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운몽 원본은 한문인가 한글인가? - 구운몽 연구사
정규복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구운몽을 연구하여 이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구운몽 연구사를 볼 때, 구운몽은 본래 한글 소설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정규복 선생님은 가장 오래된 구운몽 판본인 노존본을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 원본은 한문일 것이라고 추측했고(1977),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이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구운몽」에 관한 연구는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먼저 원본을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김태준(金台俊)은 「구운몽」도 「남정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만중이 국문으로 창작한 것을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정규복(丁奎福)은 국문 원작설에 의문을 제기하여, 한문 ‘을사본’의 모본이며 최고본(最古本)이라는 한문 ‘노존본(老尊本)’을 발견하였다. 이에 의해 이전까지 원본에 가깝다고 추정해 온 국문 ‘서울대학본’ 및 국문 ‘노존본’이 한문 ‘노존본’과 같은 계통이며, 이의 번역본임을 증명하고 한문 원작설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구운몽」은 텍스트의 연구를 통하여, 한문본이 노존본(1725년 이전)에서 을사본(1725)으로, 을사본은 다시 계해본(癸亥本, 1803)으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국문본도 노존본 계통의 국역본(國譯本), 을사본 계통의 국역본, 계해본 계통의 국역본 등으로 분류된다. 아울러 서포문중설화(西浦門中說話)가 밑받침되어 「구운몽」의 한문 원작설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데 「구운몽」의 한문본과 국문본의 비중이 거의 같다는 점은 계층과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 「구운몽」이 수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구운몽」은 어느 부류의 독자층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공동의 소설적 규범을 개발하는 데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운몽은 작가의 친필본이나 생시에 간행된 판본이 확인되지 않는다...... 을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운몽일 뿐만 아니라, 내용과 표현 면에서도 가장 풍부하다. 다만 당대에 사고 팔리던 다른 인쇄본 소설과 마찬가지로 표기에 있어서 오류가 적지 않다. 이 점 때문에 오랫동안 학계의 외면을 받았지만 이 약점은 다른 이본과 비교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구운몽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정규복 선생께서도 구운몽의 정본을 만들 때 이 을사본을 기준으로 삼으신 바 있다. 또 을사본은 1922년 캐나다 출신의 기독교 선교사 제임스 케일이 처음 영어로 번역할 때 이용한 것이기도 하다." - 정병설(문학동네판 구운몽 번역자)
그러나 당연히 구운몽 원본이 한글일 것이라는 주장 역시 계속 제기되어 왔다. 다니엘 부셰(1992), 지연숙(2001), 정길수(2007) 등.
김동욱은 2011년 연구의 결론에서 구운몽의 원본 언어가 한문인가 한글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새로운 결정적인 판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이 논문에 포함된 연구사 정리와 결론을 아래 첨부함)
2. 구운몽 원본의 내용은 언어를 떠나서 우리가 읽는 판본과는 무척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원본을 추측할 때는 원본이 가장 풍부하고 뛰어나며,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고 열화되거나 소실되었을 것이라 가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용이 풍부할수록 원본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다니엘 부셰는 반대로 구운몽 원본은 장 구분도 없고 삽입시도 없는 형태의 국문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제기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후 필사자들에 의해 장이 나뉘고 문장이 다듬어지고 시가 삽입되는 형태로 점차적인 개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 조선 시대에 한글 소설의 발달은 여러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글을통해 탄생한 한국어 문어 자체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극히 투박하고 미성숙한 언어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언어 자체의 미성숙함은, 이미 수천 년의 발달사를 거쳐 극히 원숙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던 한문에 비해 소설 언어로서 한국어의 경쟁력이 크게 뒤쳐지는 원인이었다.(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미성숙함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어에 서구적인 원천들을 도입함으로써 빠르게 압축적으로 극복된다)
아주 거칠게 비유하자면 조선 시대에 한문 텍스트는 순수 문학, 한글 텍스트는 웹소설 정도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사이의 명백한 위계 질서 자체가 한국어 텍스트의 발전을 가로막는 악순환의 큰 원인이 되었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한문 번역자인 증손자 김춘택의 서문을 통해 한글 원본이 실존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위와 같은 까닭에 한글 텍스트의 한문 번역은 일종의 텍스트의 업그레이드와 같은 의미를 가졌을 듯하다. - 즉 한국어 문어 자체의 미성숙과 한문과 한글 사이의 위계질서로 인해.(오늘날 읽히는 사씨남정기는 대부분 한문 번역의 한국어 재번역본이다)
단테가 중세의 국제 공용어였던 라틴어 대신 이탈리아어를 선택했던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에 표음 문자의 언어 전통 자체가 극히 미미했기에, 조건은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구운몽의 저자는 김만중이 아니다?
이윤석의 2020년 연구 <구운몽의 작자와 원본 재론>는 한 층 더 대담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 아님을 주장한 분이기도 하다)
즉 구운몽의 저자가 김만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구운몽 원본을 한글 소설로 추정하며, "서울의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했다는 사실과 어린 이재가 듣고 이해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한글소설이 분명하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구운몽의 저자를 김만중이라고 규정할 때 그 근거를 조선 시대 이재의 <삼관기>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이재의 기록 역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재가 <삼관기>에서 <구운몽>의 작자를 김만중이라고 말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앞으로 연구자들은 이재가 말한 김만중 작자설의 근거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기록에 나타나는 김만중의 구운몽 창작설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김만중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재의 김만중 창작설의 근거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구운몽>의 작자를 김만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논문의 초록과 결론만 첨부해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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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판본이 너무 많지.....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민음사나 문학동네판 많이 추천되던데, 민음사판이 문체가 좀 더 고전적이고 문학동네판이 좀 더 읽기 편한 듯. 미리보기로 보고 취향 따라 골라보길~~
문동으로 읽었는데 좋았음
전반적으로 정병설 교수의 번역 저본 선정은 아주 믿을만 한 것 같음. 춘향전도 전통적으로 정본으로 여겨지는 완판 84장본이 아닌 경판 30장본을 선택했더라. 이윤석 교수의 견해를 지지해온 로쟈 이현우도 일찍이(정병설의 춘향전이 나오기 전에) 경판 30장본이 더 뛰어난 판본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었지. 반면에 몇 달 전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다른 연구자의 춘향전은
여전히 완판 84장본을 골랐던데, 역자 서문에서 읽히는 뉘앙스는 내 느낌엔 정병설처럼 판본 선정에 큰 고민을 하지는 않은 것 같았음.
오 그런 얘기도 있었구나. 정병설 춘향전도 한번 찾아봐야겠다. 고맙네!!
나야말로 양질의 정보글 완전 감사. 구운몽에 대한 것은 궁금했지만 제대로 찾아보지는 않고 있던 주제였음. 춘향전에 대해서는 로쟈 이현우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 '문학동네판 춘향전을 기다리며', '춘향전 다시 읽기'를 참고해도 좋을 듯? 결국 그가 기대하던 식의 춘향전은 문학동네가 아니라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오게 됐지만...
로쟈 선생님이 국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나. 기억해 뒀다 꼭 읽어보겠음. 고마워!! 평안한 밤 보내시길!!
꾸준히 다양한 나라의 문학 강의를 하시다보니까 그때마다 연구서나 논문을 많이 읽게 되시는 듯함. 그리구 '춘향전과 남원고사' 이 글이 판본 차이를 지적한 글인데 앞 답글에서 까먹었음...(세 글 다 어디까지나 블로그 글이라서 막 엄청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음. 그거는 이윤석 교수의 연구서를 읽어봐야 할 듯.)
너무 감사합니다
국문학계 진짜 왜 이러냐? 뭔 홍길동전도 작자 미상이라고 하고 구운몽도 김만중 창작 의심하고 사씨남정기도 장희빈 인현왕후 당쟁 연관 부정하고. 당시보단 떨어져 있고 영성하긴 하나 뻔히 뚜렷하게 지적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뭔 대단한 고증학자들 납셨다고 혼란만 조장하네.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건 좋은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