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딴 것도 문학임?
이딴 것도 문학임? 독갤 내에서 이른바 라노벨이란 장르에 대한 멸시는 흔히 보인다. 그리고 내 생각 역시 다르지 않다. 2010년대 초 조지 오웰과 알베르 까뮈,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들을 탐독하는 한편 당시 디씨를 강타했던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리가 없어>란 작품도 본 적이 있다. 나는 당시에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확실히 서있지 않았지만, 확언했다. 이딴 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그 뒤로 양서에만 집착했다. 난 장래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런 명확한 목적 아래 현실에서, 책에서 표본이 될 만한 인물들을, 사상이나 행동들을 찾아 헤맸다.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많으며, 죽기 전에 나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최대한 선현들의 위대한 사상을 흡수하고 재창조하려면 시간이 모자란다. 합리성에 따라 시대를 살아남은 고전을 읽어야 했고 어줍잖은 작품들은 시간낭비이자, 돈낭비였다.
미학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예술 사조가 이미 존재했다. 예술작품에서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방하고 그 모방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두고 고전주의라 일컫는다고 한다. 이런 경향의 시초를 따져보면 모든 개별자에 보편적 진리가 담겨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전주의의 바이블인 <시학>에 따라 작성된 작품들을 최고의 미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한다.
<시학>에 따르면 시의 모방대상은 우리보다 나은 인간이며, 시의 목적은 도덕적 성품을 기르는 한편,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의 배출과 정화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탁월함을 갖춘 인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전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지치는 순간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양서만 읽다보면 양서인지에 대한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은 양서라 일컫는 작품을 읽었지만, 특별한 감흥이 없을 때 흘러든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나 당시로써는 시대를 초월하는 창조성이라 인정받아 고전이 된 경우가 특히 그렇다. 이런 경우 동시대의 범속한 작품들을 읽어봐야 살아남은 고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딜레마에 빠진 요즘 나는 통속적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아래 적당한 것이 없을까 눈을 돌리게 됐다. 고전의 시기에 작성된 다른 평범한 작품들은 내 능력으론 구할 수가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 무엇일까 하던 차에 통속적인 작품들은 시대를 초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독갤 동네북 라노벨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내여귀>의 여파로 인해 아무거나 읽을 순 없었다. 이전에 독갤 추천을 받아 만화로 재밌게 봤었던 <3일간의 행복>이라는 작품을 다시 읽어보며, <시학>을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비극은 양념을 친 온갖 언어를 곳곳에 배치해, 낭송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시학, 1449b 24~28>
운율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시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플롯을 극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즉, 서사시의 플롯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하고, 전체적으로 통일되고 완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생명체처럼 전체가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서사시 고유의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학, 1459a 18~22>
이 작품은 공연을 위한 비극은 아니지만, 서사문학으로서의 비극적인 요소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비극적인 성격이 눈에 두드러진다. 일단, 내용을 살펴본다.
80년을 살 생각이었을 때의 나에게는 무의식 속에 “앞으로 60년이나 있다.”라는 느슨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앞으로 석 달 밖에 남지 않게 되니 “뭔가 해야만 한다.”라는 초조감에 휩싸였다.
<3일간의 행복>에서 일깨워주는 것은 죽음을 직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외면했던 인간의 진실과, 행복을 위해 눈을 뜨는 인간의 모습이다. 수명, 시간을 파는 것이 주요 발상이다.
쿠노스키는 자신의 남은 수명 3개월을 제외하고 모두 팔아치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사망이 언제인지 확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죽음은 인간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비극적 소재이다. 모든 사람들은 확정적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어 보편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는 것은 자신에게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확정적인 사건에 대한 모방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쿠노스키를 보며 우리 역시 두려워하며, 연민을 느낀다.
한편 미야기는 수명을 팔아치운 인간의 돌발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원이다. 감시원으로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어머니의 사망 이후 미야기는 수명 대신 자신의 시간을 팔았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을 부당하지만 묵묵히 감내하는 미야기를 보며 우리는 정의 관념에 어긋나는 부조리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연민을 느낀다.
두 주인공은 각자의 인생이라는 비극의 주인공이며, 100미터 이내에서 각자 상연되는 서로의 비극을 직접 감상한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와 처지를 인정한다. 각자 상대를 보고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죽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을 위해 모든 행위를 하고, 그것은 그 자체로 원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만 원하며,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면(만일 다른 목적을 위해 그것을 선택한다면 이 과정이 무한대로 이어져서 우리 욕구는 공허하게 될 것이므로),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그것은 분명히 “좋음”임과 동시에 “가장 좋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아는 일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지 않겠는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4a 18~24>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더 나은 내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사상이다. 쿠노스키는 자신의 희망의 근거였던 히메노를 찾아가지만 좌절한다. 히메노와의 희망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쿠노스키와 미야기는 서로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은 각자의 비극에선 주인공일지라도 본질적으론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그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경험하고 괴로워하며 서로의 처지에 점점 공감한다.
이런 공감은 점차 발전한다. 작품의 설정상 미야기는 수명판매자를 감시할 때는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늘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 쿠노스키는 보이지 않는 미야기와 대화하고 스킨십하며 정신병자로 오인받을 염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기를 인식한다. 사회로부터 낙인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해를 입는 것보단 미야기를 우선순위에 둔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이 즐거워지려면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친구와 더불어 지각해야 하는데, 그런 지각은 삶을 함께하고 말과 생각을 공유함을 통해 생긴다. 인간의 경우에 삶을 함께함이란 가축의 경우와는 달리 같은 장소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70b 10~14>
완전한 사랑은 좋은 사람들, 즉 미덕을 지닌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사랑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좋은 사람이어서 서로 잘되길 바라고, 그들 자신도 좋은 사람이다. 진정으로 친구를 위해 그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56b 7~10>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최종적으로 가장 좋음 즉,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행복은 탁월함의 행위를 통해 달성할 수 있으며, 여러 탁월함 중에서도 정의와 사랑은 최고의 탁월함이다. 미야기는 자신의 몫을 줄여서라도 타인을 위하는 정의(좁은 의미의 정의이자, 공평이 지켜지는 상태의 정의)의 사도이자 고귀한 행위자이며 쿠노스키는 희망의 전도사로 누구보다 자기희생의 극한을 추구함으로써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 탁월함을 지니고 행복의 길로 가는 구도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인간들은 서로를 좋은 것으로, 친구로 대한다. 친구로서의 최고의 관계는 유익이나 즐거움과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자체, 좋은 것에 따라 서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말과 행동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이루어진다. 쿠노스키와 미야기의 아름다운 이상적 모습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기며, 미적 가치를 보여준다.
사실 쿠노스키와 미야기의 모습이 뭐가 인간적이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혹시 모를 이 작품을 읽을 사람들을 위하여 너무 상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최대한 스포일 수 있는 내용을 생략하고 그나마 폭로해도 무방한 부분만을 설명 대상으로 삼아 설득력이 떨어져 아쉽지만, 혹시 모를 장래의 독자를 위해 넘어가는 점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어떤 사건이 앞에서 말한 대로 통일성을 지닌 상태로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그 변화 속에 반전(상황이 앞에서 일어나는 것과 정반대로 일어나는 것)이나 인지(무언가를 모르다가 아는 상태로 바뀌는 것)가 들어 있거나 둘 다 들어 있으면 “복합” 사건이라고 말한다. 반전이나 인지는 플롯 자체에서 발생해야 하므로, 앞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로 필연적이고 개연성 있게 일어나야 한다. <시학>
예상치 못한 반전과 인지는 이 작품에서도 존재한다. 작품 분석을 위해서라면 절실히 필요하지만 상세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혹시나 이 작품을 읽을지 모르는 장래의 독자를 위해서다. 나는 작품 내 인지와 반전이 극적으로 긴장을 더하는데 톡톡히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 외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두 가지다.
첫째로, 초반부 반사회적 인간에 대한 심리 묘사다. 일정 연령대에 특히 많이 분포되어 있는 이 유형의 인간들의 심리를 보고 있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떠오른다. 서술은 쿠노스키의 일기 형태로 설정되어 있고 이 새끼 짜증나게 하네 의 전형인 단문의 툴툴거림이 오히려 심사가 뒤틀린 20세의 반사회적 인간 모습을 드러내는데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미문으로 유려하게 작가의 아름다운 문체를 뽐냈다면 이 역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둘째로, 수명을 판다는 발상이다. 수명을 판다는 것은 현실에서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 작품에선 의도적으로 쉽게 인식할 수 없는 죽음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사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개연성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상상력은 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현실에서 동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작품 내 반드시 필요한 한 구성요소로 활용될 수 있다면 그 정당성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 수명을 사는지, 어떻게 수명 여부를 알 수 있는지 부가 설명을 배제하여 작품의 분량과 세계관의 크기를 방대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적당한 분량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인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분투’에 집중한다.
이딴 것도 문학이다.
후세에도 읽히는 고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 동시대를 뛰어넘는 창조성뿐만 아니라 자기가 꾸며낸 서사, 형식 등 개별성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이끌어 내고 통찰을 주는 작품이다.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보편적 진리를 자신의 개별적 상황에 대입해 몰입함으로써 즐거움을 얻고 작품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두 주인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전형적인 비극적 인물로 죽음이란 거대한 힘에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에 놓인 인간이라는 소재를 다룬 문학작품 앞에 우리는 ‘눈 앞에 죽음을 앞뒀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물음과 함께 작품 내적인 감상에 이른다. ‘최고의 사랑은 무엇인가? 서로를 위한 희생이 가장 고귀한 수준의 사랑의 단계인가?’ 에 대한 의문과 함께 사랑에 대한 깊은 감정을 들이마시면서 우리의 영혼은 정화의 단계로 나아간다.
앞서 얘기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품성 발전을 위한다는 시학의 목적 이외에도 순수하게 내용이나 형식을 음미하거나 예상해보는 재미도 있다.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쿠노스키와 미야기가 처한 객관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결말 또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그들이 진정 불행할 것인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각자 비극의 공연을 마친 뒤 막을 내리고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가 사랑을 통해 행복의 새로운 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휘갈긴 조악한 글은 어떤 식으로든 <3일 간의 행복>을 문학의 범주에 넣으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사실 글이 너무 덜 떨어진 거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성자의 능력의 부족도 있고 혹시 모를 이 작품을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스포가 될 것 같아 작품의 주요 결말 부분과 반전이 일어나는 부분 등은 모두 제외했다. 사실 이런 부분들을 포함해서 얘기한다면 더욱 내용이 풍성하고 작품에서 왜 여운을 느끼는지 감정이 정화되는지 더욱 쉽게 이해가 되겠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을 생각이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다 거두고 소설을 읽고 난 뒤 한 마디로 단언하자면 재밌었다.
고전 양서만을 고집해 읽다보면 작가의 압도적인 사상에, 난해한 문체에, 읽을 수 없는 번역에,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좌절을 느끼며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순간이 종종 있다. 던져봤자 비싼 책만 망가진다. 고뇌로 인한 피로에 지쳐있다면 읽고 있던 고전을 잠시 내려두고,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미적 가치를 일깨울 수 있는 문학성을 지닌 라이트문예를 종종 즐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 다 덮고 생각해보니 결은 다르지만 희생과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슌킨 없고 사스케만 있는 21세기 슌킨 이야기 같은 느낌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책은 만화책도 재밌으며, 인용은 현대지성판 시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참고했다. 끝.)
독갤에서 미아키 스가루를 다 보네
굿
미아키 스가루가 원래 인터넷 쿨찐 감성 저격수임
옛날 독갤 라노벨픽 중 하나잖어 하루히 1권 4권, 늑대와 향신료, 3일간의 행복,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