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할 수 없다. ... 불교가 시작된 이래 이 문제는 계속해서 불교사상가를 괴롭혀왔다. ... 그렇지만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 불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호진 스님(파리 제3대학 박사 / 동국대 불교학 교수), 『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 머리말
//본 도서는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개정판임.
"무아설을 포기할 때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역시 윤회설을 제거해 버릴 때 불교라는 구조물은 붕괴되고 만다. 불교는 이 두 교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교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 무아설과 윤회설의 양립은 초기불교부터 후기불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같은 책, 서론
무아(無我)와 윤회의 문제가 있지.(윤회가 인격의 주체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나'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나'가 아예 없는 것이라면, '나'로부터의 구원이니 또는 '나'라는 허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니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 악의 문제에 대해 세련된 답이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도 여기에 대해 나름의 답이 있음. 다만 두 종교의 대답 모두 무슨 인터넷 블로그나 나무위키 수준으로 읽기보다는, 재도권 학자의 서적을 읽는 게 낫지.
무아랑 윤회는 영립하는 개념인디;;
"무아를 내세우면 윤회설은 성립 근거를 잃어버리고 윤회설이 무너지면 불교는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반대로 무아설을 포기하면 더 이상 불교일 수 없지만 불교는 이 상반된 두 가지 설을 양립시켜야 한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100
수상할 정도로 있다 없다 관념놀이에 취한 스님이네
불교에서 무아윤회는 전혀 난제가 아니며 한번도 난제인 적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조금만 공부한다면 이해하기 쉬운 문제입니다. 그것을 "글로만 불교를 배운 사람들" 그 글 마저도 "거대관념적 사고로만"불교를 배운 사람들이 있다/없다라는 양극단에 빠져서 난제라고 자기들 끼리만 그러는것인데 이 두가지에 모두 해당되는 한국의 불교 학자들/학승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무아 윤회를 이해할수 있는가 없는가는 간단하게 구분됩니다. 자기 자신을 둘로 밖에 쪼개지 못하는 사람들 (정신과 물질)은 필연적으로 저 기사 처럼 이분법적 흑백 논리 "없으면 없는거고 (무아) 있으면 있는거지 (윤회) 없는데 있다는게 말이 되는가? (무아 윤회)" 처럼 있다/없다라는 흑백의 고정관념의 틀을 탈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이해 하기 쉬운가 하면, 자기 자신을 5개의 구성요소 (오온: 물질 요소 1가지, 정신구성 요소 4가지)로 해체 분석하여 볼 수 있는 사람들, 그 각각은 찰나생멸하여 실체가 없지만 (무아) 상호 연관관계가 있다는 사실 (연기), 그리고 앞의 정신/물질이 뒤의 정신/물질 발생에 인과적 상속 흐름의 영향을 준다는 사실 (윤회)를 동시에 이해하면 무아윤회에 대한 이해가 완성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무아윤회를 얘기할때 반드시 같이 언급 되어야 하는 것이 "오온개공"과 "12연기법"이죠.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라는 조건 발생 조건 소멸법)
북방불교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문제이지만, "이같은 고민은 초기불교부터 후기불교에 이르기까지 난제였으며", 이미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는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붓다의 생존 당시에 제기됐"습니다.(본 기사 참조) 여기에 대해 불교의 대답은 당연히 있지만, 역사적 문제 제기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악의 문제에 답을 한다고 해서 그 문제 제기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고, 윤회와 무아의 양립 문제를 불교가 답한다고 해서 '문제 제기'의 역사가 없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저 기사에서 소개하는 책은, 그런 역사적 난제에서 눈 감지 않고 그 대답을 연구한 책입니다.
님의 말씀과 달리 초기 불교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문제는 난제였던 적이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후대 북방 불교에서 오히려 혼란해 하는 사람들이 나왔죠. 그래서 "문제 제기"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를 하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를 하지만, 이해를 하지 못 한 사람들이 말로서 헛된 희론을 하는 것인데,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시끄럽고 클 뿐이죠. 그래서 뭐 애초에 이 법이 심오하여 붓다는 사람들에게 전법을 한다해도 이해를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라고 처음에 전법을 망설였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말도 있죠 "이 법은 지혜가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 지혜가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 이 문제는 계속해서 불교사상가를 괴롭혀왔다. ... 그렇지만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 불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호진(파리 제3대학 철학과 박사 / 동국대 불교학 교수), 『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 머리말 막말로 제가 '문제 제기 자체가 없었다'는 디씨 유동 말이랑, '역사적 난제다'라는 제도권 불교학자 승려의 말 중 뭘 더 신뢰해야 하겠습니까.
무아 윤회 관련해서 책을 읽으실거라면, 저런 헛된 희론을 논하는 책 보다는 차라리 이 책을 추천합니다 (아낫딸락카나숫타법문/불방일 출판/마하시 사야도) 아낫딸락카나 (무아의 특성)에 대해 붓다가 설한 내용을 엄청난 디테일로 풀어서 해체 분석한 내용으로 이 설법은 붓다의 성도후 두번째로 설한 내용이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엄청나게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리란건 쉽게 추측가능하죠. 이 책을 읽고도 무아윤회가 난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나올까?...싶습니다.
동국대 불교학 교수마저 능욕하는 사상 최악의 천재 디씨유동 ㅇㅇ(112.171)ㅋㅋㅋㅋ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라고 해 봤자 특정 질문 (초기불교 논장 관련 질문)하면 수업 종을 쳤다는 핑계로 도망간다, 라고 동국대 박사과정분에게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국내 학자들의 학문적 지식 범위는 설사 교수라고 해도 많이 편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어짜피 이론 (교학)은 건축 설계도의 청사진 정도에 불과 합니다. 실제로 집을 지어봐야 그 설계도에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죠. 과학자가 자신이 제안한 가설을 실험으로 증명하지 못한 위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보다 실제 실험 검증을 마친 사람들 (수행으로 그 검증을 해 본 큰 지도자들)의 말이 더 영향력이 있는 곳이 불교계죠. 제대로 된 불교학 서적을 읽고 싶다면 교학과 수행 양면으로 검증된 분의 책을 읽는게 더 큰 이익이 됩니다.
법륜스님 승
무아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 것이지 일체 작용 자체가 없다는 게 아닌데 왜 윤회랑 같이 못 가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선원에서 몇 번을 물어봐도 나라는 실체 덩어리가 없다는 게 무아지 내가 만들어 윤회에 작용하는 업 에너지가 없다는 게 무이가 아님
타오르는 불이 언젠가 꺼지고 재가 되서 바람에 날라간다고 해도 불이라는 작용이 없는 게 아니고 재로 변하는 현상이 없는 것도 아님 링크 스님의 무아 개념이 동의하기 힘드네 난 초보지만
글쎄? 나도 불교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 때는 둘이 양립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무아가 불교의 핵심이고 윤회는 방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음. 불교철학이나 불교교리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지금은 둘이 딱히 갈등한다고 생각 안함. 불교 핵심 교리(그것도 불교를 믿으면 다 받아들이는 정도의 핵심)에 의해서 둘이 양립하는게 충분히 정당화가 됨.
봤는데 1981년에 처음 쓰인 논문이네 아주 오래전 논문이니 논점이 이럴 수는 있겠네 그마저도 나선비구경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거고 나선비구경 자체가 불교철학/교리발달사로 보면 초기 부파불교 시기니까 이 논의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얘기임
만약에 나선비구경 시기에 이미 불교철학이 완성단계에 올랐다면 이후 대승의 발달사는 무의미해지겠지 근데 그건 아니라는거 한국 포함 동아시아는 동의하는 부분이고 대승불교문화권이니까 불교철학은 그 이후로 더 정교해진 상태임 세부적인 논점에서 조정이나 교정은 있을 수 있어도 무아랑 윤회가 불교 교리상 근본적으로 양립불가능한데 덮어두고 있다는 식의 기술은 사실이 아님
나선비구경의 맥락에서만 완전하지 않다는 게 아님. 이 난제가 불교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고, 거기에 대해 아직 완전한 답을 내놓지 못했으니 앞으로 더 좋은 답을 모색하자는 게 책의 논점임. 그리고 저자 역시도 대승불교권에선 이 문제가 흥미를 끌지 못했다는 걸 부정하지 않음.
난 잘 모르겠음 이 책부터가 부파불교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렇게 갈린건 사실 석가모니가 형이상학적 정당화 논변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열어둔데 이유가 있는 거지 이 문제가 해결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서가 아님 실제로 해결하는 다양한 접근들이 있었고 있고 "완전한 답이 없다"는 표현은 잘못된 소리같음 그런게 정당화되려면 아예 모든 철학/사상이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차원에서나 할법한 소리고 애초에 공가중이 불교사상의 기본인데 유무가 양립하는게 뭐가 문제인지 뭐가 완전하지 않다는건지 니가 취하는 입장 차원에선 이해가 안감
[사실 ‘무아와 윤회’라는 이 주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초기경전은 붓다의 생존 당시부터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을 전해 주고 있다. 한 경(經)에 의하면 붓다가 여러 비구들에게 ‘자아와 무아문제’에 대해 가르치고 있을 때 한 비구가, “만일 ‘아(我)’가 없다면 아가 없는 업을 지을 것인데 미래 세상에 누가 그 과보를 받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이와 같은 의문은 무아와 윤회문제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이 의문을 품은 비구를 ‘어리석어 지혜도 없고 (가르침에) 밝지도 못한’ 사람[愚癡人 無智明]으로 취급했다. 이 경의 편찬자 역시 그를 ‘미련하고 무식한 사람[鈍根無知]’이라고 하면서, “그는 무명에 덮여서 나쁜 사견을 일으켜 이렇게 생각하였다.”라고
꾸짖었다.118 붓다와 이 경의 편찬자는 이와 같이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 그 비구의 의문을 풀어주기는커녕 그를 왜 이렇게 호되게 꾸짖었을까 ...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한 붓다의 설명은 제기된 의문에 기대되는 답이 아니었다. 붓다는 “만일 이렇게 의심한다면 먼저 그것을 설명하리라. 어떤가, 비구들아, 육체[色]는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비구들은 “무상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붓다와 제자들 사이에 문답은 계속되었다. “무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그런데도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로서 과연 ‘육체[色]에 대해서 나[我]다, 다른 나[異我]다, 나와 다른 내가 함께 있는 것이다[相在].’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상·행·식(즉 정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119 붓다가 한 이 설명은 ‘5온은 무아’라는 것을 말할 때 항상 사용하는 내용이다.120 “자아가 없다면 다음 세상에서 누가 그 과보를 받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있거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우리 시대에 와서도 역시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많은 논쟁을 해오고 있다. 릴리얀 실번은 “업설과 무아설은 불교사상에서 양립(兩立)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121 앙드레 바로에 의하면, “이 모순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과보설과 무아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다.”122 뽈 올트라마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붓다의 설법은 매우
장황하지만 이 문제(무아와 윤회)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답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123] -본서 3장
그 질문은 뭐 대단한 질문이 아님 육사외도에서 이미 비슷한 관점이 보이는 내용이고 당대 인도철학에서 널리 퍼짖 관점에 하나임 불교는 초기부터 그런 애들하고 논쟁하면서 성장한 종교이자 사상임 특정 경에서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결책이 없어서 뭉개고 간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임 20세기 근대 서양 학자들이 모순된다고 주장한다고 그렇게 확정되는게 아님 애초에 오온이 '무아'라고 해석하니 함정에 빠지지 오온이 '비아'라고 봐야지 되는 거다 애초에
무아라는 번역이 오해를 불러온다는 얘기는 요즘 불교철학/사상 연구자들이 흔하게 하는 얘기임
한자 문화권 바깥의 논쟁인제 무아(無我) 번역 문제는 논점 이탈임. 서양 불교학은 그냥 anataman이라 하지, 無我라고 안함.
책/논문 자체의 연구사적 가치나 디테일한 정보를 인용이나 정리를 통해서 제공해주는 측면까지는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1981년도 논문 그리고 20세기 서양 학자들을 절대시해야할 정도로 최근 불교학 연구가 세계적으로는 별론으로 한국에서도 그렇게 뒤쳐진 상황은 아님
서양에서는 로마자로 안아트만이라고 하지 그건 알아 근데 안아트만은 애초에 무아/비아 둘 다로 해석될 수 있고 서양 학자들은 무아에 가깝게 해석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임
그냥 불교철학/사상만 공부한다면 불교가 뭉개고가고 있는건 아닌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인도철학의 지형에 대해서 좀 공부를 해보고서고 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석가모니나 불교가 피하고 가거나 뭉개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님 이런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석가가 출가할때부터 있던 얘기들인 수준을 넘어서 출가당시에 석가 출가를 말리는 사람이 직접 뱉은 말에 당대 이런 인도철학적 문제들이 제기됨 지 귀로 들은 당대 인도철학의 논점들도 쌩까고 깨닳음을 논했을거라고 생각하는건 여러모로 문제가 있음
학자의 생각에 동의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서양학자들과 국내 특정학자가 anataman을 오해했을 것이다"는 식의 넘겨짚기는 너무 과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넘겨짚기가 아니라 요즘 학자들이 하는 소리임 무아 비아 구분해야된다고
그러니까 기존 번역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특정한 학자 개인이 '오해했을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도약하는 게 넘겨짚기라는 겁니다. 처음엔 잡담으로 적었다가, 본의 아니게 사실상의 책 소개 글이 되었는데, 저자에 대해서 너무 공격적인 어조의 댓들이 달리는 건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이건 무슨 종교간 교리 랩배틀 같은 것도 아니고, 제도권 불교학계의 승려가 쓴 불교 내부 맥락의 학술서인데요..
80년대 논문이고 책이잖아 한국 불교학 80년대랑 20년대랑은 수준이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야 말했듯이 연구사 차원에서나 정보 정리 차원에서는 가치를 부정할 생각이 없고 그런 차원에서는 나도 사볼 수 있겠지만 80년대 저술을 불교사상/철학 해석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오히려 최근 논의를 부정하는건 동조해줄 수가 없지 제도권 학승인지는 문제가 아니고 무아가 아니라 안아트만을 비아로 보는 관점이 불교사상사의 흐름을 매우 매끄럽게 정리/해석해주는데 머하러 무아로 봐야한다는건지 난 잘 모르겠네
그리고 나말고 위에 문제제기한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얘기가 무아가 아니라 비아라는거야 표현만 다르지 최근 불교학 논의 캐치업하는 사람들 다 똑같은 소리 하는데 뭐 여럿이 합심해서 지어낸거겠음? 짜고 떠든다고 생각하는건 아닐거고 아무튼 난 책 자체의 가치를 갂아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음 연구서라는게 어차피 시간갭이 있어서 다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읽는거니까
1. 인용한 인터뷰는 2015년의 인터뷰이고, 여기서도 난제임은 긍정함 2. anatman 번역사(史) 이야기가, 특정한 학자개인이 anatman 개념을 오해한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게 아님. 가령 고전 서양 철학에서 agathon의 번역 논쟁(기존 통용 번역: 善 / 정정 번역: 좋음)은 "기존의 특정 학자 누구누구가 agathon 개념을 오해했다"를 의미하는 게 아님.
어 연구사에 절대란 없지 근데 무아가 아니라 비아로 보는게 불교사상사를 압도적으로 매끄럽게 설명해주는건 맞음 어차피 텍스트 해석이라지만 문제투성이인 해석을 굳이 취해야할 이유를 난 모르겠네
anatman을 '비아'로 번역할 수 있는 건 본서에서도 명시적으로 짚고 있음. anatman이 비아인 걸 저자가 혼동했을 거라는 건 너무 넘겨 짚은 거고.
인용문이 이상해서 확인차 검색해봤는데 역시 잘못된 인용이었네
"윤회설은 유아설과 함께 불교이전에 성립되었다. 이 두 교리는 다른 바탕에서 이루어져 한자리에 모였다.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이 두 교리를 양립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 이 문제는 계속해서 불교사상가들을 괴롭혀 왔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그렇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무아, 윤회의 양립의 문제는 지금도 보다 좋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불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윤회-유아 짝이 먼저 성립을 한거고 불교는 무아를 들고 나왔으니 "기존 관점에서" 양립이 불가능했다는 얘기임. 윤회-무아 짝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이 불교철학적 관점에서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리고 "보다 좋은 설명"을 위해 열어놓는 거지 현재 설명이 잘못됐다는 얘기도 아니고.
기존 관점에서 난제라는 게 아니라, 무아와 윤회는 그 자체로 난제가 맞음. 이 책에서 양립 난제는, '유아'의 ㅇ도 안 나온 문맥들에서 여러번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불교 내부의 난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함. 인용한 문장에서도, '기존 관점에서나 양립 불가능하다'는 건 텍스트 그 자체에는 나오지 않는 과잉 희석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100
당장
이 인터뷰에서도 양립 난제는 유아의 ㅇ도 없는 문맥에서 소개되고 있음. 그 난제가 불교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있었다고 말하고.
다시 봤는데 니말이 맞는거 같네 그렇다면 나는 학술사적 가치는 있어도 저자의 불교 이해가 좀 떨어진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
아니 댓글 진짜 퍼거들 존나 많네. 기독교 악의 문제도 시발 그렇게 치면 다 해결됐어ㅋㅋㅋㅋㅋ 불교 철학 내에서 포용 가능하든 아니든 간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딱 보기에 논리적으로 맹점이 보이는 데 니가 불교를 이해 못해서 그런거라니 뭔 개같은 논점 이탈을 하고 있냐. 악의 문제는 뭐 그럼 기독교에서 해결 안되어서 아직까지 난제라고 하는 줄 앎? 하여튼 시발 철스퍼거 새끼들 공통점이 작은 문장에만 집착해서 맥락을 읽지 않고 지 아는 것만 블라블라 떠들기 바쁨.
ㅋㅋㅋㅋㅋ
아니 불교철학에서는 핵심 논점 자체가 아니라니까? 악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에서 실제로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만 불교는 불교 핵심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교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때문에 이건 문제가 아니게 됨 기독교는 기독교 핵심 교리랑 악의 문제는 별론으로 돌아감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불교가 전래되며 번역되는 와중에 본뜻이 왜곡되는 바가 많아 단어의 제대로된 규정이 중요하고, 핵심 개념이라면 더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지 그게 작은 것에 집착하는 퍼거로 보인다면 네 지적 해상도가 너무 낮은 거 아님? 업그레이드를 좀 해봐
기독교도 기독교 교리의 수용을 전제한다면, 악의 문제는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그럼 이 난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무의미한지?
기독교 핵심 교리가 어떻게 악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설명해봐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사건인데 그게 이 문제를 해결해줌?
기독교 핵심 교리가 부활사건 하나밖에 없냐 병신아? 하 이새끼 진짜 퍼거 그 자체네 시발. 글의 맥락을 보라고 했지 핵심 개념 규정을 하지 말랬냐? 진짜 철학이든 종교든 뭐에 미친 새끼들은 하나같이 왜이러냐 시발
니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니 관점을 말해봐 그럼 기독교도 종파따라 핵심 믿음은 다르겠지 근데 그 중에 악의 문제를 핵심 믿음 차원에서 해소시켜주는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는데? 적어도 난 모르니까 알려주면 배워가도록 할께
그리고 뭔가 착각하는데 난 불교신자도 아니고 불교철학에 미친놈도 아님 난 다양한 철학텍스트를 읽는게 취미지 불교철학은 오히려 최근에 관심을 가진 세부주제라 보유한 책 중에서 불교 주제는 소수인 편에 불과함
니가 불교 신자거나 불교철학에 미친놈이라서 퍼거라 욕먹는 게 아니라, 맥락을 좆도 이해 못하고 니 말만 줄줄 읊어서 퍼거인 거야 병신아. 그리고 악의 문제를 핵심 믿음 차원에서 해소시켜 주는 거? 이새끼 욥기가 왜 성경인 지도 모르는 거임? 로마서에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라는 텍스트 모름? 악은 인간을 단련하거나, 혹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성경 텍스트에서부터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은 선의 부재라는 말로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핵심 믿음이 아니야?
ㄹㅇ ㅋㅋㅋㅋ
그건 핵심 믿음에서 오는게 아니라 그리스철학 빌어서 성경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잖아 강 불교는 불교철학 핵심 그리고 문자그대로 맨날 얘기하는걸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니까
이거 중론으로 해결되는거 아님?
글의 수명은 다한 듯하다
교조주의자 새끼들 운동권 병신들이랑 다를게 없다
하도 불타서 댓글 정독해봤는데, 나도 불교 신도에 가깝고 본문은 좀 불교 해석과 핀트가 나갔다고 보긴 하지만 이걸로 감정상하고 논쟁 붙는 것 부터가 불교의 교리랑은 좀 멀어지는 거 아닐까 싶으네
무아는 '이것은 나의 것,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내가 고통 받는다' 등등의 자신을 규정하는 행위들이 반복되면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옳다고 확신하는 그런 행동들을 줄이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맥락의 말임. 윤회는 좀 더 인과관계에 대한거임. 악행을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현실의 인간들이 스스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업장 짓지 말라고 만든 개념임. 그래서 윤회는 가르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음. 그러니까 무아는 추구하는 이상적 상황이고, 윤회는 좀 더 그것을 이루려 하는 삶의 과정에서 어떤식으로 살아야하는가(자신이 후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벌이지 마라)를 그 당시의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서 해준거고
서양에서 이런 철학에 대해 신기하게 느낀 건, 서양 철학은 전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르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모든 철학자들이 서로 묻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일종의 대전제이기 때문이었을 것임. 그래서 서양과학이 그 덕으로 정량화, 계량화, 실험 등으로 정교하게 발달한거고.
불교는 좀 더, 너의 행동과 나의 행동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둠. 태어났는데 부모가 가난하면 나의 고통은 내 잘못이 아닌데도 피할 수가 없잖아. 석가모니가 출가해서 겪은 에피소드만 봐도 고통에 대해 탐구하잖아. 근데 사람은 원인을 찾고 개선하려는 욕구가 그냥 자연스럽게 들어서 내면에서 또 다른 고통(부조리함을 느낌, 이해할 수 없음 등)이 들잖아. 이 때, '만물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며, 문제의 원인을 내가 발견하고, 또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스스로의 환상일 뿐이라는 말을 하는 것임. 일종의 고급 정신승리방법 같은거고. 주관적 해석을 줄이고, 인과관계를 인정해서 덜 힘들고 더 자유롭게 살라는거임. 그래서 법륜이 맨날 다람쥐 얘기를 하는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