했다면 너는 너의 꿈을 이룰수 있었다." 그 비디오는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이치에 맞는 주장으로 학생들에게 공부에 대한 욕망을 증가시키며 놀려는 욕망을 없애는데 성공합니다. 근데 코미디는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비디오를 보고 10분 후면 그 비디오를 다시 봅니다. 왜냐하면 분명 완벽히 그 비디오의 주장(놀려는 열망의 비합리성과 공부가 가져올 장기적인 어마어마한 행복)에 설득됐지만 그들의 놀려는 욕망이 계속 그들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비디오에 완벽히 동의하면서도 20분 만에 비디오 게임을 하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만약 그런 설득으로 놀려는 욕망을 없애는데 성공한다면 분명 우리 교육자들은 거의 수고를 들이지 않고 우리 아이들을 천재로 만들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디오의 강연자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학생들은 공부를 않해요!"
어떤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필요가 어떤 합리적인 논증으로 해결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우리는 하지 말아야하는 수많은 합리적인 이유들을 완벽히 동의해도 멍청한일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그런 논증이 우리의 욕망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수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수백억 달러를 쓰지만 미국인들 과반수는 아직도 과체중이며 왜 수많은 우리의 학생들이 노는데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것일까요?
그것들이 미래의 것들보다 너 많은 행복을 주어서 그런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다이어트중 패스트푸드를 먹은것을 나중에 죽도록 후회하는것 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늙고나서 더 공부를 할걸 하고 후회 하는것일까요?그것들이 미래의 행복보다 더 많은 행복을 주었다면 이렇게 반응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죽음 심리학 권위자들인 sheldon Solomon, Jeff Greenberg, Tom Pyszczynski 교수들은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These are cogent arguments, worthy of serious consideration. However, Epicurean efforts to eliminate death anxiety on rational grounds have been spectacularly unsuccessful to date. People have not changed all that much in the last three thousand years; they remain steadfastly disinclined to die, and passionately devoted to acquiring literal and symbolic immortality. "(worm at core.229)
(이것들은 설득력 있는 논증들로서,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근거에서 죽음의 불안을 없애려는 에피쿠로스의 노력은 지금까지 극적이게 실패했다. 사람들은 지난 3천년 동안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죽기를 원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불멸과 상징적 불멸을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한다.)
이것은 좀 종교적인 이야기지만 불교에서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욕망하는것 자체가 고통을 더욱더 키운다고 생각하며 그 종교의 성직자들은 그것을 "지적인 면에서" 그리고 "감정적인"측면에서 모두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부처"는 역사시대에 한정한다면 단 1명 뿐입니다. 아니 불교의 성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도박.매춘,부정부패들을 하는것은 흔히 목격됨니다. 그리고 불교는 욕망을 끊는것을 "신적인" 영역이라고 간주합니다. 불교 스님들은 감정적인 측면 그리고 지적인 측면에서 "비합리적 욕망"들이 더 큰 고통을 주며 부질없음을 확신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독신으로 살며 모든 사회적 쾌락들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런 존재들조차도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며 그것을 한 사람을 "신적인 존재"라고 간주하며 그들의 종교에서도 역사시대에 한정한다면 석가모니 뿐입니다. 만약 합리적인 에피쿠로스 논증이 성공할수 있다면 왜? 불교의 성직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주장과 다르게 결정적으로 실패해온것일까요?
그리고 대부분의 불교 성직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주장과 다르게 순전한 "지적인" 지식이 욕망을 없애는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피쿠로스의 주장처럼 순전한 "지식"이 욕망을 없애게 할수 있다면 이 대단한 종교는 지금까지 헛고생을 한것일것입니다.
그리고 불교 성직자들이 왜? 비합리적인 욕망을 없애지 못하는지도 설명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욕망들이 비합리적이며 고통을 불러온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은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상태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https://www.matthieuricard.org/en/blog/posts/what-does-buddhism-mean-by-enlightenment)
만약 에피쿠로스 논증대로 사람들이 그저"합리"적인 논증을 통해서 비합리적인 욕망을 버릴수 있다면 저 불교라는 종교에서는 지금 부처가 적어도 수천만명은 넘을것입니다.
지적인 측면에서 그들이 멍청해서일까요? 제가 장담컨데 그들중 가장 낮은 수준의 수도자 라해도 죽음의 공포와 욕망추구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온전하고 지적인 논증을 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그들의 주장의 근원적인 가정이 맞다면 에피쿠로스의 논증처럼 아주 합리적인 논증이라고 저는 장담할수 있습니다. 비록 그 논증에 대한 비평가들의 관점에서는 틀린 논증일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의 논증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저속한 비유이지만 이 논증은 마치 이런것과 같습니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성기에 대한 어떤 컴플렉스가 있습니다. 자신의 길이나 둘레가 남보다 작은면 우리는 어떤 비합리적인 어떤 강한 열등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어떤면에서 큰 성기에 대한 병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우리의 이런 열등감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성기의 크기는 성적 만족도와 거의 관련이 없다는 통계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컴플렉스의 아킬레스건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것이 그런 합리적인 논변으로 극복된다면 장담컨데 포르노 배우들의 성기는 분명히 작았을 것입니다.
평범한 남자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맞는 말이야 근데 내 것이 옆에 있는 것보다는 크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고매한 성직자들조차도 이르지 못한 경지를 실천적이며 실용적이라고 부를수 있을까요?
저의 두번째 가정은 확실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가정이 틀리고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오직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놀겠다는 욕망을 없애게 할수 있을것이며 오직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비합리적인 식욕을 없애서 다이어트에 성공할것이며 오직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날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절대로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욕망을 없애게 할수 없다는것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 가정이 틀리다면 우리 세상은 너무나 다른 세상일것이며 해명할수 없는것들 투성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의 지지자들은 이런 반론을 제시할수 있을것입니다.
1.어떤 욕망은 합리적인 이유로 없애게할수 있다.
저는 만약 에피쿠로스 지지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어떤 욕망은 없앨수도 있겠지만 근원적인 욕망 인간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은 없애게 할수 없을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런 욕망들 또한 없애게 한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겠습니까? 우리가 왜? 공부와 오락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왜? 다이어트에 늘 실패하는것일까요?
오직 합리적인 이유로 다이어트나 공부할때 어떤 내적 갈등도 없었다고 진술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병자거나 최악의 거짓말쟁이 일것입니다.
누구도 오직 합리적인 논증으로 동물적이며 본능적인 욕망들을 없애게 할수 있다고 주장할수는 없을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얻은 경험들에게 정면으로 반하는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동물적인 욕망을 합리적인 논증으로 없애게 할수 없다는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기에 앞에서 죽음 심리학 권위자 솔로몬 교수가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결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말하는것입니다. 그들 또한 이런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론을 제시할수도 있습니다.
2. 생존 욕망은 동물적인 근원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동물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욕망의 목적이자 가장 강력한 욕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생존 욕구가 그런 욕망일것이라는것은 너무나 자명해보입니다.
이 주장은 또한 앞에서 인용했던 죽음 심리학자 솔로몬 교수의 주장이 이것을 지지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욕망이 동물적인 욕망이 아니라면 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그 투쟁들은
예를 들어서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기 위한 그 추격전 같은 것들이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까?
모든 생물들이 자기보전의 본능이 있다는것은 제가 알기로 생물학계에서는 거의 상식일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동물적인 욕망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들의 "고상한" 사유에서 나온것이라는 것일까요? 우리의 사회적인 욕망일까요? 아니면 자아실현의 욕망인것일까요?
이 욕망을 어떻게 분류해야할까요? 이 욕망은 도데체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해야겠습니까?
제 생각에 가장 그럴듯한 카테고리는 동물적인 생리적 욕구일것입니다.
다른 모든 카테고리는 이것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maslow의 Need Hierarchy Theory에서도 가장 아래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그러니 "개체"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한 욕구가 가장 원초적이며 동물적인 욕구라고 설명합니다.
합리적인 논증이 욕망을 통제할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문제는 그런 통제는 욕망의 강력함에 따라서 무력해지기 쉬워 보인다는것 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식욕을 억제하고 일시적으로 수면욕을 억제하고 일시적으로 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할수 있다. 근데 이런 억제가 과연 욕망을 제거한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담배나 마약을 완전하게 끊는 사람을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담배를 끊는것이 분명 합리적인 논증의 도움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담배를 끊게 만드는 요소의 대부분이라면 세상은 정말로 편할것이다. 담배를 끊게 만드는건 결과적으로 정신력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담배를 끊는다. 그러나 문제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것은 담배를 끊는것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식욕 수면욕 같은 아주 강한 욕망들 조차도 근본적으로 생존 욕망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생존 본능을 극복하는것이 참담할정도로 어렵다는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이 난파되어 식량이 다떨어졌고 3주일을 굶었는데 어떤 합리적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가정합시다 "지금 우리중 한명을 잡아먹는다고 해도 며칠을 더 살뿐이야 그리고 난파된 배에서 오래 살아봤자 행복할까? 너도 알다시피 이 난파선에서의 삶은 지옥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지 말고 신사답게 굶어죽자 그게 더 합리적이야" 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난파된 배에서 식인 행위가 일어나는것을 막을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의 제안처럼 할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성자이거나 부처일것입니다. 삶을 포기한 자살자들조차도 삶에 대한 애착이 남아서 완전히 자신의 인생을 끝내기로 결심해서 금문교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인터뷰하면 대부분 떨어지고 나서 엄청나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삶을 거의 채념한 자들조차도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과연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thomas joiner 교수가 그의 저서인 myths about suicide 에서 언급하길 어떤 불행에 빠진 인간이 오직 합리적인 이유로 자신의 불행과 행복을 저울질해서 자살하는 사람은 있기 힘들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죽기 위해서는 미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은 불행하다고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견딜수 없을때 자살합니다.
이건 같은것 같지만 다릅니다. 어떤이 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지독하게 불행해도 묵묵하게 살아가는 방면 어떤이는 자신의 인생이 평범하거나 오히려 좋아도 정신병적 문제가 생기면 자살을 선택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싱가폴의 어떤 소녀가 자살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자살을 한 이유는 불행에 빠져서라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아동학대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장을 읽어보면 그녀의 자살 동기는 삶의 "객관적인 불행"이 아닌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비관과 자신의 성적인 취향과 그리고 자신의 학교 성적의 부진이 그녀의 자살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자살은 정말로 비극적이며 가슴 아픈 일지지만 객관적으로 볼때 합리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그녀의 걱정들 대부분은 사춘기적 망상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저소득층 아이가 그녀를 본다면 심각한 멍청이라고 느낄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은 자살 심리학자들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습니다.(Suicidal: Why We Kill Ourselves by Jesse Bering 116~145)
그녀의 자살은 왜? 많은 부잣집 아이들과 유명인사들이 비합리적인 자살을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왜? 수많은 객관적인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해명할수 있게 도와줍니다.
자살 심리학자들은 인간들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심리적 고통 때문에 죽는다고 주장합니다.
자살 심리학계의 권위자 Shneidman 교수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가 육체적 고통을 논하는 주된 목적은 육체에 속한 종류의 고통은 자살 대부분에 함축되어 있는 고통이 "아님"을 확실히 하려는데 있다.지금 우리를 자살로 이끌어가는 고통은 심리적 고통 또는 정신통과 연관이 있다."(The Suicidal Mind KOREAN VERSION 32~33 )
이것은 인간들의 자살은 "합리적인 행복량"하고 상반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합리적인 고통 때문에 자살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유슈비츠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자살했을것이라고 예측할수 있지만 놀랍게도 아유슈비츠의 자살률은 현저히 낮았다는 것이 이것을 더욱더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자살의 원인은 소속감의 부재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감각등이 자살의 근본적인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It’s compellingly pragmatic advice. More than that, however, it’s supported by empirical evidence. When we feel needed, we’re less likely to take our lives. This may help us to understand the counter- intuitive but well-known finding that suicide rates tend to plummet during wartime, when there’s a shift in the cultural focus away from individual differences and toward the unification of in-group mem- bers. A similar precipitous drop in America’s suicide rates occurred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events such as John F. Kennedy’s assassination, the Challenger space shuttle explosion, and the 9/11 attacks. This effect of group cohesion has even been used to explain why the suicide rate was lower than one would expect among those imprisoned in concentration camps during the Holocaust)(Suicidal: Why We Kill Ourselves by Jesse Bering 79)
(그것은 매우 실용적인 조언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것은 경험적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빼앗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차이에서 벗어나 집단 내 구성원들의 통일 쪽으로 문화적 초점이 이동하면서 전쟁 중에 자살률이 급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반직관적이지만 잘 알려진 발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케네디 암살 같은 사건 직후 미국의 자살률도 급감했다. 케네디의 암살,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그리고 9/11 테러. 집단 결속의 이러한 효과는 홀로코스트 동안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자살률이 예상했던 것보다 낮았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만약 자살자들이 합리적인 불행과 행복 때문에 죽는것이라면 아유슈비츠 유대인들의 이런 행동들과 비상사태때 자살률이 감소하는것을 설명할수 없을것입니다.
또한 자살학 권위자 Thomas joiner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또한 합리적인 자살에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흔히들 말하는 이성적 자살 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자살하는 사람들이"이성적"인 경우는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myths about suicide korean version 290)
그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자살은 죽음에 대한 학습된 무감각이 오래 지속되어 두가지 심리 상태와 결합할때 나타는 결과이다.
1.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심리...2. 다른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소외됐다는 심리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myths about suicide korean vesion 290)
그는 자살의 원인은 합리적인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고통 그러니 비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또한 "클렉클리 사이코패스들"처럼 가장 이기적인 사이코패스들은 자살을 하지 않으며 한다해도 그것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이 없음에도 하는 기만적인 자살만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할 당시 자살 위험을 보이던 330명중에서 우리는 자살 기도 점수가 높지만 자살 욕망 점수가 낮은 사람들을 찾아보았다.과연 320명중에 10명 즉 2.5%가 이런 정의에 부합했다...우리는 이 집단의 특징이나 임상적 증상에 맞쳐 파악할려 했다.여러 변수에 비추어 이 집단을 다른 집단과 비교해보니 수수께끼가 해결되었다.자살을 기도하면서 자살을 욕망하지 않는 집단은 자기애적 성향과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특징을 보였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죽을 생각 없이 자살을 기도하는 "클렉클리 사이코패스"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목적은...다른 사람들을 속아 넘기기 위해서였다. 이런 결과는 클렉클리의 에상에 정확히 일치한다. "클렉클리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범죄에서 관심을 돌리거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등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절대 자살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myths about suicide korean vesion 88)
사이코패스들이 자살을 욕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생각이 없다는것이고 그럼에도 자살을 시도한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기만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사람들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면 그들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불행에빠질때 자살하는것이라면 그러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살하는것이라면 저 이기적인 사이코패스들의 자살률이 일반인들보다 더 높아야하며 그들이 더욱더 자살을 욕망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더욱더 자살의 목적이 이기적인 자신의 객관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다는것을 더욱더 부정합니다. 만약 자살이 이기적인 자신의 객관적인 행복의 증진을 위해서 일어날수 있다면 사이코패스들이 자살할 의사가 거의 없다는것은 모순적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정신통 그러니까 자존감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짐이 되는 의식 때문이지 객관적인 고통 같은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죽는게 아니라는것입니다.
인간은 고통 때문에 죽습니다. 그것을 심리적 고통이라고 Shneidman 교수를 비롯한 자살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는 대표적인 심리적 고통의 원인들로 소속의 욕구의 좌절,공격받은 자아상과 수치,중요한 관계의 단절, 등이 심리적 고통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존감 그리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느낌등이 좌절되고 파괴되고 자신에게 치명상을 가할수 있는 능력이 결합되어야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는것입니다. joiner 교수는 이것들을 1.짐이되는 느낌 2.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소외됐다고 느끼는 느낌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논증은 북한 사람들의 자살률이 왜? 극단적으로 높지 않은지 같은것들을 설명할수 있습니다. 자살심리학자들은 인간들이 객관적으로 측정될수 있고 물질적인 쾌락이 아닌 주관적인 이 정신통 때문에 인간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살자들 대부분이 과거에 유복한 상태였음을 해명할수 있었습니다.
"One of the more surprising things about suicide is that most people who kill themselves have actually lived better-than-average lives. When we get a little too accustomed to uneventful and pleasant conditions, warns Roy, a sudden, precipitous drop in our standard of living can dangerously disorient us. It’s the law of social gravity: Compared to the guy who’s been living his whole life down there, hitting rock bottom is going to hurt a lot more for the person taking a tumble off the side of a mountain. We’re all downwardly mobile to some extent, but it’s the magnitude of the discrepancy between our personal standards and our current life situation that plays a role in the presuicidal process. An experience that to many of us wouldn’t seem so bad, or at least certainly not something to end one’s life over, to others makes for an unlivable existence. This is because that indi- vidual has unrealistic—or unsustainable—criteria for their success."(Suicidal: Why We Kill Ourselves by Jesse Bering104)
(자살에 대해 더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자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평균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평온하고 쾌적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면, 갑작스럽고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은 우리를 위험할 정도로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고 로이는 경고한다. 그것은 사회적 중력의 법칙이다. 저 아래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 비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람에게 훨씬 더 아플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하향 이동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개인적 기준과 현재 생활 상황 사이의 불일치의 크기가 사전 살상 과정에 역할을 합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적어도 한 사람의 인생을 끝낼 어떤 것이 아닌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살수 없는것이 된다. 이는 그 개인이 자신의 성공에 대한 비현실적이거나 지속 불가능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oy amassed a mountain of epidemiological data to support the claim that suicidal thinking is precipitated by events that fall short of high standards and expec- tations.* Sometimes, as in Vickerman’s case, these expectations are owed to our own past achievements, but they can also be the result of what Roy refers to as “chronically favorable circumstances.” Simply being poor isn’t a risk factor for suicide. But going suddenly from rel- ative prosperity to poverty is. Likewise, being a lifelong single person isn’t a risk factor, but the abrupt shift from being married to being single places one at significant risk of suicide. Most suicides in jails and mental hospitals occur within the first month of confinement, during the person’s initial adjustment to this sterile new existence.
Dealing with unreasonable or impossible external demands can be our downfall as well. When others place their trust in us in ways that are overwhelming, the fear of letting them down can be crush- ing. This may be one reason why students who take their own lives often have a glowing record of academic achievement and parents with high expectations, but in the semester preceding their suicides, their grades fall."
(로이는 자살 사고가 높은 기준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건들에 의해 촉발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산더미 같은 역학 자료를 모았다.때로는 빅커맨의 경우처럼 이러한 기대는 우리 자신의 과거 업적 덕분일 때도 있지만, 로이가 말하는 '고질적으로 유리한 상황'의 결과일 수도 있다. 단순히 가난하다는 것은 자살의 위험 요인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번영에서 갑자기 빈곤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평생 독신으로 사는 것은 위험 요소가 아니지만 결혼에서 독신으로 갑자기 바뀌는 것은 자살의 위험이 크다. 정신병원과 감옥에서의 대부분의 자살은 수감된 지 1개월 이내에 발생하며, 그들이 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할때 말이다.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외부의 요구에 대처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몰락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신뢰를 둘 때,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참담할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종종 아주 훌륭한 학업 성취도를 가지는것과 그들의 학부모들의 기대가 큰것도 것도 이런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들이 자살하기 직전 학기에서 그들의 성적은 떨어진다.)
(105,106Suicidal: Why We Kill Ourselves by Jesse Bering)
단순히 가난한것은 자살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자살은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에 맞지 않은 상황에 처할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원래부터 심각하게 불행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그 이유만으로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실 에피쿠로스의 지지자들의 생각처럼 자살이 객관적인 행복 때문에 일어난다면 지금 착취당하고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 사람들이 왜? 집단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들은 진정 불행에 극한에 있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또한 자살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자살을 할때 정신이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약간의 정신병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심리학자 Bering은 자살 심리학자인 baumeister 교수의 자살 심리의 6단계 이론을 설명하면서 자살자들의 상태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The most important point to stress with regards to this fourth step is that the majority of suicides are driven by a need to escape from immense and ongoing negative affect (that aptly named “psychache,” if you recall). They do not follow a cool-headed stream of Socratic dialogue. A suicidal person doesn’t idly contemplate “to be, or not to be,” nor do they ask, as someone once falsely accused Camus of writing, “Should I kill myself, or have a cup of coffee?” When some- one you care about is in this state, trying to use reason and logic with them can be as useful as advising a person with a compound fracture of the leg to just walk it off, or telling a schizophrenic patient that it’s all just in their head.
For the truly suicidal, consciousness is incapacitating.](Suicidal: Why We Kill Ourselves by Jesse Bering108)
(이 네 번째 단계와 관련하여 강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자살의 대부분이 거대하고 지속적인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적절한 이름으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서) 탈출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냉철한 소크라테스식 대화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자살한 사람은 한가하게 "죽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를 생각지도 않고, 누군가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인가, 아니면 커피 한잔을 마실 것인가"라고 쓴 카뮈 처럼 묻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누군가가 이 상태에 있을 때, 그 사람들에게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라고 말하는것은 다리에 복합 골절이 있는 사람에게 그냥 걷으라고 충고하거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 모든 것이 그들의 머리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유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자살하는 자의 의식은 제정신이 아니다.)
[As a result of being in a cognitively deconstructed state, these barriers collapse one by one. The suicidal individual’s capacity for meaningful thought is impaired; with a drone-like focus on concrete details, abstract thinking that would normally generate spiritual or other protective ideas about, say, finding hidden purpose in suffering are alarmingly absent. Shneidman once remarked that “the single most dangerous word in all of suicidology is the four-letter word only.” Those who are intent on taking their lives, in other words, have entered a mode of dichotomous thinking characterized by all- or-nothing reasoning. The situation has become black-and-white; there’s no metaphysical subtlety, only life-or-death.](Suicidal: Why We Kill Ourselves by Jesse Bering 112~113)
(인지적으로 해체된 상태에 있는 결과, 이 장벽들은 하나씩 무너진다. 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살자의 능력은 손상된다;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윙윙거리는 초점을 맞추면, 고통에서 숨겨진 목적을 찾는 것에 대한 영적 또는 다른 보호적인 생각을 보통 만들어낼 추상적인 사고는 놀라울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슈나이드만은 "모든 자살학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는 오직 네 글자로 된 단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 전부 또는 아무것도 아닌 추론을 특징으로 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돌입했다. 상황이 흑백으로 변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교묘함은 없고 오직 생사를 가를 뿐입니다.)
진정한 자살자들은 합리적인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고통이 행복을 능가했음을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신적 붕괴 그러니까 약간 미쳐 있어야 죽을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살자들의 유서를 읽거나 들어보면 문학적 사고나 철학적 사고 등등 복잡한 사고들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건조한 "영수증" 같은 분위기를 품기는 이유입니다. 자살자들은 복잡한 사고가 거의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Thomas joiner 교수 또한 합리적인 자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것입니다. 인간들은 합리적인 이유로 죽지 않습니다. 적어도 대부분은 정신이 약간이라도 망가져야 자살을 선택합니다.
Thomas joiner 교수는 모든 자살자들은 정신병자라고 단언합니다.
"현재 증명된바에 따르면 자살한 사람들의 95%가 자살할 당시 진단 가능한 정신병을 가진것으로 조사됐다.개인적으로 필자는 95%의 비율도 과소평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비율이 실제로는 100%달할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살할 당시 분명한 정신병의 징후를 가지지 못한 5%의 사람들도 잠재적인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을것이다."
(myths about suicide korean vesion 146)
비록 모든 자살자들이 정신분열증 같은 중증의 정신병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그들은 어느정도 미쳐있다고 joiner 교수는 주장합니다.
만약 자살이 미쳐야만 가능하다면 자살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주장대로 합리적인 자살이 불가능 하거나 극히 드물다면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실용성을 가질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큰 문제가 아닐수 있습니다. 원래 철학적 이론들이나 과학적 이론들은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시간여행을 할수 없지만 "이론적"으론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것은 우리에게 큰 진리를 깨닫개 해주기에 의미가 있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주장의 제일큰 문제점이라면 이 주장은 "치료제" 이고 실용성이 있는 "권고 사항"이라는 점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인간의 죽음 공포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죽음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고안 됐습니다. 그러니 이 논증은 일종의 해독제인 것이죠.
해독제는 효과가 있어야 합니다. 효과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종의 말장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주장의 "논리적" 합리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에피쿠로스 주장의 실천적인 실패를 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치료제의 효력을 증명하는 수많은 전문적인 인증서가 있다해도 환자에게 효력이 없다면 그것은 사이비 과학에서 만들어진 치료제들 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치료제는 그 치료제의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효력이 아닌 실제적인 효력으로 평가 받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암 치료제들이 나오고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 아주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논거들을 통해서 자신이 치료제임을 어필하지만 그들중 대부분은 그런 합리적인 사유들이 있음에도 효력이 없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가짜 치료제가 될뿐인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생각은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우리를 돕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저의 주장은 우리가 완벽히 논리적이게 우리가 욕망을 추구할 필요가 없음을 증명한다해도 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경험으로 입증되었습니다.우리는 어무나 잘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여러 욕망들이 우리에게 더 많은 행복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불행을 준다해도 우리는 그 욕망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주장들이 이 죽음의 공포를 없앨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오직 삶의 열망을 없애야만 파괴할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각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책 이야기 ㅇㄷ? - dc App
그게 책이야기긴함
책이 철학책이고 나는 거기에 나온 에피쿠로스 논증을 읽고 편지를 쓴거니까
뭐랄까 해리포터 읽고 작가한테 캐릭터 설정 질문한 갈데까지 깐 설덕같은거라고 생각하셈
사실 아직 안읽어봐서 그랬어요 잘 읽어볼께요 헤헤 - dc App
그래서무슨책임
How to Be an Epicurean: The Ancient Art of Living Well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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