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실질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게 무엇일까요? 너무 작고 희극적인 어떤 것이지만 유일무이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내게 더는 세상에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장 단순한 일상적인 것들과 관련해 흥미를 잃었습니다. ...내가 정말 결여하고 있는 것은 '자연적 자명성'입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아이가 갖추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삶을 영위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타인과 함께 존재하고, 게임의 규칙들을 아는 데 필요한 가장 단순한 것들입니다."
-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에서, 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인터뷰 중
미셸 푸코의 고고학으로 본 비트겐슈타인
- "수학철학의 마찰"과 인류학에 대한 소리없는 아우성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을 설명하려는 글을 쓰려고 한다.
글을 쓸 때 독자가 누구인지를 가정하라고 하는데, 이 글은 아무리 생각해도 독자층이 한정되게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다.
1.푸코의 에피스테메
1-1.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의 어려움
푸코의 “말과 사물”은 현재 철학에서 그다지 큰 영향을 주고 있지 않는 책이다.
분석철학이나, 역사학계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책이다.
푸코가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비판받는것은, 푸코의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의 방법론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보통 실증적 증거만을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는 학파와 증거를 포함에 그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파로 나뉘는 편이다. 이에 반해 푸코는 이 책에서 역사적 사료를 증거로, 해석의 이유로도 쓰지 않고, 자기 이론을 그려보이고 난 뒤 나온 부분적 사례 정도로 두고 있다.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이런 행동을 대담한 접근이란 말로 치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분적인 사례들로서도 비판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 또한 다루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굉장히 잘 알려진 코페르니쿠스가 나오지 않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미셸 푸코의 르네상스 시기의 과학에 대한 주장과 충돌하는 듯이 보인다.
한 학자는 스콜라 철학의 논리성과 합리성을 통해 미셸 푸코의 이론의 문제점을 보이기도 했고, 이 사례도 꽤 정당해 보인다.
푸코는 이 책에서 라마르크와 퀴비에에 대해 퀴비에의 이론은 틀렸지만 그 기반이 되는 사상은 그 시대상에 알맞은 것이라는 논란이 깊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푸코는 이 책의 끝부분에서 다른 철학자들을 비판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이것이 빈약하다는 주장 또한 있었다.
푸코는 예를 들어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를 비판하려는 듯한 글을 썼으나, 푸코의 논증을 살펴보면 푸코가 한 일은 퐁티의 철학 내용이 가진 문제의식이 사실 현재 시대의 인식과 관점의 측면에서 첨예화되고 문젯거리가 되게끔 구성되었다는 “비판”보다 “서술”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변론을 해보자면, 이러한 서술 또한 자신이 초-역사적인 철학을 하고 있다는 철학자에게는 비판으로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해 두고 푸코의 이론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했으면 한다.
1-2. 말과 사물에 대한 극도로 불안정적인 설명
여기에서 나는 말과 사물에 대한 극도로 불안정적인 설명을 진행하겠다.
말과 사물의 가장 중요한 논지는 자기가 초역사적이라는 소박함에 대한 비판이다.
말과 사물은 처음 서문에서 보르헤스를 언급하며 시작된다.
보르헤스는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라는 픽션에서 중국의 한 백과사전은 이런 분류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a) 황제에 예속된 동물들 b) 박제된 동물들 c) 훈련된 동물들 d) 돼지들 e)인어들 f) 전설의 동물들 g) 떠돌이 개들 h) 이 분류 항목에 포함된 동물들 i) 미친 듯이 날뛰는 동물들..."
이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푸코는 우리 사상 체계의 역사에 있어 진짜로 웃음을 자아내게끔 생각한 시대도 있었고, 그때 그 사람들은 그 경우를 평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사람들의 관점이 변화하는 데에는 시대적인 큰 절단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시대의 근본적 관점을 "에피스테메"라고 한다. 쿤의 "패러다임"과 비슷하지만, 패러다임은 물리학에 한정된 반면 에피스테메는 아직 그만큼 명확하지 않은 인간과학을 다룬다.
미셸 푸코가 생각해둔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사물의 질서"였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본 사물의 질서 관점의 변화"라 생각하면 좋다.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셋으로 나눈다. 르네상스 에피스테메, 고전시대 에피스테메, 근대 에피스테메다.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에서는 유사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을 전개했고, 이에 대한 설명은 내 능력의 부족으로 힘든 것 같다.
고전시대 에피스테메에서는 마테시스와 탁시노미아라는 개념을 다룬다.
마테시스는 세상의 단순한 사물에 대해 수학적인 처리를 할 수 있는 분석을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탁시노미아는 세상의 복잡한 자연에 대해 체계적인 배열을 해서 질서를 보이게 하는, 경험적이고 비수학적인, 다른 하나의 방법론이다.
한 예로, 탁시노미아의 대표적인 예시가 린네의 생물 분류 체계이다.
이 둘은 서로 교류하고, 둘 다 그 개념을 쓰기 위해 "재현"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푸코는 경제학, 생물학, 언어학의 역사와 그 당시의 관념에 집중했고, 고전 시대에는 이 마테시스와 탁시노미아가 쓰였음을 보인다.
경제학은 마테시스를 주로, 생물학은 탁시노미아가 주로, 언어학은 둘 다 주로 쓰여졌다.
생물학에서 린네의 분석은 기호를 동일성과 차이로 구분하면서, 생물을 유기적 통일체로 보려고 하지 않고 가시적이고 표면적으로라도 분석이라는 태도를 처음 실행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형식과 구조라는 면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종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방법론이라는 개념을 생물학에 처음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그러나 현재 사변적인 면이 있었다. 그들의 체계에는 "자연의 연속성"이라는 숨겨진 전제가 있다는 것이 한 예다.
경제학에서는 마테시스 개념이 형성됨으로서 화폐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있었다.
푸코는 여기서 화폐에 대한 탐구가 재현에 의해 한정되어 있음을 주목했다.
경제학의 역사에서는 "대논쟁"이라고 불리는 고전 시대의 부의 분석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중농주의로, 사물의 가치는 땅에서 발생하므로 땅이 상품의 잉여를 생산한다는 이론이다.
하나는 공리주의로, 사물의 가치는 인간의 필요로부터 출발하며 교환과정이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푸코는 이 논쟁이 자신의 이론을 잘 드러난다고 했고, 둘이 사실 같은 근거 안에서 이 논의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화폐를 표상으로 보아서, 화폐가 "교환"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상품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가지지 않았고, 이 논쟁은 표면적인 불일치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언어학에서는 일반 문법이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마테시스와 탁시노미아가 역할을 같이 담당했다고 말한다.
고전시대 언어학에는 속성, 분절, 지시, 파생이라는 4가지 역할이 있었다.
여기서 속성, 지시는 마테시스적인 대상에서 역할을 하고, 분절과 파생은 탁시노미아적 대상에서 역할을 했다.
이것은 서로 상호작용으로 진행되었고, 언어는 고전시대 에피스테메에서 재현과 가장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 고전 에피스테메의 기반이 된 재현이 한계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에피스테메의 한계와 변화가 나오는 방식을 푸코는 설명한다.
생물학에서는 진화론의 탄생과 해부학의 발전으로 그 예를 들 수 있다.
고전시기에는 린네의 생물 분류 체계는 표식을 넘어서 하나의 사유 도구였으나, 근대시대 생물학자들은 그 한계를 자각한 것이다.
진화론과 해부학 등으로 인해 "숨겨진 재현"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의 표면적 접근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사유에 대해서 더욱 복잡한 방식을 택하려 든 것이다.
(사실 푸코는 이 책에서 다윈을 언급하기보다 라마르크와 그 전의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들을 추적하는 편이다. 푸코는 라마르크조차도 전시대적 관점을 가졌다는 입장을 취하고 대신 퀴비에의 이론이 비록 틀린 이론이나 자연의 연속성에 대한 확고한 부정 등으로 그 이 재현의 한계를 더 잘 포착했다는 다소 논란이 있는 입장을 펼쳤다.)
푸코는 또한 경제학에서 숨겨진 재현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푸코는 가치의 근원을 표상으로서의 연결로 보지 않고 오직 노동의 생산성에 집중하게끔 단절이 된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에 주목한다.
애덤 스미스에 들어서서 노동의 양이란 말이 중요해지게 되었으며, 애덤 스미스는 더 이상 노동의 가치가 노동에 쓰이는 도구와 욕구 등에 교환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리카도는 노동이 가치의 중요점을 넘어서서 가치가 나오는 유일한 원천으로 본다. 가치는 더 이상 땅이나 사물에 있지 않고 노동에 있고, 노동 그 자체의 탐구, 즉 노동의 도구, 노동분화 체계, 이에 쓰인 자본의 양에 집중한다. 이는 근원적으로 인간성과 인간의 역할이라는 위치가 중요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경제학자들이 "소외" 등의 개념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설명한다.
언어학 또한 단절이 일어났으나, 이는 뒤 글에서 언급하겠다.
이 재현과 표상의 한계에 있어서 또다른 대안과 개념의 모임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는 학문에서 이러한 표면적 재현을 거부하면서 비판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그 비판의 기반과 근거를 마련해주는 실증주의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마지막 하나는 이런 비판과 실증주의에도 불구하고 정반대로 경험의 기반을 위한 “인식 조건” 이나 “선험”을 다루는 상호 연관이 일어나, 한 형태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이 다른 둘과 묶이게 되었다.
이렇게 비판, 실증주의, 형이상학이 묶인 것을 근대 에피스테메라고 부르게 된다.
이를 통해 선험적-경험적 이중체라는 체계가 철학에서 중요해지게 되었고, 현상학이라는 분야가 주목받게 된 이유라고 말한다.
푸코는 또한 이 에피스테메에서도 하나의 긴장이 있다고 말한다. 선험의 축을 담당하는 심리학과 정신분석 등의 인간과학은 인간의 유한성을 중요시하지만, 경험의 축을 담당하는 과학과 논리학은 이 광대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한 형태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려고 한다. 푸코는 유한성과 형이상학이라는 이 둘의 충돌을 평하며 근대 에피스테메에 또다른 한계가 왔다는 암시를 보인다.
1-3. 현대의 르네상스인
푸코는 이런 인간과학과 철학에 대해 근대 에피스테메의 한계를 알아챈 사람이 있다고 보고, 그런 예로 니체를 예시로 든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근대 에피스테메의 한계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그 전의 에피스테메의 이론을 다시 따와서 제시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슈펭글러를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그의 철학은 요약해서 말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희귀한 형태의 철학적 서술을 진행했으나, 그의 모티브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느 정도의 명백한 설명이 가능하다. 슈펭글러는 자신의 역사 분석은 아주 명백하게 괴테의 형태학에서 따와 그 철학을 본받아 역사를 소묘했다고 말했으며, 괴테의 생물철학이 가장 크게 겨냥하고 있던 인물은 바로 탁시노미아 유리베르살리스를 주창한 린네였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 그를 르네상스 에피스테메로 돌아가려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굉장히 도드라지는 것이 발터 벤야민이다. 내가 보기에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나온 “인식비판적 서론”만큼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적인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또 없는 것 같다. 만일 발터 벤야민에 익숙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철학으로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에 대해 인지했으면 한다.
2. 분석철학에 에피스테메 적용하기
“말과 사물”이란 책에는 분석철학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다시피하지만, 이에 대한 연결점을 부여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2-1. 언어철학이 아닌 언어의 철학
여기서 언어학에 대한 단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푸코의 말을 따르자면, 언어학은 고전시대 에피스테메에서 재현의 근본적인 도구의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이 말대로라면, 언어는 그 자체가 사유와 도상이었으며, 서양의 인류는 아직 “언어철학”이라는 것을 구축할 만한 인식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라이프니츠의 보편기호학 체계는 묻힐 수밖에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음성학이란 것이 나와 표현의 탐구가 아니라 음성들과 음성의 상호적인 관계를 다루면서 재현의 한계가 찾아오게 된다.
그 뒤로, 언어학자인 보프의 어근의 역할에 대한 분석에 있어 비교언어학이 나오면서 근대의 에피스테메가 찾아오게 된다.
비교언어학이라는 것은 비교와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닌, 사실 다른 언어들 사이의 숨겨진 보편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산스크리트어의 분석에서 에트르 동사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보프의 업적 중 하나이다.
보프가 "동사와 인칭대명사는 언어의 진정한 지렛대인 것으로 보인다"라는 말을 함으로서 동사의 어근이 대상을 표상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언어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본 계기가 되었다.
2-1-1. 언어의 격하
이를 통해 고전시대의 일반 문법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면서, 언어가 본질적으로 무엇이냐라는 물음이 굉장히 중요해지게 되었다. 이때 기호논리학이란 개념이 나온다. “언어가 문헌학을 위한 대상으로 떠오르는 바로 그 시기에 불에 힘입어 기호논리학이 탄생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것은 언어학에 대한 근대과학적 성찰의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수학을 토대로 한 지식 영역들의 분류, 더 복잡하고 덜 정확한 것 쪽으로의 진전을 위해 정립되는 위계, 경험적 귀납의 방법에 대한 성찰, 이 방법에 철학적 근거 및 형식적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비롯하여, ... 자체를 정련하고 형식화하고 가능한 한 수학적으로 처리하려는 시도가 유래한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진정 “언어철학”이라는 것이 생길 수 있게 되었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고전시대 에피스테메에서의 언어철학은 말하자면 “언어 도식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언어는 재현을 표현하는 그 자체였고, 생물, 인간의 욕망, 인간의 언어가 전부 말의 분석에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근대 에피스테메가 도식의 목표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근대 에피스테메에서도 유용한 언어를 통해 도식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많았으나, 근본적인 목표가 달랐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표상의 일정한 도표로 자연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고, 따라서 수정 가능한 "격자"를 제공한 것이나, 이제 언어는 격자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깝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언어가 격자를 제시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자연을 표상했으나, 이제는 자연의 충실한 그림이 되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도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푸코는 “언어의 격하”라고 부른다.
2-2. 에피스테메의 절단
이 에피스테메의 절단을 요약하면 “인간의 유한성 탐구의 시작”와 “형이상학의 재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말의 분석의 상관관계와 그의 기반이 되는 재현으로 분석을 했지만, 재현이라는 개념이 한계를 보이면서 이젠 유한성과 인간의 분석론,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대립하는 생명, 노동, 언어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려는 경향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부분이 언어를 판을 두고 맞서게 된다.
2-3. 두 가지 부류, 해석과 형식화
이 언어의 격하가 일어나면서 언어는 두 가지 형태로 가치가 부여된다. 하나는 해석이며, 하나는 형식화이다.
언어가 철학의 대상이 되면서 경제학, 생물학, 언어학의 수많은 이론들이 전부 언어의 이론으로서 설명되게 되었고, 글을 쓰는 푸코조차도 이 모든 설명을 하기 위해 서술 방식을 정돈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언어학은 “전통, 말없는 사유의 관습, 민족들의 정신, 기억으로 인식되지 않은 것” 등으로 감춰져 있는 수많은 인간과학의 개념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담론의 진실"이라는 것은 "문헌학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었다. 프랑스 철학의 개념을 빌려, 이제 언어와 주석의 역할은 "우리의 관념에 잡힌 문법"의 “주름”을 드러내며 지속되고 비완결적인 해석을 반복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해석의 대표주자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언급한다.
2-3-1. 해석학의 극단 -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이 해석의 대표주자를 말하기 전에, 푸코가 어떻게 기호학과 해석학을 정의하는지부터 살펴본다.
그는 간단하게 이를 정리한다.
“기호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기호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인식과 기법 전체를 해석학이라 부르고, 기호가 어디에 있는가를 판별하고 기호를 기호로 성립시키는 것을 규정하며 기호들 사이의 관계와 기호들의 연쇄법칙을 알게 하는 인식과 기법 전체를 기호학이라고 하자.”
그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언급하며 이들의 해석학에 주목했다는 말은, 근대 에피스테메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호학보다 해석학에 치우쳐져 있는지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니체, 프로이트, 맑스”라는 강의록에서 이들이 어떤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제시한다.
푸코는 근대 에피스테메의 해석에 대해 먼저 논한다.
해석은 무한한 작업이 되었고, 해석은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해석 자체의 가장자리에서 해결되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해석의 극단들을 설명한다. 푸코는 이 해석의 대표주자, 해석학의 극단에 있는 세 사람의 이론에서 극단의 형태들을 발견한다.
푸코에 따르면, 해석학이 극단이 될 경우 해석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해석이 다 완결되지 못한 채 귀환점을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해석으로서의 해석 자체가 사라지며, 해석자 자신도 사라지게 되는 지점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고 설명한다.
프로이트의 도라가 그 사례다.
도라에 대한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전이라는 개념을 고안해서 해석의 무한한 지속을 막고 해석이 적당한 곳에서 알맞게 멈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방식으로 정신분석은 끝없이 펼쳐지게 만든다.
니체의 사례도 그렇다.
니체의 경우, 항상 해석은 미완이다. 철학은 언제나 미완이고, 미결이고 목적도 없고 항상 멀리 나가는 문헌학일 뿐이다. 그는 “절대적인 인식으로부터 소멸되는 것이 존재의 토대를 이룬다"라고 하며 해석자가 소멸하기를 원한다.
또한 푸코에 따르면, 해석의 본질적인 미완결성 자체가 해석학의 하나의 공리가 된다.
해석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이미 해석이며, 기호조차 다른 기호들에 대한 해석이라 칭한다.
니체가 그리스어의 좋음, 아가토스의 어원을 분석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도덕의 계보 첫번째 논문 5장에서 용어는 항상 지배 계급이 만든 것이라고 할 때, 이는 기호는 언제나 기호의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서의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니체가 해석 작업에 매달리는 이유는 일차적인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이라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서이고, 언제나 언어에는 해석의 거대한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증상에 대한 분석에 대해서도 그렇다.
프로이트는 증상에서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존재 자체가 하나의 해석에 속하는 환각phantasm이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증상에서부터 해석된 언어를 제외하곤 다른 것을 해석할 수가 없었고, 해석이 주어진 용어에 의해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서 해석학은 아주 큰 우위를 지니게 된다.
니체는 해석자를 진실한 자라고 불렀다. 푸코는 여기서 해석이 진리가 된 방식이 단절되었음을 포착한다.
이제 해석은, 시야에 지금까지 없던 진리를 포착하는 게 아니라, 지식들의 그물로 은폐되버린 진리를 드러낸다.
기호는, 말하자면, “악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자본에서 나오는 화폐라는 기호는 바로 이런 기능이었다. 이제 이론들은 화폐라는 기호에 대한 부정적 개념들을 알려주려고 한다.
니체에게는 낱말, 정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분류,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기호 전체가 전부 가면을 쓰고 있다고 보았다.
해석학은 하지만 이러한 점으로 특성이자 하나의 단점이 나오게 된다.
첫째로, 해석학은 해석을 대체 누구가 하느냐가 중요해진다.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해석자로부터 해석하려 한다.
니체가 철학을 "심리학"이라 부른 이유가 이것이다.
둘째로, 해석학에서 해석은 항상 자기 자신을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해석학은 기호학이라는 억제기를 만나는데, 기호는 자기 자신의 일관성과 체계성을 가지고 있고 이 두가지 특성에 답할 수 있게 해석의 폭력성과 무한성을 막기 때문이다.
푸코는 "해석학과 기호학은 사나운 원수지간"이라고 말한다. 기호학은 해석학으로 하여금 해석의 폭력성과 미완결성, 무한성을 버리고, 더 이상 해석을 해석하려 하지 않고 기호에 의존해 해석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해석학은 니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뒤엉키게 하는 해석으로 가기 때문이다.
2-3-2. 대립의 서막
이렇게 해석과 형식화, 해석학과 기호학 중에서 해석에 대해서는 푸코가 아주 긴 논변을 펼쳤으나, 나머지 하나인 형식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말과 사물이란 책의 극후반부에서 실증주의와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과학”의 충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형식화에 대한 내용을 암시하지만 이마저도 그렇게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책에서 해석과 형식화의 대립을 (그 적혀 있는 몇몇 부분에선) 이렇게 설명한다.
"근대적 사유에서 해석의 방법은 형식화의 기법과 대립한다. 즉 전자는 언어 아래에서, 그리고 언어 없이 언어로 말해지는 것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자 하고, 후자는 모든 잠재적 언어를 통제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의 법칙에 의해 모든 잠재적 언어를 위로부터 지배하고자 한다. 해석하기와 형식화하기는 우리 시대의 두 가지 중요한 분석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러셀과 프로이트의 대립”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미셸 푸코는 분석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던 편이라고 하나, 어떤 때에도 이것을 중심적으로 탐구한 적은 없었다. 푸코의 모든 저술 중에서 러셀에 대한 언급은 이 말과 사물에 나온 이 언급, 단 하나뿐이다.
또한, 미셸 푸코는 형식화의 예시로 구조주의를 예로 들 뿐, 분석철학과 같은 “변방”의 학문을 가져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접근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미셸 푸코로 분석철학을 분석하는 것은 정말 그다지 좋지 않은 접근이다.
그러나 나에게 굉장히 눈에 뜨이는 부분이 하나가 보인다.
저 해석과 형식화의 대립을 설명한 뒤, 이렇게 적었다 - "이 분할의 두 갈래는 우리와 너무나 동시대적이어서 우리로서는 이 분할이 단순한 선택을 강요한다거나, 의미의 실재를 믿었던 과거와 의미하는 것을 발견한 현재 사이에서 우리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의 정반대라는 것이다.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구분은 매우 심했다.
둘은 서로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으며, 진정으로 선택과 결단을 택해야 했다.
그렇다면 시험삼아서라도 러셀을 푸코의 고고학으로 분석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4. 러셀 - 하나의 극단, 하나의 변종
2-4-1. 실증주의와 인간과학
러셀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아직 말과 사물에서 설명해야 할 부분이 존재하므로, 다시 설명을 진행하겠다.
근대 에피스테메는 전에 말했듯이 비판, 실증주의, 형이상학이 같이 묶인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형이상학에 대응되는 선험성과 실증주의에 대응되는 경험성이 중요하게 되었고, 선험적-경험적 이중체라는 체계가 철학에서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은 상호보완하는 면도 있으나 충돌하는 면도 있다.
예를 들어 “기원”의 문제가 그러하다.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과학”, 심리학과 정신분석과 같은 인간과학은 선험성과 대응되고, 인식 조건을 다루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성을 중요시한다. 그에 반해 사물을 다루는 과학은 경험성과 대응되고 무한성에 뗄래야 뗄 수 없게 된다.
이 상황에서 인간과학의 개념에 대한 기원을 살펴보게 되는 경우 인간으로의 기원과 사물에서의 기원이 전혀 달라지게 된다. 사물에서의 기원은 인류 자체의 기원까지 뛰어넘어 훨씬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충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 극단이 나오게 된다고 푸코는 보았다. 하나는 인간의 개념을 사물의 개념에 완전히 환원하려는 극단적 실증주의의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사물에 관해 얻는 지식으로 사물을 완전히 환원하려는 극단적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과학"의 시도이다.
2-4-2. 러셀 - 하나의 극단, 하나의 변종
이렇게 된다면, 러셀이 어떻게 푸코의 고고학 개념 속에 속하게 되는지를 보일 수 있다.
근대 에피스테메는 “인간의 유한성 탐구”와 “형이상학의 재탄생”으로 대표된다. 재현의 한계를 보이는 인간의 유한성을 탐구하려 하면서, 동시에 생물학, 경제학, 언어학에서 나오는 숨겨진 재현들을 분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러셀이 취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개념을 사물의 개념에 완전히 환원하려는 극단적인 실증주의적 시도와 함께, 남은 인간성에 대해서 유한성의 소박한 부정, 소박한 무한성을 취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수학 원리”로 대표되는 언어의 기호논리학의 환원가능성이다.
이 경우, 근대 에피스테메의 세가지 쌍인 비판, 실증주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아주 안정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극단적 실증주의로 경험성을 추구하고, 소박한 무한성으로 무한정적인 비판을 가능케 한다. 이는 모두 기호논리학이란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잘 적용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해석과 형식화, 해석학과 기호학 중에서 러셀이 취한 것이 무엇인지가 아주 명확하다는 것이다. 러셀은 형식화의 극한, 기호학의 극한을 취했고, 이는 “수학 원리”와 그로 인한 수리논리학, 또한 언어철학에서 “해석”의 역할이 얼마나 빈약한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을 한 형태의 대항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에피스테메에서의 해석은 “해석을 도중에 멈추고 귀환점으로 돌아가고, 해석으로서의 해석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까지 존재하며, 해석의 본질적인 미완결성 자체가 해석학의 하나의 공리가 되고, 모든 것이 이미 해석이고, 기호조차 다른 기호들에 대한 해석이 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기서 수리논리학이 하는 역할은 "해석"에 대한 완전한 저항, 완전한 형식화, 완전한 기호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러셀의 소박한 무한성과 기호논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적 개념은 현재에도 다니엘 데닛이나 토마스 네이글과 같은 현대의 몇몇 분석철학자들도 가지고 있고, 확실히 비약이 있지만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만드는 기반이 되기도 한 것 같다.
이것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나는 여기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을 언급하려고 한다.
주관과 객관이란 개념 구분을 피하려는 가다머에게는 “교양” 개념을 인간에게 교육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 교양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주관적이고 사적인 것을 객관적이라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 즉 “공통감각” 개념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 추구의 중요한 점임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교양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수학”이 아니라 인문주의적 연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수학”의 예시로 “포르루야얄의 논리학”의 역사성와 정신과학의 빈약함을 드는데, 이 포르루야얄 학파의 논리는 수학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수학이라기보다 명석판명한 데카르트적인 지식에서 학문을 쌓아놓으려 했던 역사적 시도 중에 하나였다. 이것을 “수학”이라고 라벨링을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진리와 방법”이란 책에서는 그 “수학”을 완전히 비판하려고 하기보다 빈약함 그 자체를 호소하는데, 여기서 분석철학 또한 그러한 “수학”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거 글 초반 다른 갤러가 똑같이 쓴 거 본 거 같은 데 혹시 동일인물임?
https://youtu.be/1LVt49l6aP8
이제 해석은, 시야에 지금까지 없던 진리를 포착하는 게 아니라, 지식들의 그물로 은폐되버린 진리를 드러낸다. 기호는, 말하자면, “악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니체에게는 낱말, 정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분류,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기호 전체가 전부 가면을 쓰고 있다고 보았다.
이거 님이 만든 문장임? 아님 푸코인가 그사람이 쓴 글임? 내가 진지하게 읽은 철학자가 니체밖에 없는데 진심 니체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한 글 첨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