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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처음으로 부임하는 어떤 한 관료가 있습니다. 그는 애민정신을 가지고 주민들을 대하며 낙원과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할 겁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결심이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주민이 아니라 점점 자신을 위해 이익을 챙기는 경우지요. 이것이 문제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경우는 무조건 옳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런 경우도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입니다. <당신들의 천국>은 예리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생각한 이상이 과연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진정한 이상이 될 수 있는가?
자신의 사고와 가치체계로 보았을 때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치나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정 이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을까?
또는 이상이 모두에게도 이상적인 것으로 공동의 가치 실현에 기여하고 있다면 그 이상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고 반드시 계속 유지되어야만 하는가?
조백헌 원장은 이런 질문에 봉착하여 사면초가에 빠집니다. 조 원장은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찾아 헤매는 불행한 나환자들을 위해 자신감을 불어넣고 직접 자신들의 땅을 개척하게 하는 조언자이자 지도자입니다.
조백헌이 사랑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정’이라면, 보건과장 이상욱은 자유를 주창하는 ‘반’입니다.
이상욱은 나환자의 아들로 섬의 규정을 위반하여 태어났지만 그는 나환자들의 사랑과 관심에 따라 무사히 태어나 외지로 보내져 성장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나환자들을 배반하고 권력의 편에 붙은 배신자죠. 이런 태생적 원인으로 그는 나환자들을 위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셈입니다.
그 운명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원장들을 경계하고, 명분으론 환자들을 위한다면서 사실은 그들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나환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환자들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조백헌 원장은 사회적으로 격리당하여 자유를 제한당하는 나환자들에게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되찾아주기 위해 간척사업을 단독으로 계획하고 시행합니다.
하지만, 숱한 과정 상의 균열이 발생합니다. 좀처럼 사업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절망한 황 장로를 비롯한 나환자들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두고 설전하는 것은 이 소설의 백미 중에 백미지요. 백 원장의 기지와 이상욱의 도움으로 조 원장과 나환자 사이는 다시 봉합되고 간척사업은 계속 진행되지만, 나환자들의 자유를 못마땅해 하는 외부 세력들이 조백헌을 다른 병원으로 전보조치합니다.
이런 전보조치에 따라 조백헌은 망설이죠.
떠나야할 것인가? 남아야할 것인가?
나환자들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떠나라는 이상욱의 편지를 받고 고민하던 조백헌에게 다가오는 것은 황 장로의 ‘합’이였습니다.
사랑은 자유처럼 투쟁의 결과로 뺏거나 뺏기는 것이 아니라 베풂이고 빼앗긴 원망 대신 용서를 가르치는 것이다. 자유로 행하되 그 자유 속에 사랑이 깃들거나, 사랑으로 행하되 그 사람 속에 반드시 자유가 깃든다면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조 원장을 위로합니다. 조백헌의 사랑과 이상욱의 자유를 결합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죠.
하지만 황 장로는 조백헌 원장의 유임을 바라지 않으며 전보를 묵인합니다. 사랑과 자유의 통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상호 간의 신뢰에요. 황 장로로 대표되는 나환자들은 조백헌의 사랑에 고무되기도 하고 의욕을 보이기도 하지만, 불신하기 때문에 배반을 거듭합니다.
근본적으로 나환자 집단이 원장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해있기 때문인데 환자는 환자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건강인은 건강인들의 인생이 따로 펼쳐져 있습니다. 참다운 사랑은 일방이 일방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 수락할 때만 가능한 것인데, 나환자들은 같은 운명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자유는 투쟁이란 형태를 통해 확산됩니다. 이는 곧 지키는 자와 빼앗는 자의 싸움이도 하죠. 그 과정은 힘든 과정이기 때문에 수많은 불신자들과 배신자들을 양성하고 배반의 오욕만이 남습니다. 또한 이 투쟁이라는 것은 같은 목적과 이익을 위한다면 동지가 될 수 있지만 서로 이해가 다른데도 동지인 척하고 있다면 고상한 척 하는 오만함과 얄팍한 소명의식을 지닌 자칭 성인군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이죠.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신뢰입니다.
조백헌은 그것을 깨닫곤 재야의 몸으로 다시 소록도로 돌아옵니다. 신뢰의 회복을 위해 건강인들에 대한 질투를 대표하는 윤해원과 외지에서 온 건강인 서미연의 결혼을 추진하며, 나환자들이 환자로서의 특수지위 때문에 제한하고 있던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서로 결합함으로써 신뢰할 수 있도록, 신뢰하면서 같은 하나의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축문을 간절히 연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소록도라는 특수환경에 처한 환자들과 원장으로 대표되는 권력집단 간의 관계에 있어 정치적 관점에서 이상적인 형태에 관한 물음을, 제 아무리 사랑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현 과정에서 흔들리고 분열하고야 마는 인간 기저의 심리, 즉 자유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그리고 진정한 합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이청준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직접 소록도 취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70년대의 정치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천국이 과연 소록도에서만 적용되고 정치적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인가 하면 저는 당신들의 천국이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바로 신뢰입니다.
일시적인 이해가 영합하여 이익을 구하는 경우 등 유익성을 기반으로 한, 목적을 위한 관계는 모래성 같은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이는 새로운 이해에 따라 언제든지 어제는 친구였다 할지라도 오늘에는 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관계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되기 위해서는 신뢰가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자리 잡고 있어야만 우리는 더 깊은 우정이나 애정을 구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어요.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로 신뢰를 형성할 대상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서로가 누군지 알아야만 우리는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사정이 이해가 되어야만 우리는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되었을때 비로소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유사성을 깨닫고 관계를 진전할 수 있습니다.
조백헌이 사랑을 ‘정’으로 삼는 인물이라면 저는 자유를 ‘정’으로 삼았던 사람이에요. 강제로 군대에 징병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는 것의 그지같은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분대장을 하면서 분대원들에게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를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롭게 두곤 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노자의 도를 실현한 셈이였습니다.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였죠.
그러나 이런 자유만능주의도 살다보면 가끔 난항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려 하다보면 너는 왜 이리 관심이 없냐는 소리를 종종 듣기도 했거든요. 그러면 저는 자유라는 명분을 들어 항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자유라는 가치에 묻힌 채 어쩌면 나는 나의 편의를 위해 자유를 이유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게 아니라 단지 방치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문제입니다.
나는 자유를 절대화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유와 사랑의 적절한 경계는 어디일까?
저의 위대한 자유에 ‘반’을 가해야만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유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만 했어요.
그리고 ‘반’이 되는 것은 진심 어린 관심이고,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와 사랑은 둘 중에 단 한 개만 세계에 있을 수 있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들은 아니지만, 자유가 과하면 사랑이 희미해져가고, 사랑이 지나치면 자유가 없어집니다. 물론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이 곧 관심이 없거나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기반한 자유와는 명백히 구별되어야겠죠.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에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루 종일 붙어 있으려 하거나 사사건건 자녀의 사고나 행동에 간섭하려 든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의 자유를 인정한 나머지 학교폭력과 같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다니는데도 자유란 명목 하에 이를 인정해준다면 그것은 자유란 이름의 방치일 겁니다.
자유든 사랑이든 너무 지나쳐서도 모자라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사랑은 각 가치에서 중용이 이루어지는 한편, 자유와 사랑 간의 중용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와 사랑을 균형있게 행사하기란 어려운 문제입니다.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있지만 저울에 달린 양쪽의 추의 관계처럼 대등한 힘을 유지하여야 사랑이란 이름의, 자유란 이름의 폭력의 행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선 이런 가치들의 이름을 빌어 아무렇지 않게 위대한 가치의 실현인 것마냥 폭력을 가하곤 합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집착과 자유의 박탈, 자유란 이름의 상대주의의 절대화 같은 문제들이 그 예입니다. 이런 종류의 폭력은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죠.
그리고 하나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회나 개인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와 지위를 위한 합리성이나 고결함을 위한 도덕성 등 하나의 가치를 강조한 나머지 우리는 한 개인의 몰개성을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좋은 것이든 절대화되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반하는 문제는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 사랑은 집착이고 사랑을 주지 않는 자유는 방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는 긴 막대기의 양 끝에 각기 다른 통에 담긴 사랑과 자유를 걸고 어깨에 짊어진 채 외줄타는 위태로운 상황의 연속과 같죠. 두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방치와 집착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걷다보면 익숙함이란 함정에 빠져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하죠. 우리는 그런 상황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당신들’의 천국, ‘나’의 천국, ‘너’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유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생각은 안해봤었는데.. 잙읽었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