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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제목의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바로크 판화가 자크 칼로의 작품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에 그려진 풍경을 말한다.
악마란 불가해하고 이지러진 존재들이다. 지상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악한 현상에 의해 '무언가' 있음을 뚜렷하게 인지한다.
하지만 그 '무언가'를 우리는 확연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들은 있는 동시에 없고, 없는 동시에 있고, 있으면 수도 없이 많이 있고, 없으면 수도 없이 많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악마를 볼 수 없다. 잡을 수 없다. 만질 수 없다.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악마에게 보여진다. 잡힌다. 만져진다. 감각당한다.
수없이 많은 악마들이 현실을 떠돌고, 시시각각 비정상적인 사건을 잉태시킨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죽음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죽음은 사건이다. 사건은 결과이다. 결과는 답이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하나의 도출된 답으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걸 한 번 거슬러 가보면, 어떨까? 답이 있다면 그에 반하는 '무언가'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사건은 차근차근 서서히 올라간다... 한 여자의 두통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화자는 한 여자의 두통을 따라간다. 한 여자의 두통을 따라가자 한 여자의 죽음이 있다. 죽음의 과정에는 무엇이 있었나? 기이함과 괴괴함이 있었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음으로부터 '사건'은 비롯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모호한 존재로부터 존재하는 '사건'을 우리는 포착할 수 없다.
'사건'은 다시 사건으로 흘러간다. 수없이 많은 인물들의 단상이 스친다. 이장욱이 그려내는 세계는 자크 칼로의 판화와 같다. 그것들은 인과가 무너져 있다. 그것들은 악몽의 풍경을 닮았다. 그것들은 이단의 성화처럼 추잡스럽고 영웅을 시해한다. 이야기의 모든 과정에서는 무엇도 밝혀지지 않는다. 독자는 강제로 답없는 '추리'의 과정을 따라간다. 그럼 단 하나의 결과가 남는다.
한 남자가 죽었다. 그것은 결과다. 남자는 악마들을 본다. 인과로부터 떨어져나와 흘러내리는 자신의 썩은 몸뚱이를 본다. 이것이 결과다. 원인은 무엇인가?
이장욱의 세계는 모호함으로 뒤엉킨 키메라와 같다. 특히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가장 매운맛이다. 완전히 망쳐버린 요리가 결국 '실패한 요리'라는 결과로써 식탁에 오르듯이, 이 소설에서 우리는 식탁에 앉아 한 인간이 죽는 과정을 무력하게 '관망'한다.
추리의 끝에는 결과가 있다. 우리는 결과를 본다. 우리는 악마가 남긴 무수한 배설물들을 본다.
뒤채이는 세계의 인과에 악마들이 있다. 악마들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결과가 될 때 그들은 보일 것이다.
이장욱이 그들을 그려낼 때 우리는 보일 것이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있다. 우리는 있다. 우리는 칼로의 그림을 본다. 우리는 칼로의 그림을 만진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걸까.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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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 되는데 잠 안 와서 써봄
이전에 <내 잠속의 모래산>이라고 시집 한 권 읽었는데 <칼로의 윾쾌한 악마>는 그거랑 비슷하면서도 열 배는 매운 소설임
이장욱 세계관은 대체로 '층층이 겹쳐지고 산산히 갈라져서 명징하게 관측할 수 없는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세계를 되게 기괴한 분위기로 풀어내서 뭔가 오컬트적인 느낌마저 듦
다른 작품들은 소프트하게 느껴졌는데 이건 유독 하드한 것 같음
처음부터 시체 묘사부터 들어가는데 아주 죽여줍니다
이장욱답게 재미는 보장함
지금은 시집 한 권 더 읽고 있읍니다
순해서 좋내오
즐독
오
재밌었음 순문의 탈을 쓴 가벼운 추리소설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