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피네간의 경야>(이하 <경야>)는 그 본질에 있어 민담의 형식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경야>는 청각적인 경험이며, 끊임없는 서사적 변형과 재생산을 이루어내는 모습이 구전되는 민담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본 리뷰는 이 두가지 특성을 중점으로 살펴볼텐데, 제임스 조이스가 <경야> 에서 언어의 파괴를 통해 소설문학이 독자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재창조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경야> 의 언어와 감각]
<경야> 의 언어는 넌센스로 가득하다. 영어라고 여기기도 힘든 단어로 이루어진 이 텍스트는 혼란스러운 운율을 바탕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 <경야> 를 읽음은 청각적인 개념이라는 것과, 2. 동시에 시각적인 경험과 청각적인 경험의 경계를 붕괴시키고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경야>의 문장이 전개되는 방식은 운문적인 리듬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riverrun, past Eve and Adams, from swerve of shore to bend of bay
Poor Old Michael Finnegan began again
이런 식으로 마치 랩 가사 쓰듯 운율을 끊임없이 맞출 뿐더러, 이 운율에서 관념이나 시각적 형용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염두에 둔 듯 하다.
Finnegans wake 에서 Finnegan 은 이후 서술되는 Finn, Again 을 음운적으로 연상시키고, 이는 처음과 끝이 연결되는 소설의 형식과 같은 인물의 변주 (혹은 반복되는 역사) 라는 소설의 주제와 부합한다.
흔히 하나 이상의 감각을 연상하는 형용은 '공감각적'이라고 불리기 마련이지만, <경야> 에서 조이스의 시도는 접목보다는 파괴에 가깝다. 흔히 소설적 형용의 기반으로 여겨지는 시각과 부차적이라 여겨지는 청각의 경계를 파괴시킴에 따라 <경야> 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넌센스로 전락한다. Sinduce (Sin+Seduce, 죄혹罪惑하다), Redismember(Re+Dismember 혹은 Remember+Dismember, 재절단再切斷) 등등의 조합어는 온갖 심상과 감각을 멋대로 뒤섞어 독자의 이해와 연상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그에 따라 언어의 기능을 거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야> 의 언어는 마냥 파괴적이지만은 않다. 청각적 운율과 시각적 넌센스가 뒤섞여서 태어난 조합어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밀집된 의미를 통해 언어를 극한으로 몰고가고, 이런 겉보기에 무의미하며 의미의 연상을 방해하는 단어들 속에는 조현병적schizophrenic 이라 여겨질 정도로 수많은 감각과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즉, 마치 나보코프 말마따나 넌센스에서 새로운 감각 뉴-센스가 태어나는 과정을 독자는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감각' 은 무엇인가]
우선, <경야> 의 언어에서 음운과 이미지와 관념은 서로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Cropse 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작물들Crops 와 시체Corpse 의 조합어인 이 단어는 작물을 통해 상징되는 생명의 심상과 시체를 통해 상징되는 죽음의 심상을 하나로 접목했다. 한 단어 안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다른 종류의 표상들은 서로에게로 환원되나 싶기도 하다. 조합어의 바탕이 되는 두 단어 Crops 와 Corpse 는 직관적인 이미지다. 곡물과 시체.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아직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이 합쳐진다면? 작물과 시체의 상반되는 이미지 속에서 각각은 삶과 죽음을 표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음운적인 닮음 (Crops/Corpse) 이 발견됨에 따라 이미 발생한 의미는 발전한다. 예컨데 삶과 죽음의 순환이나 경계 등을 생각하게 하고 대립하거나 구분지어 지던 것을 구분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주는 <경야> 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경야> 의 언어가 구술적인 음운과 서술적인 의미 사이에 걸터앉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미 정해진 의미를 뜻하기 위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 소리의 청각적 생성을 통해 언어적 표상화가 진행되는, 원초적인 언어 생성이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피진어와 크레올같은 상황이라고 할까.
[따라서 <경야> 의 언어는 구술적 언어인 동시에 서술되는 언어이며, <피네간의 경야> 는 민담적 구술의 서술이다]
청각과 시각적 심상이 다채로이 사용되며 서로 뚜렷히 구분되지 않고, 같은 이야기와 인물이 다른 모습과 다른 상황으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이것은 모더니스트의 다분히 아방가르드한 시도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문자 언어로 서술되었기에 새롭다 여겨질 뿐, 인간이 처음 문학을 시도했을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하기'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해보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땅으로 집어던진 것은 어머니 헤라인가, 아버지 제우스인가. 애초에 제우스가 아버지이긴 했던가? 디오니소스는 언제부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였고 헤스티아는 언제부터 아니었나? 사실 그리스의 만신전이 정전Cann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리된 편임을 생각하면 (이집트나 인도 신화의 화신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이런 구전적 민담, 즉 이야기적 특성은 <경야> 의 인물들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이 보인다. HCE 와 ALP 는 다이아몬드의 끊임없는 면처럼 수많은 이면Aspect 들을 통해 상징되고, 그들의 이야기는 몇 개의 원관념 (추락 등등) 을 두고 끊임없이 반복된다. HCE 는 왜 추락하는가. ALP 는 그를 왜 비호하는가. 이는 신화적이며 시적이다. 제한된 등장인물들에게 몇가지 관념을 부여하여 표상화하는 과정은 신화의 신에게 신격을 부여하여 영웅적인 이야기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시도와 일맥상통하며, HCE 의 의미 중 하나인 Here Comes Everybody 라는 말을 통해 조이스가 추구했던 보편성을 엿볼 수 있다. 제우스가 아버지 신이듯 HCE 는 아버지이며, 헤라가 어머니이듯 ALP 는 어머니이다. 이들의 가정사는 세상의 가정사이며, 따라서 그들은 모든 가정의 이야기 속에서 불멸을 누린다.
[<경야> 는 서사담談 이다]
나아가 이런 '이야기하기' 의 행위는, 조이스같은 서사시적 형식을 선호하는 문학가에게 더할 나위없이 적합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호메로스와 단테, 그리고 밀턴 모두 이미 있는 이야기들을 차용해 자신의 서사와 운율로 벼려냈다. 다만 조이스 이전의 서사시인들이 한 작업은 구전되는 민담을 서술의 틀 안에 가두어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정전화Cannonizing의 행위로 생각하자면, 조이스가 <경야> 를 통해 문자적 서술 속에 갇힌 민담들을 도로 구술언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꽤나 대담한 작업에 천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경야> 는 정돈된 언어로 읽힐 수 없는, 문자와 입말 그 사이 어딘가에 걸친 문어-구어의 형식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피네간의 경야> 는 원시성과 근대성을 구분하지 않으려 든 조이스의 시도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아 제대로 썼네 나도 읽어야겠다
5권 당첨 축하드립니다
5권(짬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