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요약) 나도 잘생겨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 근면과 지식을 추구할 것
아름다움이 주는 비극과 그마저도 아름답게 만드는 글은 아름답다. 미시마의 글은 비존재의 것도 존재처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현존해야 하는 아름다움을 피안彼岸의 무언가인 듯 묘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나는 남색가도 아니고 불륜에 흥분하는 변태광도 아니라지만, 미적인 것에 반응하는 본능적이고 통상적인 동물이다. 만약 당신이 애정하는 내 삶의 독자라면 내가 언제나 아득한 문장을 추구해왔음을 알 것이다. 유이치는 슌스케가 거부하기엔 아름다웠고, 그런 유이치가 행하는 남색가로서의 행보는 사적 기호가 멀리하기에 너무나 미에 가까웠다. 그것이 다수와 맞지 않는들, 아름답다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봄눈>과 <금색>은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처럼 본질적으로 닮아있다. 외적으로 뛰어난 남자 주인공이 그렇고,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방식의 사랑이 그러하며, 그 사랑으로 죽음의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게 되는 서사가 그러하다. 사랑해서 죽는다는 것은 타들어가는 시체 속 찾아낸 금니의 번뜩이는 광택과 봄에 내려 쌓이기 전에 사그라드는 눈만큼이나 역설적이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부조리를 스스로의 삶의 형식으로 채택하는바, 죽음을 생명의 의무인 사랑의 마땅한 길로서 두려운 듯 즐거운 듯 뒤 한 번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아간다.
모욕을 주겠다는 마음가짐을 잃고 대상을 상실한 이후에야 사랑을 느끼는 기요야키나, 여성에겐 그 어떤 마음조차 들지 않으면서 가부라기 부인과 야스코에 대한 애정을 인정하는 유이치가 다다른 그들의 빼어난 외모가 선사한 끝은 각각 자신과 타인의 죽음이다. 빛나는 등불이 차가워지며 꺼지는 것처럼, 아름다움이 이끄는 건 늘 어둠이고 차디찬 무언가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극적인 美를 갖지 못 했는가. 나는 뜨거웠다 연기로 증발할, 이성理性을 제치는 아름다움을 가져 청춘을 광내고 생활에 계절처럼 시시각각 변화를 부르는 자연과 이유없는 우울함을 무너뜨릴 자기애를 부여불가하도록 존재하게 되었는가. 작에서 따지면 나는 기요야키나 유우짱보단 늙어서보단 태생이 추한 슌스케에 비할 만하고, 그조차 머리에 든 것이 없어 추상에 있어 모자라다. 내가 추구할 방향성은 혼다에 있다. 인간이 치우치는 과거-현재-미래의 세 가지 중 맨 앞의 쓸모를 도려내고 나로서의 ‘의무’와 ‘사상’에 힘을 다하리라. 그것은 현물과 가장 멀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답다, 문장처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