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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삼국지에 심취했었다. 여러 커뮤니티에서도 활동하며 삼국지에 관한 글은 모조리 읽어야만 직성이 풀렸는데, 삼국지에서 가장 미스테리하고 신비스러우면서도 가장 논쟁이 되었던 주제는 위연의 자오곡 계책에 따랐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가정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 주제만큼 사람들이 형형색색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때까진 본 적이 없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자체가 나에게 하나의 즐거움이였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위연은 반골의 상이기 때문에 후일 반드시 반역을 꾀할 것이니 미리 싹을 제거하여야만 한다고 간했다. 하지만, 유비의 포용 하에 촉나라에서 중용되며 장안성을 점령하기 위해 지형적, 현실적 위험성이 다분한 자오곡 방면으로 진격해야 한다는 위연의 주장은 그 계책의 실현 가능성이 과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안정 지향의 제갈량의 공고한 세계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 반골적 계책은 아니였을까? 공명의 수명연장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에서도 입구에서 들어가지 말라는데도 굳이 들이닥쳐 촛불을 꺼 공명쇼를 그르치게 한 것 역시 위연이다.
위연이야말로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아니 순응할 수 없는 기질을 지닌 반골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위연이 썩 낯설지만은 않다. 위연의 모습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비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를 눌러 뭉개는 기존의 체제에 분개하며 누군가는 뒤에서 침을 뱉으며 쌍욕을 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무력행사를 함으로써 직성을 풀어야만 한다.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를 규율하는 기존의 무엇인가의 틀에 허우적거리며 기존의 것에 대해 격렬히 반항한다.
우리는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해 반항하지만, 최근 가장 격렬한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반항 중 하나는 바로 종교에 대한 반항일 것이다. 종교는 그동안 세계를 이해하는 최고의 수단이자, 누구나 받아들이는 보편적 진리로 막강한 권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종교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시각은 과학을 비롯해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종교 자체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논리에 대한 비판과 모순 역시 종교의 권위를 상실시키는 주된 요소 중 하나이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역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후자의 방법으로 위협을 가한다.
이 소설은 기독교 교리를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 신뢰하던 사람들이 교리에 의심을 품으면서 체계에 대한 반항과 그에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방황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 반항은 액자식으로 소설 속 등장인물 민요섭과 액자소설 내의 아하스 페르츠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 추상적인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형체 있는 힘이며, 선악을 선택하고 그 응분에 맞는 평가를 받기 위한 허울뿐인 자유가 아니라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받지 않는 절대적 자유이며, 우리가 쌓아야만 하는 것은 하늘을 위한 양식과 선행이 아니라 현실을 딛게 해주는 빵과 기적 그리고 권세다. 신은 하늘이 아니라 대지를 살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지킬 수 없는 명령을 함으로써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인간이 느끼는 죄책감을 토대로 자신의 권위를 형성하는데 지나지 않는 부당한 존재다. 우리를 이끌어 줄 신은 이런 신이여서는 안 된다. 비참한 인간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하늘에 도달할 때 누릴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 영광과 불행을 선고하는 신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 비참한 대지에서의 삶을 위해 현실적으로 무엇을 하든 그 자유를 인정해주며 단지 바라봐주는 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통찰 끝에 민요섭은 기존 기독교 체계에 저항하고 파괴하여, 새로운 신을 창조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실천을 위해서 사재를 모두 털고 현실에서 헐벗고 힘없는 약자들을 위한 가치를 실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세계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들의 미약한 힘만으론 세계의 모든 불행한 것들을 구원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길을 잃고 또 다른 허무를 맞는다.
하늘이 아닌 현실을 위한 모든 자유의 인정은 상대주의를 낳고 각기 다른 가치가 인정되며, 새로운 가치의 기준에 따라 그 가치의 합목적성만 추구된 나머지 합목적성을 위한 수단의 도덕성이 희생되어 버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위라면 사회에, 타인에게 해악이 되는 일이라도 인정되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고통받는 개인을 위한 목적 아래 또 다른 개인을 희생시키는 비인간성이 이빨을 드러낸다. 도덕적인 가치 판단 기준이 결여되고 행위의 도덕적 평가를 할 수 없는 새로운 허무의 안개가 피어난다.
민요섭은 그렇게 도덕적 평가를 내려줄 신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며 변증법에 따라 신과 지혜의 조화를 주장한다. 절대적 도덕을 통해 판결하는 신과 현실 이치에 맞지 않는 신에게 반항하는 지혜, 그리고 도덕기준을 통해 평가를 내릴 신과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를 조화롭게 이루고자 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개편하지만, 그는 너무나 불경했던 죄인지 용서받지 못하고 추락한다. (사실 왜 굳이 신을 다시 자신의 세계관에 끌여들이는 것인지는 이해가 안가지만..)
이 책의 주제는 기독교에 대한, 종교와 신앙에 대한 부정이지만 작가의 생각이 무엇일까 추측하다보면 보다 보편적으로 기존 체계를 부정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개인의 좌절과 반성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이다.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단 하나의 기준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반골들의 파괴대상이 될 뿐이다. 그들은 칼, 망치, 도5끼, 톱 등 기존 체계를 부수기 위해서라면 손에 집히는 것이 무엇이든 들고 나선다. 결국 기존의 기준은 파괴되어야만 할 운명인 것이다. 허물고 무너져버린 곳에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이해하는 가치를 다시 세운다.
인간은 자신만의 가치 기준과 판단 기준을 세우고, 자기 행동의 근거 양식으로 삼음으로써,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을 따져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여 좋고, 옳은 행위를 통해 아름다움을 실현시켜야 하는 일종의 예술가이자, 이 아름다움을 통해 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할 사회적 책무를 지닌 시민이다. 아름다움을 이룩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사회에서 빛내기 위해선 자유와 책임,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의 정립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세우는 자신의 가치 총체는 살아 숨 쉬면서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며, 어제의 생각은 오늘의 생각과는 다르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생각으로 당연히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론 기존의 가지에 새로운 열매가 맺기도 하고, 바람 부는 날에 떨어지는 벚꽃처럼 모든 것이 흩어져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린다. 더 심한 경우엔 한때 나의 전부였던 모든 가치의 총 집합인 나만의 과수원이 일순간 모든 것을 앗아가는 황야의 모래바람에 의해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이런 허무의 고통 앞에서 인간은 평생 몸부림치고, 허무가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안은 인간을 망설이게 한다. 그렇지만, 변화무쌍한 세계의 속성과 여러 가치들이 항상 대립하는 인간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이런 허무의 모래바람과 모든 것이 휩쓸려갈지 모른다는 허무에의 불안 역시 인간이 짊어져야만 하는 몫이다. 모든 것은 휩쓸리고 철저히 기존의 모든 것이 몰락해야만 새로운 희망의 싹이 움틀 수 있고 불안을 이겨낸 토대만이 꼿꼿이 그 자리에 서 있어 우리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절대적 가치 체계가 무너져 버린 것에 대한 절망에 따른 반작용으로 민요섭의 세계는 결국 무너져내리고 끝이 났지만 우리는 사람의 아들의 붕괴와 몰락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허무와 불안을 감내해야만 한다. 우리의 시선은 허무의 공포를 직시하지만 그 공포를 거두어 다시 우리 내면으로 돌려야만 하고, 우리는 반골이 되어야만 한다. 반골이 되어 기존 체제를 부수는 아름다운 파괴를 행해야만 하며, 끊임없는 허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만의 세계를 건립하려는 투쟁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 절실함만이 나를 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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