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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시즌 29891238479호 라노벨 떡밥을 향한 출사표

언제나 독갤은 라이트노벨을 두고 옥신각신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이번 대회도 그런 맥락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긴 하지만, 사실 나는 라노벨이란 장르를 논하기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내가 라노벨을 읽었던 것은 중고등학생 때였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종 재밌게 본 시리즈의 다음권을 찾아 읽기는 했지만, 제일 마지막으로 본 라노벨도 3년 전의 내청코 완결편이었으니까요.

TMI처럼 보이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 것은 라노벨의 특수성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청소년 맞춤’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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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한국 문학계에서 팬픽이 재평가되는 중입니다. 과거 팬픽을 소비했던 10대의 여성독자들이 지금 한국 문학계의 주된 구성원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표현에 따르자면, 팬픽 문화는 노골적인 성을 경험하기 두려워 하는 미숙한 청소년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완곡하게 성을 경험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여성향, 남성향의 차이일 뿐 라노벨도 다르지 않습니다. 청소년 시기의 욕망을 안전하게 분출하는 도구로써 라노벨은 쓰이고 있지요. 

그러나 섹슈얼의 문제에만 집중해서는 라노벨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성욕을 풀기 위해서라면 제아무리 청소년이라도 더욱 효율적인 수단이 널려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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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 라노벨이 매력적인 이유는 미성년의 섹슈얼과 동시에 미성년의 에고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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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설마... 사도는 인간의 정신, 마음에 관심이 있다는 건가?

에반게리온의 유산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혼잣말이 많은***’ 라노벨들, 이를테면 『스즈미야 하루히』, 『모노가타리』,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됐다』 등은 인간의 내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정보통합사념체 머시기가 어떻든 간에, 괴이가 어떻든 간에, 교내 카스트가 어떻든 간에, 결국은 인간의 내면이 문제인 것이죠.

그럼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섹슈얼한 것에 흥미가 있는 청소년들이 현실의 노골적인 섹스를 피해 팬픽과 라노벨을 소비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이 딱딱하고 어려워보이는 문학에는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나들목으로써 라노벨을 택한다, 라고 말입니다.

저를 비롯해, 독갤에는 라노벨을 통해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인 갤러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라노벨의 순기능이라 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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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모노가타리』를 읽어내는 세가지 독법

이제 본격적으로 『모노가타리』를 논해봅시다. 모노가타리(物語)는 ‘이야기’란 뜻입니다. 우리가 ‘옛날이야기’라 할 때의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좋습니다.

그러면 『모노가타리』 시리즈는 과연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여기서 겸사겸사 『모노가타리』 시리즈를 읽어내는 3가지 독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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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노가타리』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장 표면적인 독법입니다. 1권 제목 『바케모노가타리(괴물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노가타리』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몸무게를 가져가는 게의 신, 사람을 헤매게 하는 달팽이 괴물, 소원을 이뤄주는 대가로 영혼을 빼앗는 원숭이 악마 등,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괴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니 줄거리를 범박하게 요약해보자면, ‘주인공 아라라기 코요미가 온갖 괴물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해프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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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노가타리』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괴물’이라는 키워드만으로는 『모노가타리』를 온전히 독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괴물은 인간의 마음속을 드러내기 위한 편리한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인간이 관측할 때만 발생한다.’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합니다.

인간이 없으면 괴물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게의 신, 달팽이 괴물, 원숭이 악마 등은 각 히로인의 심리가 투영되어 만들어진 괴물입니다. 괴물의 퇴치 역시 물리적인 방법이 아닌, 심리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작가는 괴물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관심이 있습니다. 괴물은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편의적 수단이자, 사건을 임팩트 있게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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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노가타리』는 픽션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가지 다른 독법을 제시합니다.

『모노가타리』를 픽션에 대한 이야기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저에게 약 50권째 정도의 소설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의외로 그것들 중에는 ‘거짓말쟁이’ 캐릭터가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렇다기보다 ‘정직한 사람’을 이제까지 대체 몇 사람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확고한, 결코 흔들림없는 가치관으로서 ‘이야기는 거짓말이다!’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니시오 이신, 『사랑이야기(코이모노가타리)』 작가의 말 中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모노가타리』 시리즈를 관통하는 한마디입니다.

국어시간에 소설을 ‘있음직한 허구’라 배우고는 하지요. 그러나 니시오 이신은 결코 ‘있음직해 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허풍일 뿐이야. 원래 이야기란 다 그런 거야.’라고 강조합니다.

독자를 대하는 이런 태도는 같은 파우스트계 작가인 마이조 오타로의 『쓰쿠모주쿠와 유사합니다.

1장의 내용을 2장에서 부정하고, 2장의 내용을 3장에서 부정하며, 끝도 없는 허구의 밑바닥으로 추락해가는 것이죠.

고정된 현실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해석과 왜곡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이 태도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적인 조류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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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얘기를 해야겠군요. 문학의 종언 담론은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단순히 ‘우리 문학 좆망했다!’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게 아쉬운 일입니다.

사실 고진은 ‘근대문학’을 상당히 특수한 케이스로 보고 있습니다. 문학이 한 사회의 지적 담론을 이끄는 것 자체가 ‘근대’라는 시기에 잠시 등장한 이레귤러라는 겁니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다시 원래대로의 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지적 임팩트 없이, 그저 누구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과거의 문학으로 말입니다.

김영찬 평론가는 종언 담론을 논하면서 문학이 근대문학을 거쳐,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올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지금 다루는 라노벨이 『모노가타리』(=이야기)인 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이 포스트모던적 조류를 반영하는, 픽션을 더욱 픽션으로 만들어주는 3가지 요소 - 말장난, 날조, 육체를 다음 글에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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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 『문학동네』 2020 가을호
*** 마에지마 사토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서 사용된 표현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장황하게 자의식을 늘어놓는 류의 라노벨을 일컫는다.
**** 김영찬, 『문학이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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