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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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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 문단속 감상문이라는데 ㅅㅂ 암호를 적어놨네
이게 무슨 내용인지 그리고 이런 암호처럼 쓰는 글쓰기를 뭐라 하는지 알려줘!
도와주면 싸이버거 쏠게

23-052. 김시종 <잃어버린 계절>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규모 9.0의 지진, 쓰나미, 원전 폭발로 이어진 미증유의 재난.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 이은 신카이 마코토 3부작의 완결 <스즈메의 문단속>은 12년 전으로 동행(同行または東行)하며 검게 덮어버린 일기장의 상흔을 문으로 형상화해 다시 여닫는다. 동일본지진이란 사건은 — 스즈메의 일기장에 담긴 — 기억의 회복을 통해 아물고, ‘도래’와 ‘언제나 이미’를 하나의 사건으로 묶는 끈이 사랑의 창조라는 점에서 데리다와 바디우와 들뢰즈도 연합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스즈메가 덧칠한 일기장이 아닐까 싶은데 ‘왜 그랬을까?’가 명료하지 않아서 극장 문을 나선 뒤, 영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12년 전, 그러니까 미취학 아동이 이례적으로 몇 장에 걸쳐 일기를 쓴 3월 11일. 또렷한 기억을 — 의식적으로 — 무의식에 구겨 넣은 것은 그날의 일이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였기 때문일테고, 그래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었을게다. 화해하지 못한 억압의 회귀는 추억이 아니라 환난이라서 생은 감옥이 되고, 스즈메는 수차례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무한한 자기 체념. 그 힘이 역설적으로 구원이 되는 여정을 신카이 마코토는 그려낸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인 것을. 절망은, 혹은 몰락은 지진처럼 상징계에 균열을 내고 실재를 — 이를테면 미미즈를 — 비로소 응시할 수 있게 한다. 이에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미처 알지 못하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으로 향한다. 에히메 현의 저녁, 스즈메와 치카의 대화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절망을 딛고 도약하는 신앙의 기사.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키르케고르에게 닿았다. 경이로운 일이다.

하이데거에서 라캉을 경유하여 데리다로 가는 길은 모두 키르케고르란 지반 위에 있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 환언하면 무한한 체념의 기사에서 신앙의 기사로의 도약은 등정이 아닌 침륜함으로 이루어진다. 영혼의 계곡으로 내려가 닿은 영성의 정상(James Hillman, 「Peaks and Vales: The Soul/Spirit Distinction as Basis for the Difference between Psychotherapy and Spiritual Discipline」, 1976). “하늘로 올라서 솟구치는 느낌보다는 땅으로 떨어지며 지면을 조명하는 게 중요했다.”(신카이 마코토)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은 상술한 혼란스런 역설을 패전과 해방으로 정돈한다. 1945년 8월 15일, 황국 소년에게 패전은 일본어로 된 서정의 몰락이었으나 동시에 “자신을 내부로부터 식민화했던” 서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이 해방은, 그 해방의 문을 열고 나면 자연(自然)이라 여겼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 라는 당신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거기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던 사람과 / 거기 아니면 이어갈 수 없는 목숨 사이에서”(「마을」) 탈주의 막막함은 비롯되고, 머리는 깨어났으나 몸은 묶인 ‘수술 중 각성’에 갇혀 정신의 승리도 서서히 지쳐가거나 미쳐간다.

4. 3사건으로 밑바닥에 엎드린 김시종은 — 스즈메가 그랬던 것처럼 —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이켜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자들의 고향”인 본향을 찾아 나선다. “고향이 / 돌아갈 나라에 있기 위해서는 / 멀리 뼈를 묻을 고향을 다시 한번 가져야 한다.”(「귀향」) 본향은 어디에 있을까. 본향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상징 바깥에는 실재가 없고, 그 균열의 틈새로만 미궁은 제 속내를, 내부세계의 외부세계의 내부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미궁 한복판에 서 있는 십자가.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 고난이 우리를 성화시킨다. “아무리 쌓아도 높이를 얻을 수 없는” 절망이 “그 멍드는 나날 속에서 높이 대신 깊이를 향해 파고들”도록 한다. 무엇을, 절망은 파고드는가. 그것은 언어로 구축된 내면의 질서인 상징이 아닌가. “식민지 소년인 나를 열렬한 황국 소년으로 만들어낸 예전의 일본어와 그 일본어가 자아내던 음률의 서정은 삶이 있는 한 대면해야 할 나의 의식의 업(業)과 같은 것이다.”(92) 상징은 당연한 일상이며 “널리 퍼져 있는 한 편견이 아니다. / 그것은 만들어진 상식이다.”(「잃어버린 계절」)

만들어진 상식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식의 세계는 하나의 상자고, 상자 안에서 완결된 상식을 부정한다는 것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몰락을 택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세상에 거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Resident Aliens)이 있다. 그들을, 어느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변론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 각각의 몰락은 하나씩의 질문을 낳고 그 질문과 더불어 새로운 윤리학이 창안된다.” 그렇다면, 김시종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천국은, 신이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는 곳이다. 그곳은 일생을 “어떤 색도 바래지고 마는 / 터질 듯이 하얀 헐레이션 계절”(「여름」)로 보내온 자들의 몫이다. 자아, 즉 육화된 정념을 부인하고 자기(selbst)를 찾아간 단독자들, 그래서 세계의 일각을 침몰시킨 사람들. “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만,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한 모든 강건함과 안전함을 내려놓을 때만 하느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다. 오로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하느님은 인간의 환영으로 변형된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시고, 인간은 하느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할 것이다.”(매튜 D. 커크패트릭, <쇠얀 키에르케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