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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위대함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화자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나열하며 전달하려고 하는 느낌을 받기 위해선 먼저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통속적인 이들이 어떻게 그 신비를 느낄 수 있었으랴? 1년 전, 나는 이 책을 읽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렇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방치했다. 그 사이에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G.H.가 수난 이전의 자신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탐색이 될 것이다. 이 이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하지만 그 탐색의 결과로 나오는 것은 이후의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일반적인 사실의 열거일 뿐이다.


무언가 거대한 것을 선뜻 받아든 사람은 팔에 안겨진 그 육중한 질량에 놀라 왜 내가 이것을, 하고 중얼거리고 말 테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보면, 이 무거움은 비단 손에만 들린 것이 아니라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저 지금에야 그 존재를 느꼈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존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고 있다. 자기 자신은 늘 존재하고 있었고, 과거에서 지금을 포함해 영겁의 시간 동안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무지한 내가 있었다. 나,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며 그 감각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인간의 기준에서 재단한 경계가 급작스럽게 흐려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감던 자신이. 이번에는 눈을 감지 못했다.


삶과 생명. 인간의 모든 가치평가의 그렇다/아니다를 전부 몰개성하게 포함하고 있는 광막한 무관심의 영역. 생명의 무한함은 자신에게 그저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허락했을 뿐이고, 그 영역의 밖에서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무한한 생명에 우리는 손을 집어넣지도 못한다. 손을 집어넣어봤자 그 생명은 그저 아무런 반응 없이 그 손을 통과해 마저 할 일을 할 것이다. 곤충 한 마리를 잡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흐르는 물처럼 우리의 손을 스쳐 지나가는 세계 앞에서, 인간은, 결국 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느낀 이 장대함을 넘긴다. 의미는 신을 통해 만들어지며, 신은 그 이상의 무엇도 우리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신은 세계만큼이나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하지만 그 무관심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풀어헤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신성한 수난 뿐이며, 그 순간 구심점 없이 흩어진 세상을 하나의 전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어찌나 나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지 눈치 챈다면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하지만 G.H.라는 이름을 보고 내가 그 이상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집어삼킨 바퀴벌레의 몸에 담긴 진리가 몸 안에 녹아드는 것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 딱 하나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이름을 삼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꺠달음 뿐이다. 이제 와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