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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라이트노벨의 이율배반적 과제

지난 글에서, 『모노가타리』는 상업 논리 속에 포스트모던한 픽션과 근대문학의 내면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가라타니 고진의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큰 전환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 대해서 고찰할 때 나는 일본 동시대의 문학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으로 돌아온 후 문예시평을 시작했을 때 거기에서 근대문학이 결정적으로 변하는 광경을 찾아냈다.

특징을 말해보자면, 그것은 <내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이라고 하면 어두운 욕망이 가득한 내면에 대한 것이라는 일방적 이미지가 이 시기에 사라졌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언어>가 의미나 내면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풍경의 발견>에 의해 배제되었던 것이 복권된 것이다. 언어유희, 패러디, 인용, 거기에 스토리텔링까지, 근대문학이 배척했던 모든 영역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257p

여기서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을 ‘내면성’으로,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던을 ‘내면성의 부정’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비평의 도식에 딱 나눠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모노가타리』는 근대문학에 의해 배제되었던 언어유희, 패러디, 인용,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하지만, 욕망이 들끓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여전히 근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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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가타리』 뿐만이 아니죠. 에반게리온을 위시하여 세카이계는 일본 사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아, 폐쇄적인 내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근대의 내면성과 허구 중심의 포스트모던이 교차하는 지점을 볼 수 있습니다.

신조 카즈마는 라이트노벨을 ‘캐릭터를 빠르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일러스트 등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을 특화해온 장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명 ‘캐릭터 소설’인 것입니다.

캐릭터 소설은 곧 ‘캐릭터’ / ‘소설’입니다. 오스카 에이지는 라이트노벨을 만화사와 문학사의 교차점으로 보고 있더군요. 곧 만화의 비현실성(포스트모던)을 담은 ‘캐릭터’와 근대문학의 현실성(내면성)을 담은 ‘소설’이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라이트노벨이 문학이냐는 질문은 ‘문학이기도 하고, 문학이 아니기도 하다’는 어정쩡한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 질문의 의도는 라이트노벨의 장르가 아닌 수준을 논하는 것에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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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눈속임, 혹은 실패

이제 다시 모노가타리를 읽는 세가지 독법으로 돌아가 보죠.

1) 모노가타리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 피상적 감상

2) 모노가타리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 전통적 문학 비평

3) 모노가타리는 픽션에 대한 이야기이다. - 장르 비평

1번은 줄거리 요약에서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평이 되긴 어렵습니다.

2번은 전통적인 문학 비평에 해당합니다. 근대문학은 특정한 사건 속에 인간의 내면을 심어 넣지요.

3번은 포스트모던적 조류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비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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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2번 방식으로 라이트노벨을 몹시 정성스럽게 비평한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만,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캐릭터≠인간’, ‘인간의 내면≠청소년의 에고’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노벨을 비평하기 위해선 좋든 싫든 장르 비평을 거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2번과 3번의 괴리를 주목하는 지점에서 라이트노벨의 정체성 논란을 가로지르는 비평이 나올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저는 『모노가타리』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근대적인 내면과 포스트모던한 육체를 다루는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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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가타리』 시리즈의 시작인 『괴물이야기』에서 니시오 이신은 분명 인간의 내면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고, 『상처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만, 곧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언제든 재생될 수 있는 포스트모던한 육체를 가진 아라라기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인간과 너무 멀어진 탓에 내면을 묘사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 괴리를 『가짜이야기』에서 명확히 인식한 듯 보입니다. 그 고민의 흔적을 포스트모던한 태도를 가진, 사기꾼 카이키 데이슈의 등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가짜다’라는 주장을 밀어붙이기로 한 거죠.

결국은 내면묘사의 빈약함을 감추기 위해 픽션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비단 모노가타리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던 야심찬 라이트노벨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다시 장르적 규칙에 종속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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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내청코』는 판타지적 요소가 없는 평범한 일상물이고,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치만이 말하는 ‘혼모노’(진짜)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텅 빈 기표에 가깝습니다. 작가도 그게 뭔지 모르고, 그냥 “‘혼모노’를 계속해서 찾아가는 게 혼모노가 아닐까...‘”라는 스노브(snob)한 동어반복을 할 뿐입니다.

대신, 그 빈자리에 러브코미디적 요소를 채워 넣었습니다. 삼각관계, 히로인 간의 백합(우정), 불투명한 남주의 심리(믿을 수 없는 화자), 왜인지 수상할 정도로 젊은 히로인들의 어머니 등등.

하치만의 독백은 라노벨치고 굉장히 유려하고, 가끔 그럴싸한 통찰들이 엿보이기도 합니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러브코미디의 규칙에 종속되어버린다고 표현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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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이트노벨의 감초인 장황한 내면묘사는 청소년의 자의식 내지 욕망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Air』 독법을 빌려오겠습니다. 미성년 남성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눈을 돌려, 픽션의 세계에 몰입합니다. 그곳에서 독자는 모에한 여자아이들을 ‘구원’하며 성인 남성으로 거듭나는 가상 체험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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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가타리』를 다룬 논문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보았습니다. 이선경 『라이트노벨과 미성년 욕망의 매커니즘』에서는 작품 내의 ‘괴물’은 주인공인 아라라기에게 ‘재생가능한 신체’라는 초능력을 주었지만, 히로인들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지적하더군요.

이유는 당연하지요. 그런 설정이 있어야, 폐쇄적인 내면을 가진 주인공이 매력적인 여자아이를 구원하고 소통하고 연애하며 성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라이트노벨의 서사와 내면은 큰 제약을 받습니다.

저는 라이트노벨의 내면묘사를 ‘눈속임, 혹은 실패’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청소년 독자의 자의식과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눈속임일지, 아니면 정말로 제대로 된 내면묘사를 시도하다가 장르적 제약 탓에 실패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둘 다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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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라이트노벨은 나들목이라는 것. 서브컬쳐의 상업적 규칙을 준수해가며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완성도 있는 근대문학적인 라이트노벨은 구조적으로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라이트노벨이 갖는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심은 독자들에게 좋은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랬고, 또 다른 독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무의미한 언쟁을 피하기 위해 첨언합니다. 픽션으로서의 라이트노벨에 관심이 있다면 그대로 즐기시면 됩니다. 픽션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은 라이트노벨을 명작이라 부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독붕이들이 애정해온, 지적, 사회적 임팩트를 갖춘 ‘근대문학’과는 다른 영역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떨까요. 근대문학 자체가 몰락해버린 지금 단계에서, 현재의 순문학과 라이트노벨의 구분은 크게 의미를 갖지 않아보입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모던을 거대담론을 상실한 70년대 이후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로 정의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로 인해 등장한 예술 사조로 구별합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라이트노벨은 사회적 변화가 반영된 포스트모던이지만, 이 변화를 인식하고 논의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기 라이트노벨 작가일수록, 포스트모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중견 라이트노벨 작가인 니시오 이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픽션을 더욱 픽션으로 만드는 3가지 요소 - 말장난, 날조, 육체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편린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장르문학이니 순문학이니 서로 편 갈라 싸우기에는 문학의 경계가 많이 흐릿해졌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결론은 그렇습니다. 괜히 싸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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