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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푸른역사, 2011
저자는 ‘문화투쟁’으로 강이천의 행적을 규정, 또한 김건순이 노론 안동 김씨 출신이지만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관심이 있었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았음을 언급함. 김건순의 생애 역시 조명.
『정감록』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 『정감록』은 영조 대부터 민간에 널리 퍼지기 시작 함경도에서 시작하여 18세기 말에는 남부 지방에까지 확산. (44쪽) 저자는 『정감록』과 천주교 등을 ‘소문화’로 규정 (46~47쪽) 저자는 양반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변절한 이유는 『성경』 혹은 그와 비슷한 교부철학을 담은 교리서를 읽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49~52쪽)
저자는 강이천이 천주교 신자이며, 교회에서 버림받았으나. 그의 가문은 타격을 거의 입지 않았다고 서슬함. (58~60쪽) 강이천 사건을 문화투쟁으로 정의함. (60~62쪽) 강이천은 유망한 선비였으나, 소품을 읽기 시작. (74~75쪽)
정조는 강이천과 연관된 안동 김씨 김건순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극적으로 처리 (80~84쪽) 저자는 강이천이 김려와 숙의한 다음 스승이나 진배없는 이병정을 찾아가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부탁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85~86쪽) 정조는 강이천 사건을 선비들의 학풍과 공부 문제로 보고 정학과 올바른 공부 방법을 강조 (110~113쪽) 정조의 소품 탄암으로 소품은 크게 위축 연암 박지원의 글 역시 마찬가지 (114~119쪽) 1797년 겨울에 소품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이름 (128쪽)
정조는 소품이 서학(사학=천주교)로 변질될 수 있음을 우려함. (134~139쪽) 저자는 문제반정이 남인과 소론 노론에 대한 견제책이었으며, 노론의 남인에 대한 공격을 개인적 문제로 환원한 것이었다는 유봉학의 견해를 비판함. (142~143쪽)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정조의 문체반정 이후 소품은 더욱 성장하지 못했고, 양명학도 힘을 읽음. 그러나 사상 자체를 꺾지는 못함. (143~144쪽) 정조는 진산사건 이후 충격을 받고 문체반정에 착수(145쪽-강명관 안쪽과 바깥쪽) 저자는 문체반정으로 정조가 미래 사회에 대한 지식인들의 상승력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고 평가함. (146쪽) 유봉학과 박광용의 연구는 정옥자에게서 영향을 받음. (147쪽) 문체반정으로 처벌받은 정파는 노론 외에도 존재 그리고 그들은 젊은 층 (148쪽)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이단을 겨냥함. 정조는 사학을 없애기 위해서는 소품부터 없애야 함을 강조. (152쪽) (강세륜은 영남 출신의 남인) 정조는 박지원을 면천군수로 임명하면서 천주교의 확산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 (164쪽)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 천주교회는 가성직 제도를 운영 권일신을 주교로 삼고, 이승훈과 충청도 자역의 이존창, 전라도의 유항검 서울의 최창현 등의 인물.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신부를 요청, 1795년 6월 주문모 입국 여러 종류의 교리서가 간행 및 번역 (178~179쪽) 따라서 저자는 『성경』 등의 교리서를 1790년대의 조선천주교회 구성원들이 수용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이 때문에 신자들이 천주교에 경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83쪽)
강이천은 주문모를 만나 큰 배를 동원해 섬에 들어가 병사를 기르자고 제안함. → 이에 대한 이병모의 변호 (198~199쪽) 김거순 역시 주문모에게 섬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건의 (223쪽)
김건순과 김백순 등은 생사 문제와 도교 등의 사상에 관심. 이후 천주교로 넘어감. (294~295쪽) 안동 김씨인 김건순은 교회 내에서 교리서의 편찬을 맡음 (306~307쪽) 조선천주교회는 강이천을 외면함. (311~314쪽)
저자는 김건순은 주문모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던 종교적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강이천은 천주교를 통해 현세지향적이고 정감록적인 도술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평가함. (322쪽)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대박)을 통해 조선 왕조의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선교의 자유를 얻고자 함 (328~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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