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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 읽기와 글쓰기>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 중에 실린 책 읽기와 글쓰기의 내용 일부를, 니체의 각 저서 중 책 읽기 또는 글 쓰기에 관한 니체의 생각을 발췌하여 정리한 책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자적 사고의 중요성을 기본으로 자신의 생각을 점차 발전시켜 나가는 반면, 니체의 글은 단편적이고 파편화되어 있어 통일성이나 자기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증을 찾기 힘들기에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밖에 없지만, 이 다양성이 하나의 유희의 장의 역할을 한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위대한 문체는 아름다운 것이 괴물에 승리를 거둘 때 생겨난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며, 괴물은 무엇일까? 이것들을 해명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를 읽고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문장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끄집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꽤나 우리를 곤란하게 하지만 이런 점이 우리를 니체의 글로 인도하는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의 공통점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서로 닮은 듯 서로 다른 두 철학자는 ‘스스로 생각’할 것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의 글쓰기와 책 읽기는 스스로 하는 사고의 중요성에서 시작된다. 독자적 사고는 다른 생각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으며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기에 완벽한 이해를 토대로 자유자재로 취급할 수 있다. 글쓰기라는 것은 자신이 이해한 사고를 적어나가는 것이고, 사고가 명료하면 명료할수록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글쓰기가 명료해지며, 따라서 문체는 절로 소박해지며 간결해진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 마냥 화려하고 꾸며내지 않으며, 과장하지 않고 독자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자신이 대단한 지위에 있는 것과 같은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에게 책 읽기가 권장되는 경우는 오직 독자적 사고가 막혀 새로운 혈로를 찾아야만 할 때, 잠재력을 일깨울 때 뿐이다. 그마저도 책을 단순히 읽고 또 다른 책을 정복하기 위해 나서지 말고, 되새김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것을 전한다. (니체도 비슷함. 솔직히 군데군데 흩어져 있어 한 문단 정리했는데 빡치기도 하고 쇼펜하우어랑 비슷하기도 해서 그냥 지웠음)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저자가 있다. 사고를 하지 않고 글 쓰는 유형, 글 쓰며 사고하는 유형, 사고하고 나서 집필하는 유형.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나는 독갤에 감상문을 올려 추천을 구걸하는 일종의 글 거지가 아닌지 생각이 들어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들었다. 글쓰는 목적이 책을 읽고 많은 사고를 거듭한 끝에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어 나 자신이 도저히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충만한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상문을 남길 목적으로 감상문을 배설하는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팀 게임으로 치자면 하나의 업적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글쓰기 작업은 내가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게 됐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게 본질을 흐린다. 아니, 어쩌면 생각의 과정이 제대로 있었던 것은 맞을까? 그동안 피상적인 책에 대한 인상을 토대로 독붕이들의 눈을 버리게 한 것은 아닐까? 무엇을 쓰고 싶은지 갈팡질팡한 채, 무언가 대단한 것을 느낀 것 마냥 포장해야하니 쓸모 이상으로 많은 얘기를 덧붙인다. 그 글은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공감도 되지 않는다. 즉, 사고가 빈약한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사고를 키우기 위해선 계속 노력해야만 한다.
하지만, 독자적 사고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사고는 피로를 불러 일으키며, 정상적인 활동을 마비시킨다. 그러다보면 스스로 사고하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무임승차하고 싶은 생각 이 스멀스멀 우리를 잠식한다. 또한 피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사고를 한다한들 우리가 각자 직면한 문제를 과연 해결할 수 있느냐하는 의구심의 바다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위험한 하나의 허무주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질과 사고, 가치관 따위 등에 따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의식은 서로 상이하며, 문제는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찾으려 한다기 보다는 어떻게 보면 ‘발견’ 되어지는 무언가다. 자신이 발견한 그 문제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줄 수 없고 오직 나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운이 좋아 내가 가진 문제가 꽤나 보편적이라면, 나와 유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일평생 몰두한 대단한 누군가를 찾을 수 있고, 그의 정신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행운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신이 아로새겨진 책을 읽는다고 해서 곧바로 머리가 청명해지고, 알렉산드로스 앞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절로 풀리고, 콜럼버스의 달걀이 스스로 우뚝 서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부족할 것이다. 수많은 사상이나 철학을 접한다 해도 자신의 인생과 삶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사상이나 철학이 과연 있기는 했단 말인가?
이렇듯 각자 처해있는 각기 다른 문제들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와 약간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의 남은 인생을 영원한 것처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일말의 희망조차 비추지 않는다면 인간의 남은 인생은 좌절뿐이고, 좀 더 정신의 고통을 덜고자 하는 똑똑한 자는 체념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그렇게 쉽게 좌절에 빠뜨리지도, 체념에 이르게 해주지도 않는다. 희망을 보여주어 살살 꼬시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희망의 빛이 보이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절대 열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순간 거대한 벽 앞에 놓이게 된다.
떠올리려는 노력만으론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절대적인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첫술에 배부르랴 라는 말이 있듯이 한 번에 완벽한 해결답안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그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떠올려본다면 언젠가 노력 끝에 자라난 지성과 통찰을 통해 어느 순간 해답이 번뜩이는 순간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진다. 우리는 그런 희망 아래 세상을 낙관하며 살아간다. 해답의 순간을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수많은 마귀가 유혹할지라도 꾸준히 사고하며, 책을 읽어나가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
니체의 위로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장년기뿐만 아니라 청년기나 유년기도 그 자체의 가치가 있으므로, 결코 통로나 다리로서만 평가되어선 안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되지 않은 사상 역시 나름의 가치가 있다.’
저도 그 어떤 것도 추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독립적인 정신을 기르는 삶이야말로 가치있디 생각해서.
오 재밌겠다
읽는데 즐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