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갤에서 라노벨이 주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냐는 질문은 실없는 잡담거리도 안 될 정도로 시시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쯤이면 독갤 씹덕들이 디씨 변방의 마이너 갤러리 하나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 생각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하나도 안 믿었다.
독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라노벨 문학 떡밥은 어그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위에 있던 갤러들도 진짜(혼모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눈빛으로 라노벨 념글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완장이 라노벨을 탄압하는 그런 장면을 목격한 것도 아니었지만 화려한 삽화가 수록된 유치한 소설의 부흥 가능성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매우 똑똑한 갤러였던 내가, 어쩐 일인지 귀여운 미소녀니 황당한 사건으로 도착하게 된 이세계니 하는 것들을 독갤러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상당히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니, 사실은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뛰어난 사교성과 능력으로 모두에게 인정 받는 교실 내 카스트의 정점이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며 시작되는 화려한 전생이 독갤 안에 나타나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드는 이 평범한 세계에 비교해 라노벨 이야기 속에 그려지는 세계는 얼마나 매력적이란 말인가.
나도 이런 세계에서 갤질하고 싶었다!
(중략)
하지만 현실이란 의외로 만만하지 않았다.
실제로 독갤이 라노벨을 진지한 떡밥으로 생각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념글에 올라간 라노벨 관련 글조차 수많은 유동들의 몰매로 민망해지기 일쑤였으며, 라노벨 념글들을 갤질하는 내내 노려봤지만 실베에 보낼 수조차 없었다.
독갤의 운영 규정이 정말 잘 만들어졌구나 감탄도 하고 자조도 하며 어느 사이엔가 나는 독갤의 라노벨 떡밥을 그렇게 열심히 보지 않게 되었다.
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래도 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까지 나도 성장을 한 거다.
월간 독갤 떡밥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런 어린애 같은 꿈에서도 졸업해 독갤의 평범함에도 익숙해졌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인류는 아직 달 너머로 나가지 못했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라노벨 감상문이 개념글을 가득 메우는 것도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절대 불가능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머리 한구석에서 멍하니 떠올리며 나는 별 감회도 없이 평범한 독갤러가 되었고ㅡ, 그녀 스즈미야 하루히와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공장에서 태어난 기계다.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 엇비슷한 학교들을 다니다 고만고만한 직장들을 가지고 엇비슷한 가정을 꾸리며 똑같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런 삶이 재밌을 리 없다.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지 않는가?
그런 우리에게 일탈이란 단순한 도피를 넘어, 자기 존재의 인식방법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평범한 인간에겐 관심 없다며 외계인과 우주인, 미래인에게 도발하는 하루히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유치하지만,
그럼에도 프롤로그의 쿈의 독백과 어우러져 독자로 하여금 스며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재밌는 점 중 하나는, 제목과 표지를 차지한 여주인공 하루히가 정작 남주인공 쿈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적다는 점이다.
소설의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대부분의 장면은 쿈이 하루히를 알아가는 (그것도 하루히 본인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가는)과정으로 소비된다. 일탈을 원했음에도 정작 그것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쿈의 모습은 비일상적인 무언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러한 독자의 이해와는 달리 하루히는 쿈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쿈이 느긋하게 일탈을 이해하는 사이, 하루히의 권태감이 폭주해 세계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쿈과 하루히만이 남은 세계.
아담과 이브만이 남은 에덴 동산.
이제 어느 누구도 둘을 방해하지 못한다.
우주인도 외계인도 미래인도 이제부터 새롭게 만들어내면 된다.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된 것이다.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일탈을 맛본 쿈은 하루히에게 키스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
일탈을 원한 거 아니었어?
아니었나보다...
쿈이 하루히를 좋아했던 건 일탈에 대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예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도 그렇다.
씩씩한 성격의 교복 입은 미소녀...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
일탈이고 해방이고가 다 뭐냐
아 아무튼 라노벨은 여주인공이 예쁘고 귀여우면 장땡이라고 ㅋㅋㅋㅋㅋ
다른 씹덕들도 다 이 모양 이 꼴이어서 러브코미디 라노벨이 흥하는 거겠지
라노벨 대회 개최 의도에 벗어나는 글이라 미안
하루히를 들고 온 건 그냥 독갤에 써보고 싶은 글귀가 두 개 있어서 그랬어..
하나는 이 글 1문단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글 맨 밑에 멋있게 적어본다
오와콘이라는 단어가 있다.
일본에서 만든 신조어로, 인기의 절정이 지나고 내리막길에 접어든 컨텐츠를 이르는 말이다.
2000년대 초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하루히도 무심한 시간의 세례 끝에 오와콘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수의 라노벨 석학들이 모인 독갤 라노벨 리뷰 대회에서 하루히의 이름이 일언반구조차 되지 않는 현재의 모습은 2023년 라노벨 시장에서의 하루히의 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하루히는 더 이상 읽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십여 년 전 하루히가 불러온 광풍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밖에 남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루히가 만들어낸 씹덕 문화의 새 지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난 오히려 되묻고 싶다. 쿈의 만연체를 잊은 당신들에게 말이다.
"너희들...
정말로 스즈미야 하루히를 잊은 거냐...?"
아니 첫문단 자체가 패러디였네ㅋㅋㅋㅋㅋ
독갤이라는 심판이 아닌 끊임없는 유예와 법 그 자체가 아닌 법의 문지기들과만 관계하는 카프카적인 공간에서, 라노벨이라는 체제에 대항하는 유쾌한 반란을 꿈꾸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