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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도 짧은데 ㄹㅇ 고트더라


궁금한데 검색하기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손수 책(재밌다고들 어쩌구 저쩌구...)보면서 밑에 직접 타이핑 해놨으니 그거 읽어보면 됨!

굵은 글씨로 된 건 책에서도 굵은 글씨로 된거임!





재미의 본질



내가 아는 한, 픽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비유는 돈 드롤로의 <마오 ii>에서 나온다. 그 책에서 드릴로는 한창 집필 중인 책을 가리켜 작가를 쫓아다니는 추악한 기형의 아기로 묘사했다. 아기는 늘 작가를 따라 기어 다니는데(이를테면 작가가 식사를 하려고 찾은 식당에서 문득 바닥을 질질 기며 나타나거나, 아침에 침대 발치에서 그날 맨 먼저 보이는 얼굴이라거나), 추악한 기형이고, 뇌수종이 있고, 코가 없고, 팔이 뭉특하고, 대소변을 잘 못가리고, 지능이 떨어지고, 입에서는 뇌척수액이 질질 흐르고, 작가를 향해 늘 앵앵거리고 우물거리고 울어대면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 추악함 때문에 틀림없이 얻어낼 것이 분명한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작가의 온전한 관심을.




기형의 아기 비유는 완벽하다. 왜냐하면 픽션 작가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느끼는 거부감과 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을 잘 포착했기 때문이다. 픽션은 늘 끔찍한 결함을 안고 탄생한다. 당신의 모든 희망을 배반했다고 할 만큼 추악하다. 완벽한 구상에 대한 잔인하고 역겨운 캐리커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이해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하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 그 아기는, 그것은, 당신이다. 당신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얼러주고, 그것의 축 처진 턱에서 흐르는 뇌척수액을 한 벌밖에 안 남은 깨끗한 셔츠의 소맷자락으로 닦아주는데, 깨끗한 셔츠가 한벌뿐인 까닭은 당신이 한 삼 주째 빨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이 챕터 혹은 인물이 드디어 아귀가 맞아들어 이야기가 제대로 되어갈 아슬아슬한 대목인 탓에 당신은 그것 말고 다른 일에 시간을 쓰기가 겁나기 때문이고, 왜 겁나는가 하면 일 초라도 딴 데를 봤다가는 그것을 영영 놓치고 말아서 아기 전체가 영영 추악한 상태에 머물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신은 기형의 아기를 사랑하고,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살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을 미워한다. 정말로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형이고, 역겹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머리에서 종이로 출산이 이뤄지는 와중에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일이 그것에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결함은 당신의 결함이고(왜인가 하면 만약 당신이 더 나은 픽션 작가였다면 당신의 아기는 당연히 유아복 광고 카탈로그에 나오는 아기처럼 완벽하고 분홍색이고 뇌척수액도 잘 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추악하고 지저분한 숨결 하나하나가 모든 차원에서 당신에 대한 참혹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이 죽었으면 좋겠다. 비록 당신이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사랑하고, 닦아주고, 얼러주고, 그것이 제 자신의 그로테스크함에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은 순간에는 그것에게 심폐소생술까지 가하면서도.




이 상황은 아주 엉망이고 슬프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감동적이고 고결하고 근사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진정한 관계다. 그리고 기형의 아기는 추악함이 절정에 달한 순간조차 어쩐지 당신이 스스로의 가장 좋은 부분일 것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건드리고 깨우는 데가 있다. 당신의 모성적인 부분, 당신의 어두운 부분을. 당신은 당신의 아기를 무척 사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형의 아기가 세상으로 나갈 시점이 되었을 때, 남들도 그것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니 당신은 약간 진퇴양난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당신은 아기를 사랑하고 남들도 그것을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곧 남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봐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은 말하자면 사람들을 좀 속이고 싶다. 당신이 내심 완벽함의 배반이라고 여기는 것을 남들은 완벽하다고 봐주기를 바라니까.




아니면 당신은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기적적이고, 완벽하고, 광고할 준비를 싹 갖춘 채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그 시각과 느낌이 옳고 정확한 것이다. 즉, 당신은 자신이 말짱 틀렸기를 바란다. 기형 아기의 추악함은 당신만의 괴이한 망상이나 환각에 불과하다고 밝혀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다면 곧 당신이 미쳤다는 얘기가 된다. 당신은 그동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남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그것의 추악한 기형성에 움찔했던 셈이다. 이것은 당신이 적잖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사실은 이보다 더 나쁘다. 이것은 또한 당신이 스스로 만든 (그리고 사랑한) 것에서, 스스로 낳은 것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틀림없이 당신 자신인 것에서 추악함을 보고 경멸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이 최후의 최선의 희망, 여기에는 그저 당신이 형편없는 부모라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종의 끔찍한 자기 공격, 자기 고문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현실이다. 자신이 완전히, 정신 나간 수준으로, 자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틀렸으면 하는 것이.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는 여전히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재미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니,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그리고 그 재미의 본질에 관해서라면, 나는 내가 소화전만 할 때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좀 희한한 이야기 하나를 줄곧 떠올린다. 중국이라나 한국이라나 아무튼 그런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산이 많은 어느 시골 마을에 늙은 농부가 살았다. 농부에게는 외동아들이 있고 애지중지하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어느 날, 애지중지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노동집약적 농사일에도 꼭 필요한 말이 마구간인가 뭔가의 잠금쇠를 풀고 산으로 내뺐다. 늙은 농부의 친구들이 모두 몰려와서 이 무슨 낭패인가 하고 한탄했다. 그러나 농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며칠 뒤, 애지중지하던 말이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야생마들을 잔뜩 몰고 함께 산에서 돌아왔다. 농부의 친구들은 다시 몰려와서 말이 도망친 일이 알고 보니 행운이라 얼마나 기쁘냐고 축하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농부는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옛 중국의 농부라기보다는 너무 유대인스러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그렇다. 그래서 이제 농부와 아들은 야생마들을 길들이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제 등에 탄 아들을 거칠게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아들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농부의 친구들은 다시 몰려와서 농부를 위로하며 몹쓸 야생마들이 대체 무슨 불운을 가져온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늙은 농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뿐이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며칠 뒤, 중국인지 한국인지 아무튼 그런 나라의 왕의 군대가 마을로 찾아와서, 어디선가 벌어질 찰나인 모종의 끔찍한 피투성이 전투를 위해서 열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신체 건강한 남자들을 모두 징집해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의 부러진 다리를 보고는 일종의 봉건시대의 병역면제 등급 같은 것을 적용하여, 그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늙은 농부와 함께 남겨 두었다. 행운일까? 불운일까?




이 우화는 당신이 작가로서 재미의 문제와 씨름할 때 붙잡는 지푸라기와 같다. 맨 처음, 당신이 처음 픽션을 쓰기 시작할 때, 글쓰기는 전적으로 재미일 뿐이다. 딴 사람이 그 글을 읽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당신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서 쓴다. 당신의 환상과 괴상한 논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쓴다. 그런 일은 정말 가능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 글쓰기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에게 행운이 찾아와서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글로 돈을 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글이 전문가의 솜씨로 조판되고 제본되고 광고되고 리뷰되어 심지어 당신이 (한 번쯤) 아침 지하철에서 전혀 모르는 웬 예쁜 여자가 그것을 읽는 모습까지 목격한다면, 글쓰기는 전보다 좀더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동안은. 그러나 이제 상황이 차츰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데, 더구나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당신은 이제 남들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느낀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러고 싶다. 당신은 이제 자신을 떨쳐버리기 위햐서 쓰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자위 행위란 외롭고 공허한 것이므로-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자위를 대신하는 동기가 되어줄까? 당신은 남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해주는 것이 즐겁다는 걸 알았고, 남들이 당신이 쓰는 새 글도 좋아해줬으면 하고 스스로 간절하게 바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수한 개인적 재미라는 동기는 남들의 호감을 받고 싶다는 동기,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낯설고 예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에게 감탄하고 당신을 좋은 작가로 여겼으면 하는 동기로 대체되었다. 자위가 아니라 이제는 유혹의 시도가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유혹의 시도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제 거절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이 재미를 상쇄시킨다. ‘자아’가 정확히 무슨 일이든, 아무튼 당신의 자아가 게임에 끼어들었다. 혹은 ‘허영’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왜나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글이 대체로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 남들이 당신을 훌륭한 작가로 여겼으면 하는 마음에 기울이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이해할 만한 일이다. 당신은 이제 글쓰기에 아주 많은 것을 걸게 돠었다. 이 일에는 이제 당신의 허영이 걸려 있다. 그리고 당신은 픽션 쓰기의 까다로운 점을 하나 발견한 셈이다. 애초에 이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허영이 꼭 필요하지만 그 어느 정도를 조금이라도 넘어선 허영은 치명적이라는 문제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쓰는 글의 90퍼센트 이상은 남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압도적인 욕구가 동기가 되어 쓰이고 그 욕구에 영향을 받은 글이다. 그 결과, 글은 허섭스레기가 된다. 허섭스레기 작품은 쓰레기통으로 가야 한다. 예술적 진실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허섭스레기 작품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할 테니까 그렇다. 작가적 재미의 진화 과정에서 이 단계에 다다르면, 이젠에는 글쓰기를 북돋는 동기였던 것이 글을 쓰레기통에 처박도록 만드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성이자 일종의 딜레마이고, 이 때문에 당신은 몇 달 심지어 몇 년동안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다. 그동안 당신은 울부짖고, 이를 악물고, 불운을 한탄하며, 이일의 재미는 죄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고 씁슬해한다.




이 대목에서 잘난 척을 해보자면, 이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든 당신의 원래 동기로, 즉 재미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재미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면, 당신은 지난 허영의 시기에 겼었던 추악하고 불운한 딜레마가 알고보면 당신에게 행운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되찾은 재미는 허영과 두려움의 불쾌함을 거치면서 변형된 재미이고, 당신은 이제 그 불쾌함을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나머지, 다시 발견한 재미가 이전보다 훨씬 풍성하고 충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재미는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 잡힌 재미가 충동적이거나 방종한 재미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혹은 모든 역설이 우리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일을 이해한 것이다. 재미를 새롭게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픽션 쓰기는 이제 당신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당신이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 남들 어느 누구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주제야말로 알고 보면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픽션은 이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아니고, 남들이 가장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수단도 아니며, 그보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된다. 이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무섭다. 또한 고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처음 글쓰기를 통해서 벗어나고 싶었거나 가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부분, 바로 그 재미없는 부분을 직면함으로써 이제 글쓰기의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어떤 종휴의 구속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일종의 기적이다. 그리고 이것에 비한다면,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