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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감상1: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494426&page=1

<햄릿> 감상2: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494427&page=1

<햄릿> 감상3-1: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494428&page=1


10

길든스턴 감옥이요, 저하?

햄릿 덴마크가 감옥이지.

로젠크란츠 그럼 이 세상도 같은 것입니다.

햄릿 휼륭한 감옥이지. 거기엔 수많은 구치소와 감방과 동굴이 있는데, 덴마크가 그 중 최악이야.

로젠크란츠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하.

햄릿 그래, 그럼 자네들에겐 아니지. 왜냐하면 좋거나 나쁜 건 없는데,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니까. 내겐 이게 감옥이야.13)

로젠크란츠 그렇다면 저하의 야망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희의 마음엔 그게 너무 좁지요.

햄릿 오 하느님, 난 호두알 속에 갇혀 있다 해도, 내 자신을 무한 공간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다네내가 악몽을 꾸지만 않는다면.

길든스턴 그 꿈이란 게 사실은 야망입니다. 왜냐하면 야망에 찬 사람의 바로 그 본질이 꿈의 그림자에 불과하니까요.

햄릿 꿈 그 자체가 그림자일 뿐이지.

로젠크란츠 옳습니다. 그리고 야망의 속성이란 공기처럼 너무나 가벼워서,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햄릿 그렇다면 거지들이 실체이고, 왕들과 허세부리는 영웅들은 거지들의 그림자란 말이군.14) 궁정으로 들까? 실토하네만, 난 이치를 따지지 못하겠어.

로젠크란츠, 길든스턴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햄릿 무슨 말씀을. 난 자네들을 내 시종처럼 취급하진 않을 거야.15) 왜냐하면, 자네들에게 정직하게 말하네만, 난 아주 무시무시한 시중16)을 받으니까. 허나 친구간에 터놓고 묻겠는데, 엘시노아에서 뭘 하고 있는가?

로젠크란츠 저하를 뵈러 왔지, 다른 일은 아닙니다.

햄릿 내가 거지 신세17)라 감사 표시에도 빈약하네만, 고맙네. 여보게들, 확실히 나의 감사 표시란 반 푼 값어치도 없어.


13)즉물적이며 사물 그 자체에 머무르는 프로테스탄트적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자체를 거부하는 가톨릭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트리엔트 공회의의 교의가 자연과 은총의 프로테스탄트적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는 자연과 정신, 자연과 이성, 자연과 기술, 자연과 기계의 이원론이나 이 이원론이 변전하는 파토스를 전혀 알지 못한다. 가톨릭에 대해서는 공허한 형식과 형식 없는 질료의 대립이 문제가 되지 않듯이, 이러한 대립물의 통합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는 독일의 자연철학이나 역사철학의 이른바 고차의 제3자라는 것은 아니다. 원래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에 대한 절망도, 대립의 통합이라는 환상적 자부심도 가톨릭에는 없다.

14)로젠크란츠가 반대하는 <야망이라는 꿈>, 햄릿이 반대하는 <야망에 반대되는 꿈> 개념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꿈 개념을 환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확실히 햄릿이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서 거지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따라서 그들의 사고 속에 경제적인 사고방식이 끼어있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게되며, 여기서 햄릿은 야망을 추구하는 기업가를 대변하게 되고, 로젠크란츠는 노동자를 대변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로젠크란츠가 대변하고 있는 노동평의회의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관념이 모든 대표를 부정하는 것에로 귀착된다는 점에 있다. 다만, 로젠크란츠는 극중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신으로써 등장하기에 그 속에서 이중적인 그의 행태가 직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게 된다. 위와 같은 구절은 그의 이중적인 면모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햄릿의 재치있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햄릿이 스스로 경제적 사고방식을 끌어들인 것은, 그가 경제적 사고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며, 단순히 그의 정치적인 의도일 뿐이다. 그의 정치의 개념은 경제사관에 의하여 변용되지 아니한다. 사회적으로 중대한 대립은 경제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가가 노동자에 대해서내가 여러분들을 부양하고 있다고 말하면, 노동자는 기업가에 대해서우리들이야말로 당신을 부양하는 것이다라고 응수할 것이다. 경제적 사고 방식은 이러한 다툼을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다툼이 아니며, 결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및 법적 확신의 여러 가지 파토스에서 생기는 다툼이다. 현대의 부의 진정한 생산자와 창조자가 누구인가, 즉 부의 진정한 지배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도덕적·법적 귀책의 문제이다. 생산이 여지없이 익명화되고, 주식회사와 그 밖의 인격의 은폐가 구체적 인격에의 귀책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단순한 자본가 개인의 사유재산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속물로서 제거될 뿐이다. 기업가와 근로자 쌍방이 경제적으로 생각하는 한, 가톨리시즘이 상술한 투쟁의 고려 밖에 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햄릿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고유한 죄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 그 속에는 기업가의 죄 개념과 노동자의 죄 개념이 서로 상이한 존재론적 인식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어지는 인간들에게 동시에 전가되었다는 아담의 과오가 <원래는 하나의 것 이였다>라는 입장으로써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보았을 때 햄릿은 로젠크란츠에게 대립하는 개념을 형성시킴으로써 대화상에서 이들 양자 간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확실히 햄릿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난 이치를 따지지 못하겠어라는 구절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이로써 햄릿은 가톨릭의 독신주의 관료제를 대변하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추가적으로 따져야할 부분이 남아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햄릿의 복수의 대상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햄릿의 모티브가 된 제임스1세는 논문과 논쟁을 통해서 왕의 신적 권리를 열성적으로 옹호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제임스1세의 모사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사는 예술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종교적, 정치적 박해 같은 당대의 일반적인 불안정함에 더해, 이 시기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에서 파생된 사태 속에서만 신화적으로 탄생할 수 있게 된다. 제임스1세의 아버지인 헨리 단리경은 15662월에 잔악한 방식으로 보스웰백작에게 살해되었다. 같은 해 5월에 그의 어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의 살해자인 이 보스웰백작과 결혼한다. 메리는 자신의 완전한 결백을 확언했고 그녀의 친구들, 특히 가톨릭교도들은 그 결백을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적대자들, 특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들, 엘리자베스여왕의 지지자들은 모두 메리가 살인의 실질적 주모자라고 확신했으며, 종국에 보스웰백작과 마찬가지로 메리 스튜어트는 처형당하게 된다. 제임스1세는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분열상황 속에 내던져졌다. 그는 강탈당하고 납치되었으며, 체포되어 구금 상태에 처해졌고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지만 어머니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자기 어머니의 적수들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적으로 키워졌다. 이러한 분열 한가운데서 제임스1세는 실로 모든 고뇌와 비탄을 자신 속에 응축시켰던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대표의 원리를 옹호하는 이와 같은 시각은 극도로 위험한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임스1세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위험스럽기 그지 없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한 프로파간다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제임스1세로부터 혐오스럽고 반미치광이 같은 편집광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가느다란 다리에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침 떨어지는 혀를 단 우스꽝스러운 뚱보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한편 제임스1세를 옹호했던 지성인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저 유명한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아버지인 아이작 디즈레일리(Isaak Disraeli)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풍자가 그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만약 제임스1세가 큰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문인으로서도 프리드리히대왕과 같은 명망을 누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설명한 내용들에 덧붙여서 이러한 문학사적인 근거는 햄릿의 복수의 대상이 절대자의 속성을 의미한다고 터부시하는 옳지 못한햄릿해석에 대한 반박을 제기한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햄릿이 풍자하고 있는 것들은 엄연하게 물질적인 것에 한정된 즉물적 사고방식과 그에 의해서 나타난 기계화된 경제적 사고방식뿐이다. 그리고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관념을 부정하는 것에로 종착된다. 독신주의 관료제를 대표하는 자는 양자 간의 대립 상황을 지켜보며, 그 속에서 새로운 법을 창출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지상의 대표자는 이 싸움에 참가하지 않는다. 교황은 교회령의 주권자인 것을 자부하지만 세계경제와 침략주의의 커다란 외침 한복판에 위치할 뿐이다. 가톨리시즘의 정치적 힘은 경제적 권력수단에도 군사적 권력수단에도 의거하지 않는다. 이와는 독립적으로 교회는 권위라는 저 파토스를 그 완전한 순수성에서 보존하는 것을 목적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반대물의 복합체가 형성된다.


15)햄릿이 로젠크란츠의 이중성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있다.


16)앞서 설명한 그들의 앞뒤가 다른 이중성을 띈 시중 행세를 무시무시한 시중으로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