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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형, 「신유사옥(辛酉邪獄) 이전 천주교에 대한 국가적 대응과 그 정치적 의미 :천주교에 대한 여론형성과 사회의 보수화적 관점에서」, 『정치사상연구』, 28(1), 2022 


신유사옥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정치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에서 동시에 진행. 그러나 두 갈래의 연구는 신유사옥의 인과관계에 집중 따라서 개혁적인 정조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라는 대립 관계가 형성. 이는 신유사옥이 국가에 의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였던 요인과 여기서 희생당한 인물들 중 대다수가 남인 시파였기 때문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에 문제의식을 느낌


따라서 정조대 이전의 천주교 문제에 대한 국가적 대응과 의미를 알아보고자 함.


1784년 교회 설립 이후 을사추조적발사건, 반회사건, 진산사건 등을 거치며 천주교에 대한 지식인들과 국가의 경계심이 늘어감. 이미 많은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무부무군’의 종교로 인식. 정조는 진산사건 이후에도 천주교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치 않음.

진산사건에 연루된 이승훈 권일신에 대해서 같은 남인이었던 무명자 윤기 등도 엄격한 처벌을 주장. 윤기 등은 천주교로 인한 사회적 질서의 붕괴를 사법적 원칙보다 더욱 중요시. 즉 진산사건을 정치적 문제 이전의 무제로 인식 (107쪽) 박지원 역시 남인 천주교도들을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 (노대환, 2008, 205~207쪽) (108쪽) 이는 정조의 과도한 남인 보호가 그의 공정성을 의심받게 함을 의미함. (108쪽) 정조의 남인 보호는 당대인들에게 불공정하거나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인식. (109쪽) 

정조는 이후 비밀리에 측근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천주교도들을 조사하게 하거나, 천주교도 최필공이 감화된 사례를 이용해 교화를 강조함. 하지만 정조가 천주교에 관대했다고는 볼 수 없음. (110~115쪽)


결론: 내용 요약 (115~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