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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1. 조선후기 서학 사상의 사회적 기능
서학은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된 1784년부터 종교적 의미의 천주교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1790년대에 들어서며 기존 양반층 신도들이 조상제사 문ㄴ제로 대부분 교회를 떠나고, 비특권층 신도와 여성 신도들 위주의 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교회의 신도들은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접했고, 신도들은 이를 통해 인간 존엄과 사회적 평등을 말할 수 있는 준거를 얻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점은 천주교가 하층민에게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갖게 했다. 동시에 이는 기존 지도이념과의 충돌을 야기했고, 왕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일부 신도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정하기도 했고, 외세와의 결탁을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천주교 신앙의 수용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려는 진취적 자세가 있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만인들의 꿈이 내재되어 있는 역사현상이었다. (20~21쪽)
2. 조선후기의 교회와 국가
조선후기의 천주교회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말하고,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천주교의 충효는 천주를 대군대부로 받들어, 지상의 군주와 부모를 상대화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갈등이 발생했고, 당국자들은 천주교를 변혁적인 사상으로 판단하고, 이를 탄압하고자 했다. 저자에 따르면,조선후기의 민들은 전근대적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소망의 일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가는 이를 막고자 했다.
국가는 전통적 사회질서의 강화책의 일환으로 서학서의 유입과 유통을 금지하고, 오가작통법이나 향약 등을 이용해 천주교를 규제하고자 했고, 신도들에게 극형을 내렸다. 결국 교회는 불법적 공간이 되었고, 신도들은 ‘상놈’ 취급을 받았으며, 저자는 이러한 대립은 천주교가 개화기에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낮아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53~55쪽)
3.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자와 수용논리
천주교는 성호학파의 근기남인을 중심으로 수용되기 시작했지만, 1790년대부터 실천적 종교 윤동의 성격으로 비특권적 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한글교리서를 통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봉건 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사회의 형성에 잠재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실제로 일부 신도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정하기도 했고, 외세와의 결탁을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천주교 신앙의 수용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려는 진취적 자세가 있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만인들의 꿈이 내재되어 있는 역사현상이었다. (70~71쪽)
4. 조선교구설정의 역사적 의미
저자는 한국천주교회의 설립과 조선교구의 설정을 근대사회의 형성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한다. 평등사상의 보급은 신분질서가 붕괴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여성의 권익 신장과 어린이의 보호 사상을 통해 한국 근대사회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한글문화의 형성과 외국의 정치와 법사상,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에도 기여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교회가 광범위한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119~121쪽)
2부 1장 『사학징의』의 사료적 특성
『사학징의』는 신유박해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처벌 기록을 정리한 사료이다. 저자는 『사학징의』의 저자를 미상으로 두면서도, 이기경일 확률이 높다고 추측하고 있다. 저자는 『사학징의』를 통해 1784년부터 1801년에 아르는 교회의 신도 수와 구성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전도 상황 또한 알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사학징의』를 매우 중요한 사료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사학징의』의 오탈자와 오기 문제가 있지만 이 같은 문제가 『사학징의』의 사료적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는 『사학징의』 편찬에 사용된 원천적 사료의 발굴 필요성 역시 제시하고 있다. (171~173쪽)
3. 『동국교우상교황서』의 사료적 가치
해당 사료는 1811년에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교황에게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청원한 내용을 담고 있음. 신유박해에서 살아남은 신도들이 1811년에 교회재건운동을 시작하면서 1811년에서 1813년 사이에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동국교우상교황서』를 보내게 됨. 해당 자료에서 신도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고하며 주교의 파견을 요청함. 또한 1801년 신유박해의 과정과 이 과정에서 순교한 대표자 7인의 약전과 43인의 순교자 명단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이어서 빈약한 조선교회의 상황과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235~236쪽)
4. 『조선왕조실록』의 천주교사 자료 연구
해당 장에서 저자는 조선 후기의 『실록』이 천주교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임을 역설한다. 또한 『고종실록』에 대해서도 천주교사 연구에 있어서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한다. 또한 이능화의 역할과 일제강점기의 『조선사고본』 또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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