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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읽은 책들 대부분이 한국어 책이라 그런지 저번 달 보다 훨씬 많이 읽긴 했다. 다들 거를 타선없이 훌룡하고 뛰어난 작품들이라 이번 달은 몹시 즐거웠다.

1. 화씨 451 (Fahrenheit 451)

“사람들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요. … 대부분 자동차나 옷가지, 수영장 이름들이나 줄줄이 늘어놓고 어떤 게 좋은지나 이야기하죠! 다 똑같은 말만 하고 아무도 남들과 다른 이야기는 하려고 들지 않죠. (People don’t talk about anything. … They name a lot of cars or clothes or swimming pools mostly and say how swell! But they all say the same things and nobody says anything from anyone else.)”

화씨 451 中

1920년에 태어나 2012년에 작고한 미국 SF의 거성 레이 브래드버리 (Ray Bradbury) 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화씨 451’ 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이것도 읽는 게 마냥 쉽진 않았지만 19세기 영어와 진한 사투리, 부담스러운 분량으로 고통을 안겨주었던 폭풍의 언덕 다음으로 이걸 읽어보니 훨씬 현대적인 문체에 158 페이지 정도 밖에 안되는 부담없는 분량덕에 상대적으로 술술 읽었다.

이 책의 제목인 화씨 451 (섭씨로는 약 233 도) 은 종이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나타낸다. 이를 반영하듯이 이 작품은 야한 잡지나 재미 위주의 만화책을 제외하고는 모든 책을 금지하고 불태워버리는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다. 책을 불태우러 다니는 세계관의 설정도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원래는 영어로 ‘파이어맨 (Fireman)’ 은 소방수라는 뜻인데 이 세계관에서는 모든 집을 방화 소재로 만들어놓고 책을 소유한 집이 적발될 경우 그 집과 책을 불지르러 가는 직업을 파이어맨으로 설정해 놓았다. 

본작의 주인공인 가이 몬태그 또한 책을 불지르러 다니는 일에 재미를 느끼던 파이어맨인데 어느 날 밤 새로운 이웃인 클라리세 맥클랠런과 우연히 만나 대화를 하면서 그의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된다. 보통 작중 사람들은 TV 에서 틀어주는 프로그램에 중독되어 있고 문화생활은 그저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는 데 목매여 있거나 차를 못해도 시속 120 Km 정도로 모는 게 일상적일 정도로 빠르고 자극적인 것에만 몰두해 있는 게 일상인데 클라리세는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주변 환경을 관찰하는데 관심이 있고 깊이 사색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몬태그는 이내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는 자신의 직업에도 염증을 느끼게 되고, 방화 작업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인명피해까지 발생하면서 세상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는 게 이 책의 주요 플롯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무려 1953 년에 벽걸이 TV 와 무선 이어폰 같은 최신 기술을 상상해낸 것도 있었지만 이 중 으뜸이었던 것은 미디어에 몰두하는 대중들의 양상이 놀라우리만큼 2023년 현대와도 맞아떨어지는 점이었다. 상술했듯이 작중 대중들은 TV 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프로그램에 중독되어 있고 빠르고 뇌리에 쉽게 박히는 이미지만을 선호하며 독서 같은 사색적인 활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데 TV 를 SNS 로 치환하면 놀랍도록 현대하고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다. 브래드버리가 이 작품을 집필했을 때는 TV 가 미국 가정에 본격적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을 땐데 그때부터 작가가 대중 미디어가 가진 획일성, 일방성, 자극성을 일찍이 꿰뚫어 보고 경고하는 게 실로 감탄스러웠지만 70년 정도가 지난 현대에도 대중 미디어가 가진 한계점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던 점에서 마음 한켠이 씁쓸했다. 괜히 이 작품이 SF 명작으로 취급받는 게 아니기도 하고 책의 분량도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은 만큼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2. 소송 (Der Prozeß)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소송 中

우리에겐 중편소설 '변신 (Die Verwandlung)' 의 작가로 익숙한 체코 프라하 태생의 독일계 유대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의 장편소설 소송을 읽어봤다. 작년에 읽었던 카프카 단편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같은 작가가 쓴 장편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서 골라봤는데 번역 평이 좋고 표지도 아름다운 문학동네 리커버 판을 구했다. 이 작품 자체는 카프카가 19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였지만 1924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카프카는 평소 막역지우이자 유대인 동료 작가였던 막스 브로트 (Max Brod) 에게 자신이 죽게되면 소송을 비롯한 미완의 원고들을 불태워달라고 당부했는데 원고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던 브로트는 카프카 사후 친구의 약속을 어기고 직접 편집하여 원고를 출간하였다. 그 덕에 완성되지 못했음에도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주인공인 은행원 요제프 K (이하 K) 가 아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무고를 당하여 서른번째 생일날 아침에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에게 하숙집에서 체포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K 는 뜬금없이 체포당한 것에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체포 집행 방식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자신이 어떤 혐의로 고소를 당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체포영장도 없는데다, 자신을 잡으러 온 집행관들이 제복도 안 갖춘 채 남루한 행색으로 찾아온데다 자신에게 무슨 혐의가 있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체포라고는 했지만 유치장 같은 곳에 끌고 가지도 않은데다 계속 일상생활을 하며 다음 소송절차를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고, 도리어 통근도 도와주겠다며 K 가 일하고 있는 은행 직원들까지 데려왔다. 그날 이후 전화로 심리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아 가보니 번듯한 법원 건물이 아니라 낡은 교외 주거용 건물 안에 있는 더러운 셋방에 법정이 있었다. 심리 과정도 돗데기 시장 판이나 다름이 없었고 예심 판사도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구석이 있을 정도로 허술했다. 이 때문에 K 는 소송을 처음엔 그리 심각하게 보지도 않았고, 여기에 승소하리라는 자신감에도 차있었지만, 점차 소송 중에 있다는 사실이 가족과 직장 동료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예기치 않게 압박을 받게 되고 소송 과정 자체도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카프카의 단편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작가는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정말 숨막히게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하게 글을 써내다 보니 독자들을 입 벌린 채 그저 감탄하고 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제가 이전에 재밌게 봤던 단편들 중 '변신' 에서의 이야기의 발단은 황당하지만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점과, '시골의사' 에서의 기괴한 분위기, '만리장성 축조의 때' 에서의 답답하면서도 미스테리한 권력체계 묘사를 두루 갗춘 작품이다 보니 나에겐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법원' 의 존재가 실로 소름 끼친다. 요제프 K 를 체포하고 소송에 회부한 법원은 비록 꾀죄죄한 외형을 하고 실소가 다 나올 정도로 형편없는 방식으로 돌아가지만 생각치도 못한 곳에 마수를 끼칠 수 있을 만큼 거의 모든 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구성원들이나 관련된 자들도 정확히 알 수 없을만큼 비밀스러우면서도 복잡한 구조를 갖춘데다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법' 을 내세워 구성원들은 물론 피고인들 까지 한치의 의심없이 맹목적으로 법원을 따르게 하고 있다. 이걸 보고선 과장 좀 보태서 우주적 공포를 보는 듯한 막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문장 자체가 특별히 복잡하진 않지만 문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보이는 난해함이 느껴지다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하긴 어렵지만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명작이니만큼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적극적으로 일독을 권장한다.


3. 작품 (L'Œuvre)

"예술가의 영광 같은 건, 마치 오늘날 어린애들도 우습게 여기는 교리문답처럼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거 아닐까! 신을 믿지도 않는 우리가 그러면서 불멸을 믿다니......, 아! 비참한 일이야!"

작품 中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주요 배경들을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인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Émile Zola) 의 소설 ‘작품’ 도 읽어봤다. 졸라는 문학가로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유대인이란 이유로 독일 간첩으로 의심을 받아 누명을 쓴 프랑스 육군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구명운동에도 힘썼던 양심있는 지식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주로 영문학 정도만 깔짝대던 나에게 불문학은 다소 생소했었는데 정말 좋은 기회를 통해 이 책을 선물받게 되어 읽어볼 수 있었다.

졸라는 불문학의 거장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극에 영감을 얻어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집권했던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의 한 가문을 배경으로 하여  ‘루공마카르 총서’ 라는 20권에 달하는 연작소설을 집필한 적이 있다. 그중 이번에 읽은 ‘작품’ 은 이중 14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각 권에 담긴 이야기는 제각각 다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두고 각 권 내에서 이야기가 종결되지만 주인공들이 5대에 걸친 가계도로 묶여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본작의 경우에는 클로드 랑티에라는 한 화가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제2제정 당시에는 엄숙하고 신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신고전주의가 주류 예술사조였는데 주인공인 클로드는 이에 반기를 들었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와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를 넘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되 정열적이고 강렬한 색채를 중시하는 인상주의파 (물론 작중 이게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화가였다. 당시로서는 전위적이면서도 반항적이었던 화가가 겪게 되는 다사다난한 인생역정이 이 책의 주요 줄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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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하였듯이 이 책의 주요 소재는 경직된 미술계 주류에 열렬히 반항했던 인상주의파 (Impressionism) 예술가들이다.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가 보여주는 면모를 뜯어보면 실제 당대 미술가들에서 여러가지를 모티브로 따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클로드의 우락부락한 외형과 과격한 성질머리, 프랑스 남부 지방인 엑상프로방스 부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점에서 에밀 졸라와 막역지우로 지냈던 인상주의파 화가 폴 세잔 (Paul Cézanne) 의 흔적이 엿보인다. 거기에다 혁신적인 미술유파의 정신적인 지주로 활동하고 주인공의 역작인 ‘야외’ 가 풀밭 위에 여자가 나신을 드러낸 채 누워있고 벨벳 코트를 차려입은 신사가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묘사되는데 이게 실제 미술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 이 연상되는 점에서 미술계 인상주의파의 거두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흔적도 강하게 드러난다. 또 작가가 발로 뛰면서 취재한 덕분에 당시 미술계의 주류 사조, 미술가들의 삶, 미술시장이 돌아가는 형태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술학도들도 미술사 공부하면서 이 책을 참고자료 정도로 사용하는데는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단순 이야기 소재로만 인상주의파가 다뤄지는 게 아니라 본 소설의 작풍과 필치에서도 영향력이 돋보인다. 작품에서 주변 풍경이 다분히 색채 위주로 묘사되고는 하는데 (예: 세상은 마치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 찢어진 하나의 거대한 틈새처럼 보였다.) 강렬한 색채가 중심이 되는 인상주의파 미술과 닮은 구석이 있다. 이런 문장들은 소설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진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독자들을 황홀한 감상에 빠지게 한다.

이 책이 단순히 미술가들만을 다룬 이야기로만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 어떤 이야기 보다 작가인 에밀 졸라와 가장 밀접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졸라는 파리 도처에 있는 카페에서 인상주의파 화가들을 비롯한 여러 예술인들과 교류한 적이 있고, 레벤느망 (L’Evénement) 이라는 신문에서 논설가로 활동하며 인상주의파를 옹호하는 사설들을 여럿 기고한 바도 있는데다 소설 내에서도 클로드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피에르 상도즈가 작가 자신에게서 따온 게 분명해 보이는 만큼 본작은 자전적인 성격도 띄고 있다. 그런 만큼 졸라의 예술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클로드가 예술에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띄고 있는데, 여기서 예술을 향한 격정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반면 허구에 불과할 수 있는 예술에 사로잡혀 지속적으로 겪는 정신적인 고통과 현실에서의 삶이 황폐해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가가 예술에 관해서 품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밀 졸라의 작품세계나 서양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주저없이 추천한다.

4.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Pantaleón y las visitadoras)

"이키토스가 속으로는 타락한 곳이지만 겉으로는 청교도 같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中

1936년 페루 아레키파에서 태어나 소설가, 극작가, 문학 비평가, 언론인, 대통령 후보로도 출마할 정도의 거물 정치인 등 여러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다가 201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대문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Mario Vargas Llosa) 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도 읽어봤다. 원래 본작은 작가 본인이 엉겁결에 호세 마리아 구티에레스와 공동 연출을 맡게 된 동명의 영화 시나리오하고 같이 집필하였다고 한다. 영화의 경우에는 시원하게 말아먹었지만 소설로 쓰여진 본작은 최고의 판매고를 올리며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고, 작가의 문학관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은 철두철미한 업무처리 능력을 갖춘데다 임관 이후 단 한 번도 징계를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근무 태도를 보여온 페루 육군 행정장교 판탈레온 판토하 대위 (이하 판타) 가 새 부임지 발령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육군 병참사령부로 출두하여 새 부임지를 통보 받는데, 최근 페루 동북부 아마존 지역에 주둔하는 육군 병사들이 외출을 나온 사이 민간인 여성들을 상대로 겁탈하는 일이 속출하자 이를 막기 위해 아마존 지역의 중심도시 이키토스로 가서 비밀리에 '특별봉사단' 을 조직한 다음 병사들의 성욕을 해소시키라는 황당한 임무를 받는다. 평생을 바른생활 사나이로 살았던 판타는 당연히 임무를 탐탁치 않아 하지만 군인으로서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사업가로 위장하여 특별봉사단 조직에 착수한다. 이후 이키토스에서 가장 큰 유흥업소를 소유하고 있던 마담 추추페 (본명: 레오노르 쿠린칠라) 와 '젖빨개' 로 불리는 바텐더 후안 리베라, '짱꼴라' 라는 별명을 가진 기둥서방 포르피리오 웡을 포섭한 다음 지역에 있는 매춘부들도 모집하여 어찌저찌 특별봉사단을 가동하는데, 하필이면 판타의 좋은 머리와 업무 추진력이 만나면서 임무를 너무 잘 수행해 버리는 바람에 벌어지는 사건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가의 말로는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얘기라고 한다.

위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다루는 소재는 자극적이면서도 막장스럽다. 주요 스토리가 육군 장교가 포주 노릇하면서 공창제를 굴리는 이야기이니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불편하고 역겨운 느낌을 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1973년 이 작품을 출간하기 전까지는 담을 쌓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던 유머를 본작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마냥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문체로 유려하게 서사를 전달하면서 탁월한 블랙 코미디로 승화시켰다. 글만으로 사람 웃기는 게 쉽지 않은데 한동안 작가가 유머를 멀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웃음을 빵빵 터트리며 읽었다. 작가 말마따나로는 본인도 이 책을 쓰면서 재미를 느낀 나머지 각 장을 끝맺을 때마다 이웃들한테 작품을 낭독해 줄 정도면 말 다 한 것 같다. 이런 코미디를 무기로 공창제라는 매우 천박하면서도 황당한 계책을 내놓고는 이를 점잖떨면서 아닌 척하려는 페루 군부의 행태도 신랄하게 풍자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블랙 코미디로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도 전형적인 방식하고는 궤를 달리 한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이뤄져있는데 각 장마다 서술 방식이 다르다. 그 중 몇몇 장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내용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한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여러 등장인물과 2~3 개 이상의 상황을 한꺼번에 다르고 한 문단마다 각자 다른 상황에서의 대화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향으로 극을 전개한다. 영화에서 몽타주 (Montage) 기법이 연상되는 방식이다. 다른 장들의 경우에는 작중 판타 대위나 특별봉사대와 관련있는 장교들이 제출하는 보고서 혹은 서한으로 극중 상황을 서술하거나, 판타의 아내인 포치타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주고받는 편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또는 본작의 무대가 되는 이키토스의 언론보도로 사건을 하는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서사를 진행한다. 어쩌면 이야기를 만들어서 조각조각 나눠 놓은 다음에 무작위로 나열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처음엔 글이 난잡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계속 읽다보면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파트들이 극이 진행되면서 다른 파트들과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면서 작가의 치밀함에 감탄하게 된다. 마치 직소 퍼즐을 맞춰 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해 주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거야말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생각한다. 유머가 넘쳐나서 가벼운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고 픽션으로서의 재미도 탁월한 만큼 성인 취향의 블랙 코미디에 거부감이 있는 게 아니라면 꼭 한 번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5. 염소의 축제 (La Fiesta del Chivo)

“그는 살며시 눈을 감고서 조용한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트루히요가 만들 수 있었던 체제, 도미니카 사람들이 조금 빠르거나 늦는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공모자로 참여했던 체제가 얼마나 사악한지 생각했다.”

염소의 축제 中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가 너무 재밌어서 같은 작가가 썼던 장편소설 염소의 축제도 연달아 읽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1973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작가인 바르가스 요사가 서른 일곱 즈음에 썼던 책이다. 작가의 연대기 상으로는 커리어 중반 초기에 쓰여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번에 읽은 책은 28년이 지난 2000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작가가 ‘나는 훌리아 이모와 결혼했다’, ‘새엄마 찬양’, ‘세계 종말 전쟁’ 등 여럿 명작들을 탈고하며 중견 문학가로 자리잡고 1992년 페루 대선에 출마하여 결선투표까지 가며 거물 정치인으로 활동한 이후에 집필한 책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서사가 더욱 탄탄해지고 문장도 더 밀도 있어진 게 눈에 띄였다.

본작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곳은 작가의 조국인 페루가 아니라 카리브 해 이스파니올라 섬에 있는 소국 도미니카 공화국이다. 한국인에게는 페드로 마르티네스, 알버트 푸홀스 같은 명투수와 명타자를 배출한 야구 강국으로 익숙한 나라일 것이다. 이 책은 193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31년간 폭압적인 통치를 자행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 (Rafael Trujillo) 의 암살사건을 주요 플롯으로 한 정치 스릴러다. 소설인만큼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허구적인 요소를 가미하며 각색하였지만 역사적인 인물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이니 만큼 도미니카 안팎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들과 맞물리는 구석이 많다. 가령 예를 들면 트루히요가 집권하던 1937년, 평소 도미니카인과 사이가 안좋았던 이웃국가 사람 아이티인을 상대로 벌인 ’파슬리 대학살‘, 트루히요 정권 말렵인 1960년 독재정권의 무자비함에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반트루히요 정서에 불을 지펴 정권의 종말을 앞당긴 미라발 자매 사망 사건, 베네수엘라의 군부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민정 대통령 로물로 베탕쿠르의 암살 미수 사건, 1959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재자인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게 되는 쿠바 혁명과 이듬해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실행하다 실패했던 피그스만 침공 이야기가 나오는데 책의 중심 스토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들이다. 이런 만큼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정세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면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작가의 전작인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다각적인 방식으로 극을 진행시킨다. 극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트루히요의 총애를 받다가 석연찮게 눈밖에 난 고위 관료 아구스틴 카브랄의 딸인 우라니아 카브랄이 1961년 14세 때 미국으로 떠나 35년 후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오며 지난 날을 회상하는 스토리라인이다. 다른 하나는 1961년 5월 30일 암살을 앞둔 트루히요의 하루 일과를 짚어보며 진행되고, 마지막 하나는 트루히요의 암살을 계획하는 네 남자의 과거사와 암살사건의 경과를 보여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초반엔 서로가 유리되어 있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극이 점차 진행되면서 이야기 간의 연결고리가 두드러지고, 너무 파편화된 나머지 읽는 입장에서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던 시퀀스들이 경과에 따라 딱딱 알맞게 맞춰져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그덕에 나도 책을 읽으면서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처럼 작가의 치밀함에 여간 감탄한게 아니었을 정도였다. 전형적인 방식대로 플롯을 진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고 빈틈없이 서사를 쌓아놓은데서 바르가스 요사가 괜히 대문호로 평가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다각적인 시각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이 책은 독재정권에 가담한 사람들과 압제의 피해자들, 독재 체제 반항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아울러 담아내었다.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생각을 밀도있게 묘사하면서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그덕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단순히 ’와 옛날 도미니카 공화국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의 피상적인 감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폭력과 압제로 물든 도미니카의 사회상에 깊이 공감하게 되고, 끝내는 폭압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찰하게 된다. 우리가 있는 곳에 떨어져 있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이다보니 구체작인 양상은 많이 다르지만, 비슷하게 군부 독재를 겪었던 한국인들에게도 제법 익숙하면서 씁쓸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너무 폭력 묘사에 충실한 나머지 읽으면서 속이 거북해지는 장면들도 있긴 하지만 개성있는 내러티브, 치밀한 플롯, 소설로서의 재미를 모두 갖춘 명작이므로 남미 문학에 관심이 생겼다면 꼭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6. 알레프 (El Aleph)

“나에게 있어 수천 가지 모습들은 단 하나의 모습이 될 것이다. 또한 지극히 복잡한 꿈은 지극히 단순한 꿈으로 화할 것이다.“

알레프에 수록된 단편 자히르 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과 환상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가 집필한 단편집 알레프도 읽어봤다. 1949년 첫 출간 당시에는 단편소설 13편 정도만 수록되었다가 1952년 개정을 거쳐 4편이 더 추가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책이다. 참고로 저는 한동안 책을 안읽다가 다시 독서에 흥미를 붙이게 된 계기가 보르헤스의 또다른 단편집인 ‘픽션들 (Ficciones)’ 을 읽었던 것인데 그래서 거의 망설이지 않고 알레프를 구했다. 이 책을 펼치기 전 작가의 전작을 여러번 읽어봤으니 처음 보르헤스를 접했을 때 만큼 어렵진 않겠지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품었는데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그게 산산조각이 났다.

전술하였듯이 이 책은 열일곱 가지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전작이었던 픽션들처럼 각 소설들의 무대가 되는 배경은 굉장히 다양하다. 작가가 대부분의 일생을 보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로 옆동네인 우루과이, 고대 로마, 그리스 신화, 중세 이탈리아, 이슬람 제국 지배 하의 스페인, 1910년대 영국,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 등 왠만한 세계사를 담아놓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배경을 다루고 있다. 물론 ’픽션들‘ 과는 차별화된 주제를 중심에 두고 있기도 하다. 픽션들은 가상의 음모론, 서적, 종교를 작가가 가진 온갖 지식을 총동원해서 매우 그럴싸하게 만든 다음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 끼워넣어 독자들로 하여금 혼동을 느끼게 하는 메타픽션 (Metafiction) 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반면 알레프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두각시키는 시대의 무한한 반복, 완전히 달라 보이는 두 가지 대상이 지닌 공통점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보편성, 그리고 굉장히 한정되고 작아 보이는 대상에서 신적인 존재와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범신론적인 세계관을 두루 갖춘 총체적인 우주관이 중심이 된다.

수록된 단편들 모두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걸작이지만, 이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들을 골라보자면 불멸이라는 소재를 무한히 반복되지만 불규칙적이고 기괴한 카오스 (χάος, chaos) 처럼 묘사한 ’죽지 않는 사람 (El immortal)’ , 정론과 이단은 깻잎 한 장 차이라는 조소가 담겨 있는 듯한 ‘신학자들 (Los teólogos)’, 한 가지 물체만이 머리에 각인되어 사고방식이 일원화 되는 과정을 담아낸 ’자히르(El zahir)’, 운명론과 범신론적인 세계관이 두드러지는 ‘신의 글 (La escritura del dios)’, 가장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이자 이 작품이 지닌 총체적인 우주관을 정리해 놓은 것 같은 ’알레프 (El Aleph)’ 가 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도 완벽히 이해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을만큼 난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마냥 가볍게 추천하긴 어렵지만 보르헤스를 좋아한다면 실망할 일이 없을 걸작이기에 문학 좋아하는 애독가라면 다음 책 고를 때 참고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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