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 청소년한테 수레바퀴 아래서를 왜 읽히는지 이해가 안감 - 독서 마이너 갤러리 (dcinside.com)
사실 이 글 읽고 데미안에 대해 쓰려다가 거의 다 써놓고 뭔가 맘에 안들어서 걍 임시저장만 했다가 데미안 떡밥 다시 돌길래 적당히 마무리해서 올림.
나는 예전에 데미안을 몇 번 까는 글도 썼고, 헤세를 좋아하지 않는 편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헤세 책도 많이 읽었고, 데미안도 엄청 많이 읽음. 싯다르타는 한 3번 정도 읽었고, 데미안은 완독만 5번에 중간중간 읽은 거까지 합치면 한 10번은 읽은듯. 내가 헤세가 거품이니 데미안이 거품이니라고 하는 건 솔직히 말해 그만큼 좋아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더 보여서인 것도 있음. 그러면 왜 내가 데미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데미안은 전형적인 성장소설임. "기존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어 나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라" 라는 데미안의 핵심적인 테제는 개성을 중시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테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임. 애초에 성장소설의 시초라고 불리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만 하더라도 근대에 쓰여진 소설이니까.
그렇다면 성장이라는 게 다 근대적인 개념이냐? 라고 물으면 그건 아님. 성장이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근대의 성장은 다른 시대와 다른 독특한 면이 있음. 바로 개인의 개성적인 성장임.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라는 정치적인 삶을 매우 중요시 했으며, 중세 시기는 집단성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집단을 중시했음.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회화는 점점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문학은 영웅들의 노래 대신 개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와 개인의 내밀한 심리를 표현한 소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음. 종교개혁 이후 성경을 해석하는 주체는 사제나 교황이 아닌 신도 개개인이 되었고, 철학은 신이 아닌 인간을 진리의 제 1 주체로 삼게 되었음. 이제 개인의 성장의 목표는 공동체적 삶에 녹아들고 더 나아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며 성장하는 게 된 거임.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변증법적 성장임. 대표적으로 파우스트를 보면 알 수 있음.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선한 길로만 가지 않음. 그는 처녀를 타락시키고, 왕국을 망가뜨리며, 이교도의 세계로 넘어가는 등 선과 악을 넘나들며 하나의 통합적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 이것이 바로 근대적 개인임. 고대 그리스처럼 명예와 미덕을 중요시하는 삶도 아니고, 중세처럼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도 아닌,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며 나아가는 인간상. 이것이야말로 근대적 개인임. 사실 근대적 개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글이 몇 개는 나올 수 있고, 또 나와야 하지만 좀 거칠게 요약하면 그렇다는 거임. 어 이거 틀린 거 같은데? 하면 너 말이 맞음. 근데 어떡해, 이거 제대로 설명할려면 하루 죙일 글만 써야 하는데.
그렇다면, 데미안은 이러한 근대적 개인이 만들어진 과정을 그저 또 한번 다시쓰기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딱 그정도로 할 수도 있음. 하지만 데미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음. 바로 고대에 잊혀졌던 철학인 영지주의를 끌어들여서 새로운 성장의 개념을 써내려 한 거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영지주의적 개념을 통해, 갇혀 있던 새는 영지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거임. 또한, 갇혀 있던 싱클레어에게 와서 아벨과 카인의 은유를 통해 진리를 알려주는 그 모습은 흡사 악신 데미우로고스의 품에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진리를 가지고 온 예수의 모습과 겹침. 기존 권위에 억눌려져 있던 싱클레어에게, 기존 잘못된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주기 위해 데미안은 영지를 가지고 싱클레어에게 다가왔던 거임.
그렇다면 데미안은 악신의 질서에 갇혀있던 싱클레어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내려온 영지주의적 예수이며, 그의 도래는 성전의 휘장을 찢고, 허레허식으로 가득찬 근대의 율법을 철폐하는 일이었을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함.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하는 신과 같은 아브락사스" 라는 그의 이상향은 결국 변증법적 성장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 야곱과 천사의 싸움 얘기 역시 마찬가지이고. 데미안은 고대의 잊혀졌던 철학인 영지주의를 끌어들이면서까지 넘어서려 한 건 그냥 기존 권위였을 뿐, 근대의 철폐가 아니었음. 예수의 등장은 유대의 민족 종교였던 유대교를 세계 종교로 만들었으나, 데미안의 등장은 근대를 넘어 새로운 성장을 고민하기보단, 그저 기존 철학을 다시쓰기 한 것에 불과하다는 거임. 영지주의를 썼다면 끝까지 영지주의적 사고관을 밀어붙였어야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영지주의를 근대적으로 해석해버려서 결국 기존 근대 철학에 머무르게 된 거임.
이게 헤세의 결정적인 문제점임. 싯다르타는 불교적 방식, 데미안은 영지주의적 방식이라는, 서양 주류 사상과 대치되는 개념을 끌고 와서 근대적 가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임. 하지만 그 결론은 지극히 근대적이라는 거임. 새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지만, 여전히 "새는 날아야 한다"라는 원칙에 매여있는 상태임. 근대적 사고를 넘어선 사고를 원했더라면, 그 한계까지 성찰했어야 함. 하지만 헤세는 그러지 못했고, 그게 내가 헤세와 데미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임.
뭐 솔직히 말해서 저런 쓸데없는 소리들 다 치우고 나는 성장이니 진보니 하는 것들은 짜증이 나고, 이상의 <날개> 같은 음침하고 뒤틀려있는 책들을 사랑하는 병들어있는 힙스터이기 때문에 데미안이 싫은 거긴 한데, 뭐 굳이 이유를 찾자면 있어보이는 개념들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거 같으나, 결국 했던 소리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아쉽다는 거임. 나는 열등감에 쩔어있는 찐따새끼이기 때문에 저렇게 하하호호 나아가는 거 꼴보기 싫음.
사실 쓰다가 뭔가 이상해서 걍 안 쓰고 버려둔 건데 걍 적당히 마무리해서 올려봄. 반박 시 니말이 맞음.
개추 주고싶다
https://klyp.fyi/pomf
근대적 개인이 뭔지 '써줘'
글싼이도 결국 자기를 찐따새끼로 비유하여 헤세가 물로켓이라는 사실에 확정타를 날리지 못하네요~ 어둠의 헤사모나 만드세요~
헤르만 본인은 그냥 실존주의 유행 따라간건데 평론가들이 까를 만든 느낌
나도 항상 이게 의문이었음 결국에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추구하던 아이온이 무엇이었느냐 핵심은 없고 에바부인이라는 상징성만 부여됨
개추를 와바바박
메이스닉 프로파간다를 설파하기 위해 영지주의를 가져온거다.
ㅋㅋ 싫어하는 이유를 무어라 주저리주저리 나불대고 있노
근데 솔직히 데미안 자체가 한국에서만 비정상적으로 많이 읽힌 책이어서 서양인들이 한국인은 왜 데미안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는 질문 꽤 보이더라 서양권은 헤세하면 싯다르타랑 황야의 이리가 투탑인데 한국에선 데미안 하나가 얘네 둘 인지도 씹어먹는 수준이어서 왜 그런지 신기하긴 함
독갤 말로는 데미안이 제일 일찍 소개되어서 그렇다던데
다시 읽어라
너나 다시 읽어라
근데 <싯다르타> 같은 경우에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문학적 여운이 크다! 그러니까 책을 덮을 때 전율, 내지 마음속에서 뭔가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는 소설들은 대체로 낙차를 통해 주인공이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끝나는 작품들임. 세상과의 화해, 용서랄까. 포레스트 검프 또한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것이 그런 이유에서임. 그냥 단순히
악을 재미있게 그려나가거나 주인공이 낙차를 보여주기보다 뭔가 선과 악 그 틀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락물로서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물론 오락물 느낌을 주는 소설들 중에서도 고전이 된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이야기들은 그렇게 큰 감명 같은 게 없음.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 정도. 그러니까 헤세가 마지막에 알을 깨고 난다는 게
진부함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서도 그 결말 하나를 위해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매듭을 지었을 것이고 그런면에서 싯다르타의 마지막 장면, 어느새 아버지가 된 주인공이 강물을 보며 아들을 그리워하며 번뇌에 빠지는 모습은 싯다르타를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어주는 거임.
고로 싯다르타는 진부한 소설이 아님. 철학적이고 그것을 투영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굉장히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작품임.
오히려 난 반대라고 생각함. 세상과의 화해, 용서라는 뻔하지만 잘먹히는 서사를 그럴듯한 스킨만 씌워서 내보낸 거면 오히려 잘 만든 오락물이지 카프카같은 철학적이고 깊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함. 그렇다고 도스토옙스키처럼 그 근간이 되는 철학을 극한까지 사유했냐면 또 그건 아니거든
데미안이 잘 쓴 소설이고 감동을 주는 소설은 맞지만 과연 얘가 도스토옙스키처럼 영지주의니 불교적 가르침의 본질을 파고들었는가? 혹은 카프카처럼 근대 이후 개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는가? 하면 둘 다 아니오 일텐데, 그럼 오락물 이상의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라는 의문이 듦
영지주의가 너무 이분법적인 개념이라 오히려 알을 깨야한다는 것에 집착한다는 느낌이 있음.
헤세가 영지주의 좋아하는 칼융의 개성화 영향을 받은 것도 있는데 개성화된 사람은 이전과 다른, 새롭고 통합된 인격을 가지게 됨. 결국 헤세가 말하려는 결론은 글쓴이의 근대적 인간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봄.
성장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성장 소설을 좋아하기 힘들겠지 독서는 인생을 만들지만 살아온 인생이 독서 경험을 규정하는 것도 맞는 말 같네
데미안 비엘물에 이런 의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