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예전에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다가 서두를 여는 글로 바르뷔스의 <지옥>이 나오는 걸 봤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스스로 사회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사회를 엿보며 무언가 진실된 것을 꿈꾸는 아웃사이더의 전형. 그는 사회에서 일할 자리를 구했지만 거기에서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대신 자신이 묵는 방의 벽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을 통해 옆방에 들어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엿보는 데에 온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며 고갈된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웃사이더>가 다루는 글들이 어디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그러다 연이 닿아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 받아, 이 위대한 아웃사이더가 사람들을 엿보며 느낀 것, 혹은 알아내려 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쇼펜하우어스러운 모티브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글이다. 화자가 엿보는 이들 중 대다수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어떻게 하면 필멸하는 자신, 사회,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다 대체로 결국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냉소 섞인 회의를 품는다. 죽음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욕망의 형태는 죽음을 맞이할 주체가 무엇이느냐에 따라 늘 다르지만, 대체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식은 그 스스로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애타게 끌어 모으며 이것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단 쇼펜하우어의 극단적으로 염세적인 주장이 아니더라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매력적인 글인 것도 사실이다. 시인이 불륜 관계 속에 있는 여인과 나누는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여인이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한탄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시가 인상적이다. 문학 속에서 낙원을 찾을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인 화풍으로 시작된 이야기에서 그 결론은 참 의미심장한데, 낙원이 고통을 우리에게서 없애버리기에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 고통 없는 우리는 분명 우리는 아닐 것이라며, 낙원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이오, 행복은 낙원에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며 신이 우리를 구원하려 하더라도 이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최대한 보존하며 구원할 수 있을지를 고뇌해야 할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한탄이 곁들여진다.
그렇게 결국 <지옥>은 몇 번의 방황과 탐색 속에서 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절망과 세계의 무한함 앞에서도 결국 이 유심론적 세계관을 잡고 있는 자신이 그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생각. 현대에조차 우주의 무한함과, 이 무한함을 인지할 수 있는 이성은 별도의 무언가다. 그것은 사람을 극도의 탈력감에 몰아넣는 주제에서 마지막 희망으로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반전이며,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데카르트식 보호막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회의 사람들은 이런 진실을 알지도 못하듯 입에 올리지 않으며, 온통 무의미한 껍데기만이 돌아다닌다. 이를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바로 화자가 엿볼 수 있는 그 내밀한 방에서 뿐이다. 그곳에서 그는 세멜레처럼,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간다움이 누설되는 것을 보며 메말라간다.
되게 좋네요 - dc App
<아웃사이더>... 되게 좋죠...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