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초에 노래가 있었다. 이야기는 노래에게서 태어나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야기는 신과 영웅들의 위대한 환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고,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신과 영웅들의 장엄한 이야기가 지배하던 시대, 새로운 이야기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선언하던 근대의 태동기, 이야기는 새로운 형식을 띄기 시작했다. 신과 영웅들의 웅장한 이야기는 자기가 기사문학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우스꽝스러운 노인이나, 야망이 넘치는 청년이 대체했다. 근대의 산물, 소설의 탄생이다.
근대는 인간에게 새로운 선악과를 주었다. 인간은 이성이라는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을 정의하게 되었다. 진보는 선이며, 이를 거부하는 것은 악이다. 그리고 악은 처단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우리"처럼 성장해야 한다라는 새로운 율법이 만들어졌다. 인간은 이제 에덴동산에서 스스로 나와 세상 전체를 에덴동산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 웅장한 계획은 근대의 이야기인 소설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성장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아이가, "성장"해서, 마침내 세상과 "동일"해져서 올바르게 되는 이야기. 바로 성장소설의 시작이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간부터 시작한 간단하지만 강력한 서사,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는 근대적 소설의 상징이다. 이러한 성장소설의 원형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져 왔다. 부푼 꿈을 안고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들은 자축하며 성장에 대한 신화를 계속 생산해냈다. 전 세계의 에덴동산화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성장과 화합이라는 근대의 두 테제는 슬슬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장은 폭력이 되었고, 화합은 억압이 되었다.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헤겔적 사고는 괴물을 잉태했고, 그 괴물 중 몇몇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더 이상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이해불가능한 세계와 접근불가능한 사고만이 떠돌고 있는 카프카적 세계관이 근대의 소설을 대체해 버렸다. 그렇다면 근대의 테제가 무너진 지금, 과연 성장소설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진지하게 진보와 통합을 믿지 않는 지금,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는가. 조각나버린 근대의 환상을 덕지덕지 기워서 흉내라도 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할까?
2.
내청코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근대의 성장소설에 정확히 부합한다. 미숙하고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청춘 남녀가 다양한 경험을 하며 더욱 성숙해지고, 세상과 화해하는 이야기. 고리타분하지만 언제나 감동을 주는 공식과도 같은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여기, 두 남녀가 있다. 남자는 성장이라는 가치에 냉소를 보내며, 여자는 화합이라는 가치를 믿지 않는다. 남자는 나아고자 하는 욕망을 비웃으며, "청춘은 아름답다"라는 테제를 혐오한다. 여자는 동일성이 보여주는 폭력과 위선에 진저리친다. 이 둘은 아웃사이더이다. 친구가 없는 것도 물론 맞지만, 근대의 두 목표 - 화합과 성장- 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근대의 아웃사이더이다.
이들의 반대편에 한 남자가 있다. 하치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실 내 카스트의 정점. 뛰어난 사교성과 능력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 그리고 이들의 무리가 있다. 책의 표현으로는 "리얼충"이라고 불리는 표현. 아마 지금 표현으로 말하자면 인싸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사교성과 능력만으로 인사이더가 아니다. 사실 잘 보면 미우라나 히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남을 헤아리는 섬세함 등은 부족한 편이다. 능력 면에서도 유키노가 더 나은 면도 있고. 그러나 이들은 유키노와 하치만과는 달리, 명백히 인사이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과 화합이라는 근대의 두 테제를 정확히 체화하고 있는, 살아있는 근대의 화신들이기 때문이다. 청춘을 "즐겨야 하는 것", "다 같이 즐겁게 놀아야 하는 것", "성장해야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의 테제는, 외향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무엇보다 자기와 비슷한 생각만이 옳은 생각이라 믿고, 그렇기에 자기와 다름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 하야토 그룹에 정확히 어울린다.
내청코는 근대 성장 소설의 클리셰를 비틀어 버린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테제, 성장과 화합을 꼭 해야할까?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근대 소설의 공식에 의하면, 아싸인 하치만은 "성장"해서, 자기가 오해하고 있던 세상과 화해하고 인싸들과 "동일"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유키노 역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과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의 명령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이다. 하치만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더 성숙해지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의 본질인 외톨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좀 꼬였을 뿐. 오히려 반대이다. 그가 인싸 그룹과 "동일"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싸 그룹이 하치만을 "인정"한다. 하치만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규정짓고 그를 인정하지 않을려는 하야토는 결국 종국에 가서 그에게 동의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한다.
하치만은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은 세상이 원하는 성장이 아니었다. 병든 청춘 남녀 두 명이 상처를 "극복"하고 인싸 그룹과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두 명이 서로의 다름과 아픔을 이해하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아웃사이더 그룹이 그들의 차이를 부정함으로써 극복하는 헤겔식 방식이 아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니체식 방식으로 극복한 것이다. 이것이 내청코가 제시하는 새로운 성장의 공식이다.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나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결함과 부족마저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 획일적인 성장이라는 근대의 환상을 부수고, 자신의 모든 색깔과 층위를 긍정하고 나아가는 것. 남들이 강요하는 방향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상처를 극복하는 것. 동일한 하나라는 기만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 서로 같기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외톨이, 아웃사이더, 이방인, 이들이 근대 이후의 시대의 키워드라는 것을 내청코는 선언하고 있다.
3.
왜 사람들은 이런 외톨이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걸까? 물론 답은 간단하다. 보는 사람들이 외톨이니까. 친구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세상과 잘 맞지 않은 존재니까. 그리고 여기서 근대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이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근대적 인간의 눈으로는 없어져야 하는 존재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근대의 위대한 기획에서 이들은 "동일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근대의 기획은 한계에 부딪혔다. 한국 문학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에서 알 수 있듯이, 20세기는 근대의 기획을 가장 철저히 시도했고, 그 대가도 가장 잔혹하게 치른 시기이다. 가장 강력한 근대의 수호자들도 더 이상 근대의 명령이 역사의 사명이라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무시당한 여성, 노동자, 제3 세계 주민들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청코는 근대의 종언을 서브컬쳐적으로 풀어냈다.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이 책은 성장소설, 더 나아가 근대 소설의 대항서사(counter narrative)이다. 서로 다른 개성의 개인을 단 하나의 색깔로 녹여내려는 근대의 화신인 '인싸" 그룹이, 그들의 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아싸" 그룹을 이해하는 것. 아싸가 인싸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인싸가 아싸를 이해해야 하는 서사.
그렇기에 외톨이들이 열광할 수 밖에 없다. 근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를 "외톨이"로 규정지었고, 외톨이들을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틀린" 것인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지금은 근대의 황혼에 접어들었다는 걸. 그렇다면 외면해선 안된다. 외톨이는 존재하고, 그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 근대가 억압해온 외톨이들이 오고 있다. 더 이상 근대의 이야기인 성장소설은 그 생명력이 끝났다. 외톨이들을 위한, 새로운 소설이 필요하다.
내청코 하실 거 같았슴 - dc App
근대의 가치가 한계에 도달했을때 그 대안을 모색해야한다는 생각은 나도 느꼈음. 근데 대안이 하필 니체라니.
근대정신이란 건 지금보다 한참 전에 박살 나지 않았었나 - dc App
그렇다기엔 근대에 탄생한 두 이데올로기의 종교전쟁인 냉전이 끝난지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고, 여전히 근대의 산물인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치와 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걸. 근대정신이 완전히 박살나길 원한다면 어서 빨리 페미니즘과 PC 운동에 동참하자
애초에 난 이데올로기니 정치니 하는 거엔 관심이 없지만 페미니즘과 pc 주의는 엄연히 근대의 산물이자 현대의 주류, 다른 말로 적폐인 거임. 우리가 한국이라는 모든 인식이 몇십 년쯤 밀린 곳에 사니까 못 느끼는 거겠지만 근대라는 건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온갖 식민지와 제국들이 모습을 감췄을 때 끝장났다고 생각하는데 - dc App
제국주의는 근대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님. 근대정신이라는 말이 모호하고 정의하기 까다로운 것은 맞지만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국이 해체되었다고 근대가 중세나 고대와 같은 인식의 단절, 사회의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그 어떤 근거가 없음. 근대의 산물인 민족 국가 중심의 국제 질서, 천부 인권의 등장,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뢰,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의 등장,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 등 근대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몇 가지는 더욱 공고해졌음. 그리고 페미니즘과 pc주의가 근대의 산물? 애초에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항해서 탄생한 게 포스트모더니즘이고,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게 페미니즘이랑 pc주의인데?
냉전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결국 냉전 시기 서구권과 동구권 둘 다 자신의 경제체제가 보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기반엔 이성을 통한 세상의 진보적 개혁이라는 근대의 아젠다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거임. 다시 말해, 냉전은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어났으며, 근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음. 반대로 페미니즘과 pc주의가 그나마 근대의 아젠다와 거리가 있는 이유는 이러한 사상이 보편이라는 이름의 타자화를 거부하고 억압되어있던 주체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주장하기 때문임.
陽の満ちるこの部屋히노미치루 코노헤야햇볕 가득한 이 방에서そっとトキを待つよ소옷토 토키오 마츠요살며시 녹길 기다릴게♪気づけば俯瞰で眺めてる箱키즈케바 후칸데 나가메테루 하코알고 보니 부감으로 바라보는 상자同じ目線は無く오나지 메센와 나쿠같은 시선은 없어서いつしか心は白色不透明이츠시카 코코로와 하쿠쇼쿠 후토우메이어느덧 마음은 하얗게 흐려졌고雪に落ちた光も散る유키니 오치타 히카리모 치루눈에 드리워진 햇빛도 흩어졌어♪雲からこぼれる冷たい雨쿠모카라 코보레루 츠메타이 아메구름에서 흘러넘치는 차가운 비目を晴らすのは遠い春風だけ메오 하라스노와 토오이 하루카제다케눈을 맑게 한 건 먼 봄바람뿐♪アザレアを咲かせて아자레아오 사카세테아잘레아를 피워서暖かい庭まで아타타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