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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는 철저하게 죄책감의, 죄책감에 의한, 죄책감을 위한 소설일 겁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요. <개구리>는 커더우가 화자로 산부인과 의사였던 고모의 얘기를 편지쓰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커더우의 고모는 수많은 산모와 아이를 죽인 불결하고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낳던 어둠의 시대에서 한 줄기 빛이였습니다. 현대 의학을 배운 고모는 창조와 생성, 그리고 탄생의 신이였습니다. 간혹 죽는 산모와 아이도 있었지만, 이전과는 상대가 안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삶의 자리를 되찾았거든요. 하지만, 그녀의 존재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과 계획생육이라는 정책에 따라 불투명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파괴와 소멸, 죽음의 신으로 변모했습니다.
개구리 ‘와’는 인형 ‘와’와, 인류의 시조 여‘와’와 같은데, 개구리는 다산의 상징이자 마을의 토템입니다. 하지만, 개구리의 미끈한 다리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다리를 떠올리게 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고모는 개구리를 두려워합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죠.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의 얼굴을 조합하여 하나의 얼굴을 가진 찰흙 인형을 만들고, 새로운 탄생을 점지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한 아이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달래죠.
그리고 극본에서 고모의 얘기는 이어집니다.
죄를 진 사람은 죽을 수도 없고, 죽을 권리도 없단다. 죽지 못하고 목숨 부지한 채 온갖 시달림 속에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해. 생선전처럼 이리저리 뒤집히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약재처럼 들볶이면서 속죄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렇게 죗값을 치르고 나서야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곤 목을 매죠. 하지만, 커더우가 줄을 끊어 고모를 구하고 고모는 다시 태어납니다.
진와도 잘 있어?
아주 잘 커요.
샤오스쯔 젖 나와?
네.
잘 나와?
풍풍 잘 나와요.
얼마나?
샘물처럼 솟아요.
이 결말엔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샤오스쯔는 출산 경험 없이 나이 예순이 다 된 할머니에요. 젖이 풍풍 나올 수가 없거든요. 물론 가끔씩 고뇌에 눈물 흘리는 부처님, 예수님의 얘기는 들어 봤어도, 출산 경험 없이 예순 넘은 할머니한테 젖이 나온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봤어요. 분명히, 말이 안되죠. 고모는 이전의 죄업을 씻고 다시 태어나며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걸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지는 걸까요?
답은 극본 초장부터 나오는 아이를 찾아나선 얼굴 잃은 천메이의 행동에 있다고 생각해요. 천메이는 화재로 얼굴을 잃은 커더우의 친구 천비의 두 번째 딸인데, 천비는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고 천비의 엄마 왕단은 계획생육에 의한 낙태를 피해 도망가다가 미숙아로 천메이를 낳고 죽게 됩니다. 천메이는 미쳐버린 아버지 천비의 치료비를 위해 샤오스쯔의 의뢰를 받아 커더우의 정자를 주입하여 임신하여 진와를 낳게 되죠.
우리는 탄생부터 불행한, 빼어난 미모를 가졌으나 화재로 미모를 잃은 천메이의 비극과 아버지를 위한 효심에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아이를 가지고, 오직 아이만 남은 천메이가 아이를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인생은 정의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쁘고 마음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화만 입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비극이죠. 소포클레스도 이건 좀 하며 고개를 저을겁니다.
그럼 우린 천메이의 인생이 왜 정의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천메이가 받는 취급 때문일 겁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수단으로만 쓰지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이 말은 참 인상적인데요.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정말로 꼴뵈기 싫은 나쁜 짓입니다. 주변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 둘 있을걸요? 더구나 형법에도 사람을 범죄의 도구로써 수단으로 이용하면 간접정범으로 처벌해요. 윤리적 지탄을 넘어 법적으로도 처벌받는 행위는 정말 악 중에 악이라고요.
천메이는 돈을 받고 아이를 낳아요. 하지만, 실제로 아이는 죽었다고 거짓말하였으니 한 번도 직접 보진 못하고 빼앗긴 셈이죠. 그래도 천메이는 알고 있어요. 아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을. 커더우 일가족은 모두 천메이를 아이를 낳는 수단으로만 철저히 이용합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예찬에 따라서요. 여기에서 우리는 모순과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생명을 앗아간 죄책감을 강조하면서 왜 또 다른 도덕, 윤리적 죄에는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일까?
이쯤에서 저는 죄책감과 관련한 제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정도 됐었던 거 같은데요, 제 동생은 동물들을 좋아했어요. 그때도 마침 학교를 마치고 오니 동생이 왠 강아지를 집에 데리고 왔었습니다. 자세한 경위는 모르겠지만 버림받은 유기견 같았어요. 저는 소리를 질렀죠. 왠 개를 데리고 왔냐고. 빨리 쫓아내라고. 소리를 지르는 그 순간 우유를 핥고 있던 흰색 강아지의 그 눈망울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눈망울을 평생 잊어버릴 수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또 다시 버림을 받는 순간을 직감한 강아지의 아련한 눈이였습니다. 아뇨, 어쩌면 저의 과대망상일지도 모르죠. 버림을 결정한 건 저고, 저는 단지 강아지와 눈이 마주쳤던 겁니다. 그 순간 저는 강아지의 눈에서 저의 죄악을 느꼈던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괴로웠어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디엔가라도 이 괴로운 심경을 표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갤러리인진 모르겠으나 일기를 쓰는 갤러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저는 그곳에 제 심상을 간단히 써내려갔습니다. 댓글들도 좀 달렸던 것으로 기억해요. 심성이 착하다면서 말이죠. 어쩌면 그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해주는 똑똑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저는 동정에 마음이 풀렸고, 그 일은 그런대로 마무리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생명을 경시하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고, 아마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실수들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는 존재의 불완전함에 괴로웠고, 차라리 윤리적 문제로부터 괴로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완전한 악인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어 언행일치를 하는 성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불쑥불쑥 강아지의 눈망울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전자의 방법은 불가능할 것 같고, 후자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아요.
모든 잘못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일종의 유욕론입니다. 욕망의 아궁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불을 지피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작은 불꽃의 씨앗이 커져 불이 나는 것이니까요. <개구리>에서도 출신성분적으로 고귀하면서,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을 가진 고모가 국민당으로 전향한 조종사와 만났다는 것은 크나큰 실책이였습니다. 고모는 자신의 고귀함을 되살리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계획생육에 앞장서서 다른 지역보다 더 유난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태아들과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커더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을 낳고 싶었던 왕런메이에게 낙태할 것을 권유하죠. 저는 욕망이 불러오는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이 세상의 좋은 것들 중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항상 고민했습니다. 욕망에 따른 발전을 긍정하면서도 그 욕망의 윤리적 한계를 긋는 것에 대해서요. 한때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그 기준으로 삼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너무 결과론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에게 결과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하더라도 의도가 나쁜 경우를 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꽤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숙제검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자꾸 눈에 불을 켜고 저를 지켜보는 것 같았거든요. 종종 강아지의 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드디어, 무언가 포괄하고 있는 일종의 대원칙을 발견했습니다. 남들은 책을 어떤 기준으로 읽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독서를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모두가 다른 이유를 댈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독서란 이상적인 인간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였습니다. 그 과정 중에 드디어 하나의 경이로운 발견을 한 것이죠. 논어의 15편 위령공 23절입니다
자공이 “하나의 말로써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서(恕)로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제하지 말라.”
인간은 혼자서 살아간다면 누군가로 인해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란 것은 너무나 잔혹한 것이여서 그렇게 살 수 없게 설계되어 있어요. 저도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많은 상처를 입히고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역지사지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어찌보면 앞서 칸트가 얘기했던 ‘나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수단으로만 쓰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것도 결국 공자님 말씀에서 파생되는 법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람대접을 받고 싶다는 전제 아래, 공자님 말씀을 어기지 않으면 칸트의 정언명령도 당연히 지켜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남에게 상처 입히고 상처받은 저도 조금씩 아물어 갔습니다. 인간의 진심어린 관심과 애정의 한 마디가 나 자신과 타인을 바꾸고 치유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발전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 이 부족함을 알게 해준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 개구리란 소설은 읽다만 것 같아 찝찝합니다. 천메이는 아기를 빼앗긴 후 어떻게 되었을까? 고모와 커더우, 그리고 샤오스쯔는 천메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자신들의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생명을 거두었지만,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해낸 셈이니까요. 중국 문학은 상상보다 과거 실책에 대한 비판은 적나라하지만, 반면 현재진행중인 문제 대한 비판은 뭔가 그리다 만 것 같은 느낌이에요. 어쩔 수 없죠. 어쩌면 독자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된 장치일까요? 아니면 현실적 문제 때문일까요? 어쩌면, 실수투성이인 우리에게 인간은 계속해서 실수를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위안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 하더라도 한 번 일깨운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이대로 그치지만은 않을 거 같습니다. 한 번 되살아난 양심은 그렇게 쉽게 침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경험이 없으면 알 수 없는 일들도 있다지만, 이건 제 경험이 있으니 확실해요. 양심을 일깨우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반성하는 것이며, 양심을 토대로 묵묵히 옳은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구원으로 가는 길이에요. 즉, 죄책감과 양심의 존재를 깨닫는 것은 구원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에요. 분명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혹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시나요?
감동적인 리뷰
그래서 다시 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