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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유명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눈먼 부엉이>는 <눈먼 올빼미>라고도 번역되어 있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싶지만, 흥미롭게도 <눈먼 부엉이>를 번역할 때 쓴 독어본과 <눈먼 올빼미>를 번역할 때 쓴 영역본 둘 다 하필이면 부엉이와 올빼미를 둘 다 지칭하는 용어(Eule, Owl)로 번역되어 있다. (좀 더 찾아보니, 최초 번역본인 불어에서는 올빼미를 뜻하는 Chouette로 번역된 것을 보아 올빼미 쪽이 맞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 속에서 빚어지는 예상 못한 유사성은 두 번역본을 읽으며 달라지지 않은 감상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눈먼 부엉이>가 어떤 종류의 소설인지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흥미로운 일이다.
<눈먼 부엉이>는 보다 더 초현실적이고 관념적인 <파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 <눈먼 부엉이>에서 전반부는 술과 아편에 중독된 예술가가 자신이 사로잡힌 어떤 추상적인 미를 상징하는 여성을 갈구하고, 그것을 얻었으나 잃어버리고 이를 땅에 묻어버리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것이야말로 그 예술가가 진정으로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꼭 하고 싶은 핵심적인 말이었을 테지만, 여기에서 <눈먼>은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는 바로 이 같은 이야기가 어떻게 조금 더 현실적이고 고통스러우며 또 반복적으로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오쟁이 진 환자가 되고, 여성은 "창녀"처럼 정조관념이 없는 아내가 되며, 그의 고통과 여정은 병적인 한탄으로 승화된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몇 번이고 푸가처럼 그 전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변조되거나 병합된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점차 변질되어 가는데, 다른 모든 두려움이 있을 수 있어도 죽음만큼은 딱히 두렵지 않아 하던 화자는 자신에게 곧 닥쳐올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며 자기 안으로 파고든다. 기어이, 그는 지금 자신이 과거의 그림자에게 말을 걸더라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화자는 오직 하나만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 어느 때에도 그가 가진 고통은 남에게 설명할 수도, 남이 이해할 수도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고통. 그것을 통해서 그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정작 그 밖의 것은 볼 수 없는 눈먼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된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자신이 지혜를 얻었다고 날아오를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누구에게 날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그는 다시 전반부의 화자가 그랬듯, 싸늘하게 식어 썩어가는 여인의 시체를 앞에 둔 채로 돌아온다. 마치 전반부의 모든 것들이 다 몽상에 불과했다는 듯. 혹은 후반부가 그저 그의 부연 설명에 불과했다는 듯. 이 당혹스러운 반복은 단순히 여정의 끝으로 다시 돌아오는 주인공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 테다. 외려, 전반부와 후반부에서도 매번 암시되던 어떤 전체적인 반복(온갖 곳에서 되풀이되는 그림의 모티브, 몇 번이고 들리고 따라부르는 경찰의 노랫소리 등)이 사실, 그 어느 쪽도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화자는 그저 여전히 누워서 저 벽의 음침한, 눈먼 부엉이의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보는 것을 따라 보고 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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