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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토마스 R.마틴의 <고대 그리스사>를 읽고, 탁월함이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실 고대 그리스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직접민주주의의 실현과 그 실현을 가능케 한 시대를 관통한 철학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철학인 ‘탁월함’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탁월함이란 무엇인지, 탁월함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의 수단이고, 행동의 이유는 더 높은 목적을 향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최종 목적은 무엇을 향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로 행복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의 행복을 찾기 위한 하나의 답변이다. 행복이란 가장 좋은 것, 가장 즐거운 것이며, 이성과 지성의 활동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정의를 토대로,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이룩할 수 있는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최고의 행복은 다음과 같다. 최고의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대상은 완전한 탁월함을 갖춘 상태를 가진 누군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신이다. 고귀하면서도 신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것, 즉 관조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최선의 활동 결과다. 최선의 탁월함을 보고 따르는 활동인 관조는 인간을 완전한 행복에 다다르게 한다. 관조적 활동에 따라 자족하며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하지만, 이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어렵다. 이 상태를 최대한 지속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행복을 이루기 위한 기반들이 마련되어야 하고, 이로부터 차선의 행복이 도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선의 행복은 지적 탁월함의 작용으로 숙고와 선택을 거쳐 도덕적 탁월함으로 나아가고, 이런 탁월함을 실현하는 삶이다. 인간은 탁월함을 갖춤으로써 ‘좋은 사람’이 된다. 이 탁월함을 가지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입법과 정치 분야에 있어 탁월함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국민들에게 어떻게 탁월함을 갖추게 해야하는지, 바른 행복을 어떻게 추구하게 해야 하는지 인간에 대한 철학을 숙고하고, 완성하려고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탁월함이고, 이런 탁월함을 실현함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즉,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실현에 기여하고, 행복과 행복에 수반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탁월함이란 무엇일까? 탁월함은 지적 탁월함과 도덕적 탁월함으로 나뉜다. 탁월함은 성품에서 비롯되는데, 지적 탁월함은 도덕적 탁월함을 실천하는데 개입함으로써 이정표를 제시하는 역할이다. 그 종류로 학문적 인식(보편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 직관적 지성(제1원리, 즉 증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진리를 알게하는 것), 철학적 지혜(학문적 인식과 직관적 지성의 결합으로 모든 보편적 진리를 알게 해주는 것), 실천적 지혜(현실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아가 도덕적 탁월함을 이루도록 하는 것)로 나뉘며, 이런 이성들을 통해 숙고하고 선택하며, 행위로 나아가 탁월함을 실현할 수 있다.
도덕적 탁월함은 감정과 욕망을 다스림으로써 지적 탁월함을 통해 활동을 선택하고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 종류에는 용기(두려움의 극복에 관한 것), 절제(즐거움의 조절에 관한 것), 통이 큰 것(큰 돈을 잘 사용하는 것), 후함(돈을 잘 사용하는 것), 포부가 큰 것(큰 뜻을 가지는 것), 온화(화의 조절에 관한 것), 진실(가진 것을 정확히 아는 것), 재치(사람을 즐겁게 하면서도 예를 벗어나지 않는 것)로 나뉜다. 이런 도덕적 탁월함을 관통하는 원리는 ‘지나침’과 ‘부족함’의 중용을 이루는 것이다. 가령, 용기를 예로 들면 두려움이 과하면 겁쟁이가 되지만, 두려움이 너무 적으면 만용이 되고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뿐이다.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의 중용을 통해 적정한 상태를 이루고 두려움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용기다.
도덕적 탁월함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덕목은 바로 정의와 사랑이다. 결국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탁월함이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 탁월함이 실현된 상태를 정의라 하며, 정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은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덕목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정의는 넓은 의미에서 탁월함들이 실현되고 있는 상태의 정의를 의미하였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정의는 모두가 동등하게 자신의 몫에 따라 공평이 지켜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의 역시 ‘지나침’과 ‘부족함’의 중용을 이루는 상태가 이상적이며, 이 중용의 상태가 기본 원칙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기여에 따라 같은 것은 같고,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공평, 공평을 기하기 위한 비례와 동등성의 고려가 중요시된다.
한편, 사랑은 서로 호의를 지니고 잘되길 바라며, 그렇게 되도록 돕는 성품과 상태를 의미한다. 사랑에 따르면 삶은 함께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유익이나 즐거움을 얻기 위한 사랑도 있지만, 최고의 사랑은 탁월함을 갖춘 훌륭한 사람 간의 사랑인데, 훌륭한 사람들은 도덕적 탁월함에 따라 자신이 사랑받을 몫을 포기하고 타인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즉, 자기희생적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아름다운 자들의 아름다운 사랑인 것이다.
앞의 도덕적 탁월함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을 과다하게 또는 과소하게 행한다면 탁월함이 실현되는데 방해가 되지만, 정의와 사랑은 자신이 스스로 인지하여 자신의 몫과 자신이 사랑받을 몫을 포기한다면 그 탁월함은 오히려 빛을 발한다. 정의에 따라 자신의 몫을 모두 수혜받지 못하고 일부 또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있어 자신의 사랑에 비례하는 것에 상응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희생하는 자가 희생이란 숭고한 가치를 알고, 그 가치에 의해 자기를 희생한다면, 이런 희생은 고귀한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다. 정의와 사랑은 다른 탁월함들과는 달리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정함을 기준으로 비중을 정하고 기여에 따른 비례를 따지며 자신의 몫을 정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상응하는 몫을 주장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지만, 인간의 직관 속에 깊숙이 위치한 공평에 대해서 자신의 몫을 모두 받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탁월함의 실현으로 자신이 희생함을 인지하고 자신의 몫을 타인에게 양보한다면, 자신의 몫에 집착하지 않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타인의 칭송을 받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고귀한 가치에 대해 타인이 그 탁월함의 가치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오직 고귀한 가치가 인정될 소양이 갖추어진 사회에서만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생각이나 평가 따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탁월함의 실현 이유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족의 자세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과 함께하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 날에 행한 것을 회상하는 일은 기쁘고, 앞으로 하게 될 일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도 좋은 일이어서 즐겁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는 풍성한 관조적 활동으로 풍요롭다. 그는 주로 고통과 기쁨을 자신과 함께 나눈다. 그의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동일하고 수시로 바뀌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후회할 것이 전혀 없다.
자기자신에게 고귀한 일을 행해 미덕을 실현하여 스스로 기쁨을 얻고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야말로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이처럼 공동체를 위하면서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타인들에게 자신을 칭찬함으로써 자기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그것을 얻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정의(탁월함이 실현된 넓은 의미에서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고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곧 자신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도 중용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누누이 강조했던 중용일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하늘을 가르키는 사람은 플라톤이고, 땅을 가르키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그가 들고 있는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고 한다.) 나는 현실 세계에서 진리를 느낄 수 없다고 주장한 플라톤보다 현실 세계에서 개별자들에게도 진리가 담겨있으므로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더 끌렸다. 나는 지금도 이 순간 대지를 밟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중심으로 행복을 논하고, 이를 토대로 행복한 개인을 늘리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보다 인간 중심적이면서도 인간 친화적이고 그렇기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매력은 극소수의 선천적 조건을 타고 태어난 일부 소수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과 연습, 실행을 통해 탁월함과 행복이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실천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직접 지금 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이 사며, 죽을 때까지 최소 7번은 볼 명저라고 생각한다.
천재
하긴 쓰인 시기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