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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널 사랑하지만 넌 날 낙담시켜." LCD 사운드시스템의 <New York, I Love You But You're Bringing Me Down> 노래의 제목에서도, 가사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되는 구절. 존 치버의 단편들을 읽으며 계속 이 노래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단순히 뉴욕이 어째서 멋지면서도 끔찍한 도시인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뉴욕이 끔찍한 도시라고 말하는 바로 이 화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 뉴욕은 끔찍하지. 하지만 그 끔찍함에 너도 기여하고 있잖아. 네가 서열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위선적으로 한 발짝을 빼는 태도가 조금씩, 조금씩 더 이 도시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잖아.
분명 보들레르가 바라본 부르주아는 이런 모습이었을 테다. 꼭 유복하느냐 어떻느냐를 따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돈은 적당히 먹고 살 수만 있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소시민에게는, 소시민에게 어울리는 불쾌한 위선이 있다. 그것을 인간적인 매력으로 느끼며 공감하느냐, 혹은 질색하며 싫어하느냐는, 아마 이 많은 위선적인 태도 중 무엇이 자신의 그것과 닮았고 무엇이 닮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적당히 웃으며 하는 대화 속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엇나간 기분을 넘기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선이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어떤 의미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리는 화석이 되기도 한다. 그 정형화된 무언가는 더 이상 부드러워질 수가 없어, 어느새 편견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순간적인 고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피츠제럴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가 어찌나 처절하게 웃는 낯으로 등 뒤에서 칼을 빛내는 뉴욕의 계급 투쟁을 그려냈는지, 지금도 나는 그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는 그 소설 속의 인물들 중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서였고, 지금은 왜일까? 어쩌면 다시 읽어보면 <밤은 부드러워라>처럼 <개츠비> 역시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닐테다.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이 내가 늘 간직하고 있는 위선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뭔가 사람들에 대한 염증을 막연하게 품고서 뚜렷하게 혐오할 대상을 찾을 때 <개츠비>는 늘 좋은 선택이었다. 치버의 단편 역시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들이야말로 치버나 피츠제럴드가 약간 신랄하게 드러내는 인물들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편견이 가득하고 또 불쾌할 인물들일 텐데도, 그들을 볼 때는 그저 흥미롭기만 하다. 어쩌면 오코너의 글 속의 인물들은 내게 너무나 멀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치버나 피츠제럴드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늘 내 주위에 있고, 나와 친하거나 실제로 나를 좋아한다고 스스럼 없이 말할 수 있는 이들과 겹쳐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쾌한 골짜기, 혹은 도플갱어에 대한 이야기.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친애하는 이의 추잡스러움. 나는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남에게 내 부끄러움이 드러날 때마다 끔찍한 기분이 들기에 더더욱, 남이 그런 추함을 내게 드러낼 때마다 이를 용서하기 더 힘들다고 느낀다.
오 감성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