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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웅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선집>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글을 낸 적이 있다. 마르케스, 보니것, 진 리스, 저지 코진스키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들을 모은 선집인데, 어떤 글은 현재도 다른 판본으로 번역서가 남아 있기도 하며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나머지 작가들은 나름대로 현재도 다른 번역서들을 구할 수 있다. (마르케스나 보니것은 당연한 일이고, 저지 코진스키조차 몇 권을 찾아볼 수 있다) 개중 유일하게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작가가 존 혹스John Hawkes로, 이 선집에 수록된 <경마장의 함정Lime Twig>, <광시곡Travesty>는 물론이고 다른 글의 번역본도 찾아볼 수 없다. 그건 참 아쉬운 일인데, 존 혹스의 글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광시곡>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고 싶다. <경마장의 함정> 역시 나쁘지 않았지만, <광시곡>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다.


<광시곡>은 자신의 딸과 그 애인을 태운 차를 운전하며 죽음의 질주를 이어나가는 사내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소설이다. 그 애인은 사내의 딸과 아내, 두 사람과 동시에 교제하고 있는 시인으로, 어떻게든 사내의 질주를 막아보고자 계속 말을 건다. 그러나 시인의 말은 결코 <광시곡>에 나타나지 않으며, 그것에 반응하여 대답하는 사내의 말만이 <광시곡>을 구성하고 있다. 사내는 그와 자신의 딸에게 이 질주가 어떻게 가장 부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사고가 될 것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이 사고의 미학을 느끼되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할지 설명하며, 자신이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이 자동차 사고와 성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옛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을 통해 풀어내 딸과 애인이 이를 이해하기를 기대한다. 이런 점에서 <광시곡>은 밸러드의 <크래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연상시키는 방식은 제사로 활용한 카뮈의 <전락>의 구절과 연관된다. “이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었어. (…)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짓말과 비밀을 둘 다 좋아하는 사람들로 나누었지. 나는 어떤 부류인지 당신이 한번 골라 봐.” 사내는 틀림 없이 세 번째 유형의 인물일 테다. 비록 그가 애인의 질문이나 비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듯 싶더라도, 그의 태도는 어딘가 석연찮다. 밸러드의 <크래시>가 이 자동차 사고 페티시즘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명제로 확고히 하는 데에 반해, <광시곡>은 그와 유사한 물신주의적 성욕을 이 믿을 수 없는 화자를 통해 의심의 영역에 남겨둔다. 과연 우리가 이 사내가 표현하는 믿음을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동시에, 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었다면 이렇게나 괴상한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 애매한 의심 속에서 비로소 페티시즘은 본디 페티시즘이 그래야 하듯, 추잡스럽고 끈적끈적한 상태가 된다. 밸러드의 <크래시>는 너무나도 매끄럽다.


또한, 분명히 이 사내는 기괴하다. <경마장의 함정>에서도 느껴지는 혹스의 고딕스러운 필체는 여기에서 더욱 매력적으로 활용되며, 모든 창문이 닫힌 채 고성을 지나고 버려진 마을을 통과해 옛 창고의 벽에 정면추돌할 자동차의 분위기가 사내의 냉정한 말들과 어우러진다. 그가 정말로 이 괴상한 페티시즘을 품고 있는 것이 맞을까, 의심하게 되는 것까지 이 반어적인 그로테스크함을 강화한다. 현대에서만 발견될 병적인 집착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고딕의 강렬한 분위기를 느끼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떠한 묘사도 필요 없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정적인 세계와 동적인 자동차의 괴리감, 그리고 그 자동차 안에서 기절하는 여인의 묵살되는 존재감. 우리는 더 이상 귀신이나 괴물을 두려워하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